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을지라도.. 한국 동포를 구하라" 어느 영국인의 유언

김건주 2020. 12. 22.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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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로 보는 외국인 독립유공자, '어니스트 베델'

[김건주 기자]

"동서고금에 문화 수준이 높은 나라가 낮은 나라에 영원히 합병된 역사는 없다. 그것이 바로 문화의 힘이다."

구한말 애국 계몽 운동가 위창 오세창이 한 말이다. 요컨대, '높은 문화의 힘'이 나라를 지킨다는 말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수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았음에도 민족성을 잃지 않고 살아남은 국가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민족의 얼과 혼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 민족만의 노력은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존립을 위해 힘쓴 외국인들도 있다.

영국 언론인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은 한국에서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받아 독립유공자로 지정됐다. 그는 왜 머나먼 영국에서 한국까지 왔으며, 어떻게 독립유공자가 됐을까.

키워드 1. #대한매일신보
 
 어니스트 베델(좌)과 대한매일신보(우) / 사진 제공 =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역, 국립중앙도서관
ⓒ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역, 국립중앙도서관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직후 서른둘이라는 나이에 베델은 영국 신문사 <데일리 클로니클>의 특파원 자격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당시 세계의 관심사였던 러일전쟁의 취재를 위해 입국했지만, 베델은 일본이 한국에 저지르는 만행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일본의 제국주의 동맹국이었던 영국은 친일 기사를 원했으나, 베델은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일본의 행동에 분노해 '덕수궁 화재는 일본이 저지른 일일 가능성이 크다'라는 의견의 기사를 게재했다. 베델은 이후 <데일리 클로니클>에서 해고됐다.

해고 후 그는 한국에 영자신문이 없다는 점을 알고 한국에서 영자신문 사업을 계획했다. 그는 미국 생활 경험이 있고 영어에 능통한 독립협회 회원 양기탁과 <코리아 데일리 뉴스> 창간을 준비하며 국민을 위한 신문도 준비했다.

1904년 7월 18일, 민족 계몽 독립운동가들의 지원을 받아 양기탁, 박은식 등과 함께 구한말 대표 정론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그는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일본의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을 비판했다.

영국인들은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기에 <대한매일신보>는 항일의 중심 언론으로 활용될 수 있었다. 베델을 신문을 통해 일제를 강하게 비판했다. <대한매일신보>는 국채보상운동을 도우며 비밀 항일 단체 '신민회'의 본부가 되기도 했다.

키워드 2. #경천사십층석탑
   
그의 언론활동은 눈뜨고 빼앗길 뻔한 우리 문화재도 지켜냈다.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뺏기고 2년이 지난 1907년 3월, 문화재 약탈자 다나카 미쓰아키 일본 궁내 대신은 한 무리의 일본인들을 보내 "고종황제가 기념으로 나에게 하사했다"라는 거짓말로 고려 시대의 유물 '경천사 십층 석탑'을 해체해 도쿄로 반출했다.

이 사기 행각을 들은 베델은 <대한매일신보>에 기사를 실었다.
 
"개성군과 풍덕군 접경 지역에 있는 경천사탑은 고려 공민왕 때 공주를 위해 옥석(대리석)으로 10층 높이로 세운 수백 년 된 유물이다. 그런데 무슨 허가를 받았는지, 일본인들이 그 탑을 무너뜨려 일본으로 실어간다 하기에 두 군민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빼앗기지 않겠다고 결사적으로 맹세했다고 한다."

1907년 3월 12일 자 <대한매일신보>

이 사건을 세계에 보도함으로써 일본의 국내·외 여론은 불리해졌다. 다나카 미쓰아키는 약탈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일부 일본인들조차 탑의 반환을 요구했다. 계속된 반환 요구 끝에 1918년, 경천사 십층 석탑은 고국으로 돌아왔다.

어니스트 베델은 우리나라에서 영원히 사라질 뻔했던 경천사 십층 석탑을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때 베델과 같이 탑의 반환을 도운 이가 헤이그 특사와 3·1운동을 지원한 미국 선교사 호머 헐버트다.

현재 경천사 십층 석탑은 10년의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 내부에 자리 잡고 있다.

박물관의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눈에 띄는 높은 탑이 있다. 높이가 박물관 3층까지 이어져 있지만 균형 잡힌 모습으로 위태로워 보이지 않는다. 탑 벽마다 중국 고전 <서유기>의 내용이 양각으로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연꽃, 나한, 법회 장면, 합장한 불좌상까지 다양한 그림이 새겨진 이 아름다운 탑이 바로 경천사 십층 석탑이다.
 
▲ 국보 86호 경천사 십층 석탑  1348년 고려, 경기도 개풍(현 황해북도 개풍) 경천사에 세워졌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위치
ⓒ 김건주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국보 86호 경천사 십층 석탑. 양각의 무늬가 수놓여 있다.
ⓒ 김건주
키워드 3.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의 베델 묘역
ⓒ 김건주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의 베델 묘역
ⓒ 김건주
한국에선 의인이지만 일제의 눈에는 빨리 처리해 버리고 싶은 애물단지였다.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외무성과 온갖 방법을 동원해 베델의 추방과 <대한매일신보>의 폐간을 모략했다. 일본은 끈질기게 외교 공세를 펼쳤다. 결국 베델은 재판에 회부됐다. 영국 영사관 고등법원은 그에게 6개월 근신형과 3주간의 금고형을 내렸다. 

이후에는 상하이로 끌려가, 3주간 금고형을 산 후 서울로 돌아왔다. 베델은 두 차례의 재판을 받으며 쌓인 스트레스와 과로로 심신이 약해졌다. 1909년 5월 1일, 서른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그는 심장비대증 등으로 한국에서 생을 마감했다.

한국인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많은 한국인들의 슬픔 속에 그의 시신은 서울에 있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혔다. 아무 연고도 없는 이국 땅에서 그곳 사람들을 위해 목숨까지 거는 행동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누가 이 외국인이 한국의 독립유공자라는 데에 의구심을 품을 수 있을까.

수많은 외국인들의 묘비가 모인 선교사 묘역을 둘러보면 '독립유공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라고 쓰인 팻말이 보인다. 이곳이 바로 어니스트 베델의 묘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한국을 생각했다. 그의 유언은 베델이 한국을 위했던 일들이 얼마나 진심 어린 행동이었는지를 잘 나타낸다.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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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참고자료 : 문화재청, <수난의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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