[분수대] 해돋이
발톱이 빠지고 물집이 잡혔다. 난생 첫 지리산 등반은 고달프기 짝이 없었다. 무릎까지 쌓인 눈에 발이 푹푹 빠지고, 미끄러졌다. 내가 왜 산을 오른다고 했을까, 지금이라도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볼까. 온갖 생각이 머리를 휘감았다. 2박 3일의 행군 끝에, 지리산 노고단(老姑壇)에 올랐다. 날 선 새벽바람에 뺨이 갈라지는 듯했다.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비죽히 붉게 치솟는 해를 맞이했다. 아-.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동행했던 지인이 “삼대가 덕을 쌓아야 해돋이를 볼 수 있다”며 떠오르는 해를 배경으로 사진을 연신 찍어줬다.
앨범을 뒤져 십여년 전의 해돋이 사진을 찾아냈다. 청개구리 심보처럼 ‘하지 마라’고 하니 더 애틋하게 느껴진다. 다 코로나19 덕(?)이다. 강릉시는 경포 해변을 막았다. 공무원 1000여 명이 해변과 주차장을 막아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드론도 동원했다. 해변에 들어가는 해돋이 관광객을 잡아내 경고에도 물러서지 않으면 ‘사진’을 찍어 고발한다는 엄포도 놨다. 매년 인파가 몰렸던 해돋이 명소인 울산의 간절곶, 충남의 왜목마을도 봉쇄됐다. 뿐만인가. 바다 열차는 멈춰섰고, 동네 사람만이 아는 작은 해돋이 명소에도 금줄이 쳐졌다. 마치 전쟁을 치르듯, 지방자치단체마다 해돋이 행사 중단 선포가 이어졌다.
여명을 깨고 치솟는 새 해를 바라보는 벅찬 감동은 랜선 세계로 넘어갔다. ‘랜선 해돋이’다. 방송국마다 해돋이 중계에 열을 올렸고, 지방자치단체들도 뒤질세라 유튜브 채널에서 일출(日出)을 생중계하고 이벤트를 벌였다. 코로나로 인해 또 다른 방식으로 요란한 새해맞이를 하게 된 셈이다.
흰 소의 해, 신축년(辛丑年)의 첫 태양은 푸른 독도 바다에서 어김없이 떠올랐다. 동네 어귀에도, 우리 집 처마에도 얼굴을 내비쳤다.
이 모든 시끌벅적한 소동 덕에 어김없이 우리를 찾아와준 새 해의 감사함을 느낀다. 어리석게도, 단절과 결핍을 겪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닫는다. 새해 아침에 첫 해돋이를 보며 코로나19 백신과 치료제 소식에 희망을 키워본다. ‘우리가 살아왔던 평범한 나날들이 다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버렸죠/당연히 끌어안고 당연히 사랑하던 날 다시 돌아올 거에요. 우리 힘껏 웃어요.’(이적 ‘당연한 것들’)
김현예 내셔널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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