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한 미술] 외벽에 붙은 1.7km 구름 문양.. "비행기의 도로랍니다"

손영옥,미술·문화재 2020. 12. 31.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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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끝 인천국제공항 공공미술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은 처음부터 예술품을 갖춘 '아트포트'로 2018년 1월 문을 열었다. 면세구역에는 구름 이미지를 추상화한 지니 서 작가의 시트지 작품이 파빌리온에 벽화처럼 붙어 있다. 인천공항=최현규 기자


휴대전화 로밍센터는 비어 있었다. '임시 운영 중단' 안내표시가 눈에 띈다. 놀랄 일도 아니었다. 예고편처럼 동네 앞 공항버스 정류장에도 '임시 운행 중단' 안내가 붙어 있는 걸 봤다. 하긴 지금 해외여행이 '잠정 중단'되다시피 한 시대를 살고 있지 않나. 1월 중순 국내에 첫 확진자가 발생하며 현실감 있게 다가온 코로나19 사태는 세계적 팬데믹이 됐다. 우리는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경험을 하고 있다. '마스크를 쓰고 사는 시대'는 꽤 길어지고 있다. 해외여행은 추억 속에나 있다. 신규 확진자 수는 12월 들어 하루 1000명을 넘어서는 등 사상 최대를 경신하고 있다.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선 백신을 맞기 시작했다. 한국은 방역 선진국을 자랑하다 졸지에 '백신 개도국'이 돼 버렸다. 앞으로 '백신 여권'이 없으면 입국을 거부당하는 사태가 올 수 있다는데, 어쩌면 해외여행은 내년 가을, 겨울까지도 쭉 꿈일 수밖에 없는 거 아닐까, 하는 불안감을 누르며 얼마 전 인천국제공항에 갔다. 그곳에 설치된 공공미술 작품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텅 빈 면세구역…여행객보다 직원이 더 많아

낯익으면서 동시에 낯선 풍경이었다. 이런 걸 ‘언캐니(uncanny·기이한) 풍경’이라고 했던가. 면세구역엔 여행객보다 신분증을 목에 건 공항 직원이 더 많았다. 환한 조명을 받은 명품이 진열된 화장품 면세점에도 판매 직원들만이 미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주 간혹 캐리어를 끌고 가는 여행객이 눈에 띌 뿐이었다. 탑승 게이트로 이어지는 ‘자동길’(무빙워크)에 올라탄 사람도 거의 없었다.

혼자 도는 무빙워크의 양옆에서 이 멋쩍은 광경을 바라보는 미술 작품이 있다. 지니 서(57) 작가의 ‘상상의 날개(wings of vision)’다. 출국심사장을 나오면 양 날개처럼 펼쳐진 면세구역을 따라 무려 1.7㎞에 걸쳐 있는 공공미술 작품이다. 어, 그런 게 어디 있더라? 이렇게 말하는 독자들도 있겠다. 회화라면 액자 안에, 조각이라면 좌대 위에, 미디어아트 작품이라면 전광판 안에 들어 있기 마련인 미술 형식에 대한 상식을 깨기 때문이다. “지인들도 제 작품 앞에 서서 전화를 해요. 네 작품 어딨느냐고요? 하하.”

면세구역 양 벽을 따라 들어선 스타벅스 커피숍, 화장실, 책방 등 여러 공간의 외벽에 벽지처럼 붙여진 시트지가 서 작가의 작품이다. ‘거리 갤러리’라고도 불린다. 작가는 시트지에 구름 문양을 추상화시켜 붙였다. 동쪽으로 이어지는 면세구역에는 새벽 여명 같은, 혹은 인천의 바다를 연상시키는, 하늘색 회색 청색 등을 섞은 블루 톤의 구름이 있다. 서쪽으로는 주황 노랑 연두 등을 조합함으로써 저녁노을을 닮은 주황색 톤 구름이 펼쳐진다.

작가에게 구름은 외국 여행의 은유다. 1968년, 5살 때였다. 의사 엄마는 그를 남겨두고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다. 공항의 탑승 게이트 입구까지 배웅을 나올 수 있었던 그 시절, 엄마를 태우고 이륙한 비행기가 구름 속으로 아득히 멀어져가는 모습은 강렬했다. 어린 그에게 구름은 ‘비행기의 도로’로 비쳤다. 엄마가 구름을 타고 다른 나라로 간다고 생각했던 그는 구름 위에 세워져 있을 다른 나라를 상상했다고 했다. 공공미술 작품으로 그 구름을 제시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들에겐 어디로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마침내 떠날 때는 설레고 긴장되는 등 온갖 감각이 열려 있습니다. 제 작품이 비행기에 타기 전에 느끼는 그런 마음들의 배경이 되어줘서 좋아요.”

공항은 어떻게 미술관이 되었나?

2018년 1월 문을 연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은 처음부터 ‘아트포트’(아트+에어포트)를 지향했다. 터미널을 만드는 단계부터 출국장과 면세구역, 수화물 수취구역 등에 설치할 오감을 자극하는 공공미술 작품을 계획했다. 출국장엔 프랑스 작가 자비에 베이앙(Xavier Veilhan·57)의 파란색 모빌 조각이 에스컬레이터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공항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동하는 곳이라 움직이는 작품을 만들었다”면서 “크지만 위압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작품으로 관람객들에게 시적인 경험을 줄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입국장에서도 예술작품과 조우한다. 수하물 수취구역에서 독일 작가 율리어스 포프(Julius Popp·47)와 김병주(41) 작가의 작품이 환영 인사를 한다. ‘비트 폴(비트 폭포)’이라고 이름 붙여진 포프의 작품에는 세계 각국의 실시간 검색어가 9개 국어로 추출돼 폭포수처럼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수많은 물방울 글씨로 보인다. 이 ‘물 글씨’ 작품, 기억나지 않나. 김병주 작가의 ‘모호한 벽’은 광화문, 구서울역사, 독립문 등 서울의 역사를 상징하는 주요 건물들을 부조 형식으로 시각화했다. 한국의 랜드마크를 통해 외국인에게는 낯선 즐거움을, 내국인에게는 익숙한 반가움을 준다.

도둑처럼 몰래 들어선 제1여객터미널 공공미술

예술이 있는 제2여객터미널에 대한 반응이 좋자 인천국제공항공사는 2년여 뒤인 올해 5월 기존 제1여객터미널에도 공공미술 작품을 설치했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로 해외여행 문화가 실종되면서 언론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조용히 오프닝 행사를 해야만 했다.
올해 5월 제1여객터미널에 설치된 작품들로 각각 CGV 앞에서 볼 수 있는 서도호 작가의 '집 속의 집'. 인천공항=최현규 기자


다시 해외여행을 가게 되는 날, 가장 먼저 당신을 맞을 작품은 설치미술가 서도호(58) 작가의 ‘집 속의 집’이다. 공항철도에서 내려 제1여객터미널 역사에서 빠져나오자마자 CGV 앞 광장 천장에 매달린 ‘모기장 집’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이 작품이다. 큰 집 속에 작은 집이 들어가 있는 형태다. 전통 건축물인 한옥 형태라 ‘전통의 계승’을 의미한다. 청사초롱을 연상시키는 배색도 그렇다. 역시 외국인에게는 한국적 인상을, 내국인에겐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모기장 천을 연상시키는 반투명 천을 바느질해 지은 집이 주는 느낌은 묘하다. 서울과 뉴욕, 런던을 오가며 작업하는 작가는 언론 인터뷰에서 “집은 내겐 옷과 같은 존재다. 천으로 지어 벗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 적 있다. 한 군데 정박하지 않고 세계를 이동하며 사는 노마드 시대에 집은 달팽이처럼 몸에 걸치는 옷과 같다는 의미다. 그 노마드 시대가 주춤하고 있다. 참, 서 작가는 지난 11월 타계한 수묵 추상의 선구자 서세옥(1929∼2020) 선생의 아들이다.

탑승동 면세구역 전광판에 전시되는 박제성 작가의 영상작품 '스토리 오브'. 박제성 작가 제공


출국장을 빠져나온 뒤 면세구역에서 지하 1층 셔틀트레인을 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에 올라서면 또 다른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금색 은색 구슬을 길게 늘어뜨린 수렴(발)이 입체를 이루며 설치돼 있다. 숯 등을 매다는 설치작품으로 ‘숯 조각 작가’로 알려진 박선기(54) 작가의 작품 ‘집합 190707’이다. 지상 4층에서 지하 1층까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다 보면 보는 위치에 따라 매번 다르게 보인다. 각각 다른 색깔의 구슬이 보는 위치에 따라 새로운 기하학적 패턴을 연출하며 시각적 즐거움을 준다. 색의 조합은 만남과 헤어짐에 대한 조형적 비유인 것이다.

제1여객터미널 면세구역에 설치된 박선기 작가의 '집합 190707'. 인천공항=최현규 기자


셔틀트레인을 타고 탑승동으로 가게 되면 젊은 감각의 작품이 기다린다. 탑승동은 저비용 외국 항공사들이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이용객의 연령층도 젊은 편이다. 이 탑승동 면세점의 한가운데 전광판에 박제성(42) 작가의 미디어아트 작품 ‘∼의 이야기(스토리오브)’ 등이 흐른다. 숭례문, 광화문, 남한산성, 석가탑, 고인돌 등 한국의 문화재들이 경쾌한 수채화 붓질로 그려져 있다. 그 붓질들이 하나하나 떨어져 나왔다가 다시 합쳐지며 형태를 완성하는데, 문화라는 건 그런 작은 움직임들의 집합이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 같다.

코로나로 ‘집콕’ 하는 사이 도둑처럼 몰래 설치된 이들 작품을 볼 날은 언제 오려나. 마스크를 더 이상 쓰지 않아도 되고, 해외여행도 자유로워지는 그날 말이다. 텅텅 빈 입국심사장의 내국인용 파란 줄 펜스와 외국인용 빨간 줄 펜스가 민망해 보였다. 내년 가을쯤엔 저 입국장도 사람들로 가득하길.

지금까지 ‘궁금한 미술’에 보여준 관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손영옥 미술·문화재 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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