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인사이트] 이익보다 애국..마윈 기업공개 막은 시진핑 "장건이 롤모델"

2020. 12. 16.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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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 같은 실업가가 몇 명 더 있었다면 중국 자본주의는
오래전에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다는 상상도 가능하다
자본가 타도를 목표로 만들어졌던 공산당이 그를 소환해
애국심 상징으로 칭송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 아닐까


시진핑·마오쩌둥이 극찬한 청말 기업가 장건

지난 11월 12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장쑤성 난퉁 박물원을 방문해 청말의 실업가였던 장건의 유물을 살펴보고 있다. 시 주석은 이날 “장건은 중국 민영기업가의 선현(先賢)이자 모범”이라고 치켜세웠다. [신화=연합뉴스]

“애국은 근대 이래 중국 우수 기업가의 빛나는 전통이다.”

지난 7월 시진핑(習近平·67) 중국 국가주석이 역사 속 중국 기업가 한 명을 애국의 롤모델로 호명했다. 지난달 12일에는 그의 고향을 찾았다. “그는 중국 민영기업가의 선현(先賢)이자 모범”이라며 “애국주의 교육기지로 만들라”고 지시했다. 당국이 기업가 마윈(馬雲)의 기업 공개를 중단시킨 지 9일째 되는 날이었다.

중국의 역사에서 유명한 장건은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서역으로 파견되어 ‘실크로드’를 개척한 것으로 알려진 장건(張騫)이다.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이 사람은 모르는 경우는 거의 없을 듯싶다. 또 한 사람은 19세기 말 과거 장원 출신으로, 보기 드물게 근대적 실업가로 변신에 성공한 장건(張謇, 1853~1926)이다.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는 개혁파 정치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청말 정국을 떠들썩하게 한 입헌 운동을 주도한 재야 대표이다. 1912년 2월 12일 신해혁명으로 청 황제가 퇴위 조서를 발표했을 때, 초안을 쓴 사람도 장건이었다. 그는 이후 신해혁명으로 세워진 난징(南京) 임시정부의 실업부 장관, 이후 원세개(袁世凱)의 베이징 정부에서 농상부 장관을 지냈다.

올해 시진핑 주석이 장건을 국가와 사회에 책임감이 강한 애국적 기업가로 치켜 올려 시선을 끌었다. 과연 그는 이런 평가에 어울릴만한 인물인가? 우선 그에 대한 답을 먼저 내놓는다면 “사실 정말 그렇다”는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시 주석이 그를 치켜세우게 된 이유와 상관없이 이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해도 좋기 때문이다.

관료에서 기업가 변신 … 경제 실험구 건설

청말의 실업가 장건(1853~1926·아래 사진)이 난퉁에 세운 섬유공장 대생 사창의 모습. [바이두 캡처]

장건은 1853년 장쑤(江蘇)성의 강북에 속하는 난퉁(南通)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16세에 과거시험 첫 단계를 통과해 생원이 됐다. 1885년에는 우수한 성적으로 다음의 거인 학위를 얻었으나, 최종 목표인 진사 학위는 41세인 1894년에야 간신히 얻었다. 청대 진사 합격 평균 연령이 35세였던 점을 고려하면 꽤 늦었던 셈이다. 따라서 관료로서 출세를 크게 기대하기 힘들었던 그에게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왔다. 그를 포함한 몇몇 진사에게 고향에서 신식 기업을 창설하라는 지시가 떨어진 것이다. 이는 1894~95년의 청일전쟁에서 패한 다음 왕조의 위기가 도래하자 유력한 지방관 양강 총독 장지동(張之洞)이 실업 진흥을 위한 자강책을 황제에게 제안해서였다. 장건이 이런 지침에 흔쾌히 호응한 것은 그를 ‘실업 구국’을 목표로 삼는 실업가로 변신시키는 출발점이 됐다.

청말의 실업가 장건(1853~1926).

1896년 봄 장건은 실을 만드는 공장인 대생사창(大生絲廠)을 양강 총독의 도움을 받아 건립했다. 점차 대생 기업(자본) 집단의 규모를 크게 늘려나갔다. 황무지 개간·간척 공사나 기름 공장, 밀가루 공장, 유리 공장, 야철 공장 등 1911년 청 왕조가 망하기 직전까지 그는 난퉁 지역에 면방직업과 그것을 보조하는 기업을 34개나 설립했다. 조선업 창건, 항구 건설, 발전소와 전화 회사 건립을 통해 고향을 아예 대규모 상공업 단지로 바꿔 나갔다. 빈민을 위한 공장을 짓고, 최초의 민영 기상대를 세우거나 통속 극장을 짓는 일도 비슷했다. 장건의 고향 난퉁은 그야말로 대생 기업 집단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경제발전의 ‘실험구역’이자 근대적 공업 도시로 변해갔다.

신식교육·사회사업 통한 실업 구국 앞장

장건의 실업 사상은 경공업과 중공업을 동시에 중시하는 면철주의(棉鐵主義)였다지만, 그는 실업 구국의 기반인 교육에도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1902년에는 근대적 신식교육을 위해서 교사 양성이 필요하므로 사범학교를 세우자고 건의했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스스로 고향에 사범학교를 세웠다. 이는 중국 최초의 사범학교가 됐다. 이것은 그의 교육 방면에 기여에서 첫 출발점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그는 상해 푸단(復旦)대학의 전신인 푸단공학의 설립에 간여한 것 외에도 수많은 대학이나 농업학교와 여자사범학교, 실업학교, 맹아학교, 중·소학교 설립에 기여했다. 그는 난퉁과 장쑤성을 아예 근대적 학교 교육과 사범교육의 시범지역으로 바꿔 놓았다. 그가 장쑤교육총회를 창건하고 그 회장으로 일한 것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지만, 신문사나 인쇄소와 도서 공사를 건립하고 중국 최초의 박물관인 난퉁 박물원을 설립하거나 최초의 유치원을 창건한 것도 마찬가지의 경우였다.

그의 실업과 교육 방면의 업적을 간단하게만 훑어봐도 실업가 장건의 특징은 뚜렷하다. 첫째, 그는 대생사창의 건립을 통해 사대부 출신의 관리에서 실업가·자본가로 전향하였지만, 결코 영리만을 목적으로 하는 ‘상인’ 수준에 머무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사대부 출신답게 사회적 책임과 지역 사회 기여에 큰 관심을 일관성 있게 보였다. 둘째, 그는 자신의 고향을 실업과 교육 및 사회사업의 발전과 근대화라는 큰 목표를 위한 실험실로 삼았다. 이곳을 아예 가장 모범적인 ‘경제건설’과 근대화의 모델로 만들었다. 그의 일생을 연구해보면, 만일 장건과 같은 실업가가 몇 사람만 더 있었다면, 중국의 자본주의는 오래전에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도 가능하다.

마오쩌둥 “민족 경공업, 장건 잊어선 안 돼”

불행하게도 장건의 말년인 1920년대에 들어오면서 대생 기업 집단은 변화하는 경제 환경과 외국 자본(특히 일본)과 경쟁을 이겨내지 못하고 점차 몰락했다. 정부의 도움도 받지 못했다. 1926년 그가 사망한 다음 그가 일군 일생의 사업은 모두 무너졌다. ‘사대부’ 정신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실업가의 한계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중국의 유명한 학자이자 자유주의자인 호적(胡適)은 장건을 위대한 ‘실패한 영웅’이라 불렀다. 30년 동안 다양한 방면에서 ‘개척자’로서의 역할을 통해 수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고, 고향에 엄청난 공헌을 했고, 전국적으로 그 영향력을 펼쳐나갔지만, 그 꿈은 끝내 미완성인 채로 남아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마오쩌둥 주석도 중국 최초의 민족 경공업을 생각하면 난퉁의 장건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에서는 중국 공산당이나 그 지도자들이 필요에 따라 장건을 소환하는 일은 누차 있었다. 다만 달라진 점은 이전보다 좀 더 애국심을 강조하는 데 있다.

그렇지만 살아생전 중국 공산당의 성장 과정을 목격했던 장건은 결코 공산당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더구나 본래 자본가 타도를 목표로 삼아 만들어졌던 공산당이 도리어 그를 다시 소환해 애국심의 상징으로 칭송하고 내세우는 것은 다채로운 역사의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 임오군란 때 참모로 조선 방문…조선 정책 내고 한국인 후원도

「 장건은 1882년 임오군란 때 청이 파견한 오장경(吳長慶, 1834~1884)이 가장 신임한 막료로서 부대를 따라 조선을 방문한 적이 있다. 조선과의 인연도 적지 않아 조선의 사대부와 교류를 한 여러 흔적을 남겼다. 당시 오장경 부대를 영접한 김창희(金昌熙)가 남긴 『동묘영접록(東廟迎接錄)』은 장건이나 그와 같이 조선을 방문한 원세개와의 대담과 교류 상황을 잘 보여주는 희귀한 사료다. 장건이 이 무렵 쓴 『조선선후육책(朝鮮善後六策)』은 최근에 와서 그 원문이 제대로 확인될 수 있어 종전 학계의 이해에 대한 수정이 불가피해졌지만, 장건의 조선에 대한 정책적 사고의 일환을 보여주는 것으로 학계에 알려지기도 했다.

또 이 무렵 장건과 안면을 튼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이 을사늑약 이후 난퉁으로 망명해 장건의 도움을 받으면서 시문학 창작과 한문학·역사 서술에 힘을 기울인 것도 한·중 문화 교류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일화 중 하나이다.

■ ◆김형종

「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청말신정기의 연구』 『1880년대 조선-청 공동감계와 국경회담의 연구』 등 20여권의 저·역서와 40여편의 논문이 있다.

김형종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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