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순간 마지막처럼" 수원 '푸른 늑대' 양상민의 2020년
'강등' 불명예 싫어 발버둥 쳤던 올 시즌
"수원은 내 전부..열정 남은 한 뛸 것"
“올 시즌은 전체적으로…파란만장했죠.”
수비수 양상민(36)은 K리그 명가 수원 삼성에서 가장 오래 뛰고 있는 선수다. 2008년 수원의 리그 우승을 직접 경험한 마지막 선수이기도 하다. 언제 선수 생활을 그만둬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지만, 올 시즌 양상민은 K리그의 그 어떤 선수보다도 뜨거운 한 해를 보냈다. 양상민을 오랫동안 지켜본 수원 팬들 사이에서는 이번 시즌 그의 활약이 ‘커리어하이’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아시아챔피언스리그(ACL)에서 지난 11일 귀국한 뒤 그는 국민일보와 통화한 17일 현재까지 자택에서 가족과 격리 중이다. 격리는 크리스마스인 25일이 되어서야 끝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구단 숙소 격리도 생각해봤지만 18일 여섯 살 아들의 생일을 앞두고 가족과 함께 있는 게 낫겠다 여겼다. 그는 “아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을 오늘 포장해놓으려 한다”면서 쑥스러워했다.
양상민에게 이번 시즌은 중반까지 암울했다. 강등이 현실로 다가오는 걸 봤기 때문이다. 그는 “‘설마 강등당하겠어’라고 가볍게 말들 하지만 이런 식이면 정말 그런 상황이 올 거라 느꼈다”면서 “수원에서 보낸 시간이 막바지에 이르러 결국 강등으로 이어질 게 너무나 불명예스러웠다. 그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발버둥을 쳤다”고 말했다. 또 “저는 은퇴를 할 수도 있지만 남은 후배들은 다음 시즌을 또 준비해야 할 텐데, 그런 점도 마음이 아팠다”고도 덧붙였다.
시즌 중 머리를 삭발한 것도 그런 ‘발버둥’의 일환이었다. 팀이 위기인 와중 주전에서 한 달 가량 밀리면서 낙심하기도 했지만 아내가 그를 다잡아줬다. 양상민은 “아내가 ‘팀에서 할 일이 있을 거다. 그냥 놓으면 안 된다’면서 저를 계속 붙잡아줬다”면서 “나중에 그때 고마웠다고 따로 인사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삭발 효과는 올해로 끝났을 것 같다. 내년엔 안 할 것”이라면서 웃었다.
안간힘을 썼던 건 그가 선수 인생 거의 전부를 쏟은 수원과 슬프게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였다. 구단에서 지난 10월 재계약 제안을 했을 때도 그는 망설임 없이 도장을 찍었다. 그는 “3~4년 전부터 저는 다른 팀을 알아보지 않았다. 다른 팀 연락이 와도 수원과 일단 얘기해보겠다고 했다”면서 “수원은 지금 제 전부다. 돈의 액수보다 구단이 1년 더 함께하자고 한 일 자체가 감사했다”고 말했다.
우여곡절 끝에 1부 잔류에 성공했지만 수원에게는 ACL 대회가 남아있었다. 이미 2패를 안은 상황이라 16강 진출이 어렵지 않겠느냐는 시선이 더 많았다. 그러나 양상민을 포함한 수원 선수단은 놀랄 만한 경기력으로 대회 8강이라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다. 16강전 요코하마 F. 마리노스와의 경기에서 지치지 않은 승부욕으로 3대2 극적인 역전승을 일궈낸 장면은 대회 하이라이트였다.
양상민에게 이번 ACL은 더 의미가 있었다. 언제 다시 같은 무대를 밟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는 나이라서다. 수원 소속으로 오랜 시간 ACL에 출전했지만 두 차례 4강에 진출한 게 최고 성적이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아, 이게 내게는 마지막일 수 있겠다’ 생각하며 경기에 임했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이번 대회 우승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그는 선수단 최고참으로서 팀 역사에 남을 만한 경기를 치렀다.
그 역시 가장 기억나는 경기로는 16강 요코하마전을 꼽았다. 양상민은 “경기가 시작부터 밀리고 힘들었지만 전반이 끝난 뒤 라커룸은 일단 해보자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그는 “선수들에게도 ‘포기는 하지 말자. 지는 건 상관없고 목표를 우승으로 잡고 온 것도 아니지 않느냐. 포기하지 말자’고 말했다”고 했다. 그의 다독임 덕인지 수원 선수들은 ‘인생 경기’를 펼친 끝에 8강행을 결정지었다.
양상민에게 요코하마전이 더 기억에 남는 건 포기하지 않는, 이른바 ‘수원 정신’을 발휘했다는 이유도 있다. 그는 “한동안 수원이 예전보다 그런 부분이 많이 약했다. 70분 뒤에 힘이 떨어져 당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선수로서, 고참으로서 또 수비로서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그는 “선수들이 후반 들어서도 몸을 던져 뛰는 걸 수비 쪽에서 보고 신이 났다. 더 막고 싶었다”고 회상했다.
지난 9월 양상민은 한 축구전문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떠난 수원 팬이 돌아오게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ACL 대회를 치른 뒤 인스타그램 계정에 “약속을 조금이나마 지킬 수 있어 다행”이라고 적었다. 팬들에게 조금이라도 부끄럽지 않은 경기를 치렀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그는 국민일보에 “저는 2008년 우승 때도 있었고, 수원 팬들의 응원과 관심이 그 어떤 구단보다 높다는 것도 안다”면서 “단순히 재정이 줄고 선수가 약해져서 팬들이 떠난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팀의 경기력이 한몫했고 그건 분명 선수들의 잘못”이라고 말했다. 그는 “열악해지는 환경 속에서도 어떻게 해야 팬들이 응원하고 박수 보내는지를 ACL에서 조금이라도 선수들이 느꼈을 거다. 올해가 가기 전에 조금이라도 그런 게 이뤄져서 다행”이라고 덧붙였다.
양상민에게도 은퇴는 이제 멀리 있는 단어가 아니다. 2~3년 전부터 잔부상이 지나치게 많이 이어지면서 단순한 부상이 아닌, 나이가 들어서 오는 부상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올 시즌 이동국, 정조국을 비롯해 K리그의 상징적인 선수들이 축구화를 벗는 모습을 보고도 많은 생각을 했다.
아직 그는 은퇴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양상민은 “은퇴하는 선수들의 기자회견을 보면 ‘선수로서의 절박함이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나오더라”면서 “확실한 건 아직 저는 그런 게 타오르고 있다는 점”이라고 했다. 그는 “아내가 얘기했던 것처럼 팀에 내가 할 일이 있을 것이다. 그걸 하면 된다”면서 “그렇게 꾸준히 하다 보면 2~3년이 될 수도 있고 내년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 어차피 계획대로는 일이 되지 않더라. 계획은 세우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양상민은 팬들에게 전하고픈 말을 묻자 “맨날 죄송하다고 한 것 같다”고 웃으면서도 “최고참으로서 항상 죄송하다”고 다시 말했다. 그는 “팀이 힘들고 팬들도 힘들었지만 그 와중에도 분명 응원해주셨으리라 믿는다“면서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는 희망들이 뭉쳐 큰 힘을 발휘한다”고 했다. 이어 “작은 응원이라도 보내주시면 결국 저희에게 힘이 된다. 지금의 아픔이 즐거움이 될 수 있도록 계속 발전하고 노력하겠다. 응원해달라”고 당부했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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