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 관피아 전성시대-어차피 '관피아'..금융협 6곳 중 5곳 차지

박수호 2020. 12. 14.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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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공’. 한때 관가에서 유행한 말이다. ‘어쩌다 공무원’의 준말이다. 정권이 바뀔 때면 외부 인사가 공무원으로 신분이 전환되는 사례가 많아서다. 요즘 금융권에서는 ‘어관’이라는 신조어가 각광받는다. ‘어차피 관료’라는 뜻이다. 주요 금융기관장, 협회장마다 줄줄이 관료 출신이 선임되면서 나온 말이다. 이들을 ‘관피아’ ‘모피아’ 혹은 ‘정피아’라는 이름으로 묶어 부르기도 한다. ‘+피아’는 범죄 집단 마피아에서 연유한 만큼 아무래도 부정적인 시각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왜 관료 출신 뜨나

▷정부 입김 세지자 대화 창구 각광

논란의 시작은 손해보험협회장 자리였다.

정지원 현 손보협회장이 한국거래소 이사장 재직 중에 손보협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 회장은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으로 금융감독위원회 은행감독과장, 감독정책과장, 금융위 금융서비스국장, 상임위원을 지낸 후 한국증권금융 사장을 거쳐 한국거래소 이사장에 재직 중이었다. 금융 전문성 면에서는 인정받는 인사이기는 하지만 주요 보직 중 보험 관련 업무는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점에서 다소 의아하다는 뒷말이 무성했다. ‘부금회가 움직였다’ ‘관피아가 움직였다’ 등 여타 소문도 팽배했다.

정 회장이 자리를 옮기면서 공석이 된 한국거래소 이사장 자리는 또 다른 ‘관피아’ 손병두 전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채웠다. 손 전 부위원장은 1964년생으로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행정고시 33회로 기획재정부 국제기구과장, 외화자금과장, 금융위원회 공적자금관리위원회 사무국장, 금융정책국장 등을 거쳤다.

여기에 은행연합회장이 화룡점정을 찍었다.

이례적으로 사실상 결선 투표까지 간 끝에 현역 김광수 농협금융지주 회장이 단독 후보로 추대됐다. 김 회장은 재정경제원 금융정책과 사무관, 금융위원회 금융서비스국장, 2018년 4월부터는 농협금융지주 회장에 선임, 연임에 성공하며 임기 수행 중이었다. 김 회장 역시 임기 중 은행연합회장으로 옮겨가게 된 데다 공교롭게도 정지원 협회장과 같은 ‘행정고시 27회’라는 점에서 더 주목받았다.

참고로 행시 27회는 금융당국 수장인 은성수 금융위원장, 윤종원 IBK기업은행장 등이 동기인 데다, ‘함현정(含賢井·현명함을 담은 우물)’이라는 명칭의 동기 모임도 계속 이어오고 있어 눈길을 끈다.

지난해 선출된 김주현 여신금융협회장, 박재식 저축은행중앙회장이 각각 행정고시 25회, 26회 출신이다. 현재 6개 주요 금융협회장 중 순수 민간 출신은 대신증권 대표였던 나재철 금융투자협회장밖에 없는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 입김이 거세지며 대화 창구 역할이 가능한 전직 관료가 각광받자 이들끼리 자리 나누기라도 한 듯한 모양새가 되면서 논란이 극대화됐다”고 총평했다.

▶금융사 대표도 관피아 부상

▷농협금융·주택금융공사 수장도 거론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는 최근 일이 부쩍 바빠졌다. 관료 출신들의 취업 심사 때문이다. 윤리위는 퇴직공직자가 취업 심사를 요청하면 퇴직 전 5년 동안 소속했던 부서 또는 기관 업무와 취업 예정 기관 간 밀접한 업무 관련성이 있는지를 따진다. 최근 취업 심사를 신청한 관료 출신은 66명에 달했다. 이 중 2명은 ‘취업 제한’을 결정했고 나머지는 ‘취업 가능’ 결정을 내렸다.

SGI서울보증보험 대표로 선임된 유광열 전 금감원 수석부원장도 이 과정을 거쳤다. 유 전 금감원 수석부원장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행정고시 29회로 공직에 입문했다. 기획재정부 국제금융협력국장, 금융위 금융정보분석원장 등을 거쳐 증권선물위원회 상임위원, 금감원 수석부원장 등을 맡았다.

공석이 된 농협금융지주 회장, 주택금융공사 사장 자리에도 최종 후보 검증이 한창인 가운데 관료 출신이 유력하다는 설이 돈다. 두 자리 모두 역대 수장이 대부분 관료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변이 없을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관피아 전성시대 뭐가 문제?

▷대정부 로비, 방패막이 변질 우려

“ ‘나라다운 나라’ ‘공정과 정의’를 외치는 문재인정부는 낙하산의 횡포를 적극적으로 막아야 할 것이며, 이제는 금융협회장이 대정부 로비 활동이나 방패막이 역할이 아닌 금융산업 발전에 기여할 만한 비전과 전문성을 갖추고 소비자 중심의 마인드로 무장한 사람이 회장에 선임돼야 할 것.”

금융소비자연맹의 공식 성명이다.

물론 ‘관료 출신이 요직을 차지할 수 없다’는 법은 없다. 또 능력 있는 인사도 적잖다. 다만 지나치게 금융권 인사에서 관피아 쏠림 현상이 심화되면 문제가 될 수 있다.

금융소비자연맹 우려대로 전관을 앞세워 금융권이 구시대적인 로비 창구로 활용할 수 있다는 지적이 대표적이다.

더불어 각 기관, 회사도 수장 교체에 따른 혼란이 가중될 수 있다. 임기 중 수장이 바뀐 한국거래소와 농협금융지주는 직무대행 체제로 전환하고 후임자추천위원회를 꾸리는 통에 장기 비전이나 연초 계획 실행 유무를 따지는 일은 언감생심이 돼버렸다.

오정근 건국대 금융IT학부 특임교수는 “멀쩡하게 임기가 남아 있는 인사가 새로운 자리가 있다 하자 좀 더 오래 임기를 보장받으려 이동하는 상황을 보는 임직원은 얼마나 착잡하겠는가”라면서 “엄연히 금융기관, 금융사마다 수장 선임 시스템이 있고 여기에 따라 최적의 인사를 모실 수 있도록 틀은 다 갖춰놨지만 관료 출신끼리 ‘회전문 인사’ ‘짬짬이 인사’라는 식으로 요직을 나눠 갖는 모습처럼 보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지적했다.

애초 문재인정부 주요 인사가 주창했던 관피아, 낙하산 인사 근절 철학과도 배치되는 상황이다.

문재인정부는 초기 금융권 개혁 일환으로 인사의 투명성, 공정성 확보를 위해 금융행정혁신위원회를 가동한 바 있다. 이때 제언으로 금융공공기관장 선임절차가 개선돼야 한다는 내용이 강조됐다. 그러면서 당시 낙하산 인사와 ‘정권 실세 간 알력설’로 한국거래소 이사장 선임이 당시 혁신위는 “기관장 선임 과정의 투명성과 정당성이 확보되는 합리적 절차를 강조하면서 거래소의 경우 이사장 후보추천위원회의 과반수를 중립적 외부 인사로 구성하라”고 구체적으로 요구했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 역시 한성대 교수 시절 2012년 발간한 본인 저서 ‘종횡무진 한국경제’에서 ‘재벌과 모피아의 함정에서 탈출하라’는 부제를 달 정도로 모피아 중심의 인사 폐해를 지적하고 경계론을 펼친 바 있다.

오정근 교수는 “꼭 민간 출신이 협회장을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절차의 투명성, 금융산업 장기 비전에 적합한 인사 선임으로 이어진다면 뒷말이 없겠지만 현재 선임 과정이나 결과치만 놓고 보면 관치 편의성을 극대화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박수호 기자 suhoz@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88호 (2020.12.16~12.2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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