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 스민 '페미니즘'.. 여성 서사, 주류가 되다

박민지,강경루 2020. 12. 31.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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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적 女캐릭터 없앤 드라마·영화.. 한계 깬 예능
女감독들 약진 주목.. 무대에도 주체적 여성 넘실
작품 속 성인지 감수성 더 높아져야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 영화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 뮤지컬 '리지', 티캐스트 예능 '노는 언니'. 각 제작사 제공

문화예술계 전반에 페미니즘이 진하게 스민 한 해였다. 주체적인 여성을 향한 갈망과 부조리한 일상 속 문제의식이 작품으로 들어오면서 여성의 삶과 이들의 이야기가 주류 콘텐츠로 부상했다.

브라운관·스크린에 ‘캔디’가 사라졌다
올해 드라마 분야에서는 전통적 성역할에서 벗어난 인간 중심 서사가 이어졌다. 진취적인 여성 캐릭터와 일상 속 고질적인 성차별에 경종을 울리는 대사들은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SBS ‘하이에나’(2~4월)와 ‘아무도 모른다’(3~4월)는 각각 배우 김혜수와 김서형이 이끌었다. 두 캐릭터 모두 전형적으로 남성 캐릭터가 배치됐던 ‘강한’ 역할이었다. SBS ‘굿캐스팅’(4~6월)은 여성 배우 3인이 중심에 섰는데, 최정예 요원의 이야기인 만큼 액션 장면이 남달랐다. 지금껏 여성들의 싸움이 뺨을 때리거나 머리끄덩이를 잡는 식이었다면 여기에선 정자세로 총을 발사하거나 좁은 공간에서 마주한 덩치 좋은 사내를 단숨에 드러눕힌다. 여성만의 고충도 녹였다. 백찬미(최강희)는 뛰어난 능력에도 유리천장을 절감했고 황미순(김지영)은 경력 단절 여성이었으며 임예은(유인영)은 싱글맘을 대변했다.

SBS '하이에나' 중 한 장면. SBS 제공

이영미 드라마평론가는 “주 시청자인 30~50대 여성의 관심사가 사랑에서 사회적 성공으로 이동하면서 여성의 지위에 대한 욕망이 높아졌다”며 “예전에는 여성이 어설프게 남성을 흉내 내듯 강한 척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면 현재는 성 역할을 아예 배제해 한 명의 사람으로서 여성이 이야기를 이끌고 있다”고 설명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9월)은 주체적인 한국형 여전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데, 여자 주인공은 히어로이고 남자 주인공은 충전기 역할을 한다. 강력한 능력을 지닌 여성을 전면 배치했던 서사는 점차 일상 속 불평등을 겪는 평범한 여성들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카카오TV의 오리지널 드라마 ‘며느라기’(11월~)는 집안일은 당연히 여성의 몫인 기형적 현실에 일침을 날렸고, tvN ‘산후조리원’(11월)은 임신과 육아의 사이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여성의 삶을 현실적으로 담아냈다.

영화 '69세' 스틸컷. 제작사 제공

스크린에도 여풍이 불었다. 가장 두드러졌던 건 여성 감독들의 약진이었다. 김도영 감독의 ‘82년생 김지영’, 김초희 감독의 ‘찬실이는 복도 많지’, 윤단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 홍의정 감독의 ‘소리도 없이’ 등 수작이 이어졌다. 여성 영화인의 작품에는 그간의 영화에서 타자화됐던 여성의 삶이 더 깊이 녹아들어 있기 마련이다.

여성 중심의 캐릭터 구성이 도드라진 작품도 여럿 활약했다. 코로나19 여파 속에서도 흥행한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이 대표적이다. 고아성 이솜 박혜수 주연의 이 영화는 회사의 말단 여직원들을 중심으로 회사의 비리를 파헤치는 과정을 통쾌하게 그려내면서 입소문을 탔다. 이밖에도 신혜선 배종옥 주연의 ‘결백’은 공고한 남성 카르텔을 부수는 여성의 이야기였고, 신민아 이유영 주연의 ‘디바’는 욕망하는 주체로서의 여성을 조명했다.

중·장년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의 등장도 눈여겨볼 만하다. 노년 성폭행 문제를 다룬 예수정 주연의 영화 ‘69세’와 중년 여성의 삶을 담은 김호정 주연의 ‘프랑스 여자’ ‘젊은이의 양지’가 차례차례 관객을 만났고 남다른 작품성으로 박수받았다.

MBC 제공

예능에 언니들이 떴다
예능의 중심에도 여성들이 있었다. ‘나대는 여성’에 대한 불호가 만연했던 터라 예능에서 여성이 주축이 된 건 의미 있는 변화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은퇴 기로에 놓였던 중년 여성 연예인들의 이야기다. KBS2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7~12월)의 등장은 파격이었다. 혼자 사는 중장년 여성이 나오는 관찰 예능은 전무후무했다.

MBC ‘놀면 뭐하니?’에서 탄생한 ‘환불원정대’에는 50대 여가수 엄정화가 등장했다. 그는 “앨범을 낼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며 “나 때는 서른이 넘은 댄스 여가수는 드물었다”고 말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여성 연예인은 성별과 연령이라는 이중 잣대로 평가됐지만 사회가 변했다”며 “현재 트렌드를 이끄는 경제력 있는 30~40대 여성들은 새로운 리더십을 갈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티캐스트 e채널 ‘노는 언니’(8월~)도 혜성 같았다. 은퇴했거나, 쉬고 있는 여성 운동선수들이 출연한다. 방현영 CP는 “여성 예능은 암묵적으로 한계가 많다고 여겨졌다”며 “공격하고 망가지는 코미디의 기본 구조를 유지하기에는 남성이 편하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매체는 여성에게 순종을 강요했지만 언니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엠넷 '굿걸' 중 한 장면. 엠넷 캡처

페미니즘을 다룬 예능도 쏟아졌다. 웃음을 지향하는 예능에서는 올바름을 이야기하기 어려웠던 상황을 감안하면 사회의 변화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다. 여성 래퍼 슬릭이 엠넷 음악 예능 ‘굿 걸: 누가 방송국을 털었나’(5~7월)에 등장하자 온라인이 들썩였다. 그가 유명한 페미니스트라서다. 지난 5월 MBC ‘라디오스타’에는 이런 자막이 나왔다. ‘페미니즘: 여성의 권리 및 기회의 평등을 추구하며 여성에 대한 차별을 반대하는 사상’. 가수 핫펠트가 왜 페미니스트를 선언했는지 이유를 말하는 장면이었다.

뮤지컬 '마리퀴리' 중 한 장면. 라이브 제공

무대 위 여자들
공연계에도 변화의 물결이 넘실거렸다. 뮤지컬 ‘마리퀴리’(3·9월)는 주체적인 여성으로서 마리의 캐릭터를 분명히 하면서 그 파트너 역시 여성을 선택했다. 김태형 연출은 “지금까지 주인공이 여성인 경우는 많았지만 그의 조력자나 친구나 라이벌은 늘 남성이었다”며 “반드시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여성이 주축이 된 공연이 특이할 게 없지 않나”라고 덧붙였다.

연극 '햄릿' 이미지. 국립극단 제공

인식론적 전환이 이뤄진 무대는 이뿐 아니다. 코로나19 여파로 안타깝게 오르지 못한 국립극단 ‘햄릿’은 왕자 햄릿을 공주 햄릿으로 바꿨다. 비단 성별만 바뀐 것이 아니다. 복수 앞에서 끊임없이 고뇌하던 햄릿이 단죄를 향해 치닫는 인물이 됐다. ‘햄릿’ 부새롬 연출가는 최근 본보와 인터뷰에서 “셰익스피어 고국(영국)의 왕이 여왕인데 굳이 햄릿을 왕자로 고집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극을 한 인간의 이야기로 그리기 위해 왕자 햄릿을 여성이 연기하는 젠더 프리 캐스팅보단 얼개 전체를 바꾸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고 설명했다. 주목받는 연출가 신유청의 ‘언체인’을 비롯해 ‘오만과 편견’ 등 트렌드로 떠오른 젠더 프리 캐스팅을 도입한 연극 작품도 꾸준히 관객을 만났다.

여성만 오르는 공연도 많아졌다. 록뮤지컬 ‘리지’(4~6월)는 미국에서 118년 전 벌어진 ‘리지 보든 사건’을 여성주의로 해석한 작품인데, 등장인물은 딱 여성 4명이다. 남성우월주의 속 억압과 폭력에서 벗어나려는 여성들의 사자후가 공연장을 가득 메웠다. 내년 1월에는 여배우 10명이 만드는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가 재연으로 돌아온다.

예매로 국립극단 홈페이지가 일시 마비될 정도로 화제를 모았던 연극 ‘화전가’도 예수정 전국향 문예주 등 여성 9명이 무대를 꾸미는 독특한 작품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 안동에서 살았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아름다운 우리말로 풀어낸 수작으로 한국극예술학회의 2020년 ‘올해의 작품상’에 선정됐다.

2021년 과제들
사회 변화를 담은 작품들이 쏟아진 한 해였지만, 여전히 작품 속 성인지 감수성은 과제로 남는다. 아직도 드라마에서는 남성의 권력을 부각하거나 스트레스 푸는 장면을 묘사할 때 룸살롱 장면을 삽입해 여성을 전시하고 있다. 여성혐오적 시선도 여전하다. SBS ‘더 킹’(4~6월)은 김은숙 작가의 커리어에 오점을 남겼다. 시청자는 더없이 당차던 여형사가 왜 대한제국에 떨어진 후엔 남성에게 의지하는 나약한 서민이 돼야 하냐고, 최연소 여성 총리가 왜 ‘어리고 예쁜’ 여성을 샘내야 하냐고 따져 물었다.

SBS ‘편의점 샛별이’(6~8월)도 시대착오적 발상으로 뭇매를 맞았다. 여고생이 성적 매력을 무기로 순진무구한 성인 남성을 꼬여내고, 키스하며, 노골적인 대사를 주고받는 위험한 상황이 연출됐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중징계에 해당하는 법정 제재를 내렸다.

JTBC ‘부부의 세계’(3~5월)에서는 남성 괴한이 지선우(김희애)를 폭행하는 장면이 문제가 됐다. 카메라는 괴한의 1인칭 시점에서 피해자를 내동댕이치고 목을 조르는 모습을 잡았다. 여성 폭력을 전시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웠다. KBS ‘한 번 다녀왔습니다’(3~9월) 역시 성상품화 논란에 휩싸였다. 김밥가게를 연 강초연(이정은)은 여성 직원 2명과 몸에 딱 붙은 짧은 치마를 입고 호객행위를 했다.

예능 속 기울어진 운동장도 지적된다. KBS 2TV ‘살림하는 남자들 시즌2’에는 아내에게 꾸밈 노동을 강요하는 남편과 어쩌다 한 번 살림을 ‘도와주겠다’는 남편이 있었다.기안84 여성혐오 논란 등 웹 콘텐츠 창작자를 향한 변화 요구 목소리도 거세다.

박민지 강경루 기자 pm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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