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순간에 집안 쑥대밭.. 제주에선 흔한 일이었다
[변상철 기자]
▲ 농장에 있는 감귤상자를 탁본하고 있는 오경대 씨. 그의 꿈은 농사를 통해 성공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
ⓒ 한톨 |
제주 중문에서 감귤, 한라봉 농사를 짓고 사는 오경대씨는 북한에 납치되었다가 돌아와 간첩으로 조작된 피해자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농사를 지으며 살던 1960년대 어느 야심한 밤, 한국전쟁 당시 행방불명되었던 이복형이 갑자기 집으로 들이닥쳤다. 오씨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형이었지만 어머니가 그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한국전쟁 후에 행방불명되었던 그가 갑자기 나타나 잠시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이복형이 일본에 산다며 내미는 거류민단증과 외국인등록증을 보고서는 더 의심할 수 없었다.
일본인줄 알았는데 북한
이복형은 자신이 일본에서 무역업을 하는데 목포를 오가는 중에 잠시 들렀다고 했다. 이복형은 오경대에게 일본으로 건너가 함께 무역업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당시 제주는 가난을 극복해보고자 일본으로 건너가 돈벌이를 하기 위해 한집 건너 한집이 밀항을 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더욱 이복형이 던진 제안은 솔깃했다. 그렇게 이복형을 따라 나섰던 오경대가 도착한 곳은 북한이었다. 이복형의 거짓말로 인해 북한으로 납치된 것이었다. 북한에 납치된 오경대는 그곳에서 제주로 돌아오기 위해 온갖 핑계를 댄 끝에 4일 만에 돌아올 수 있었다.
▲ 오경대 씨가 납치되었다가 돌아온 논짓물 해변에 서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 한톨 |
집으로 돌아온 오경대는 어머니에게 곧바로 수사기관에 신고하자고 하였으나 복병이 있었다. 당시 제주에 살고 있는 이복형의 친모가 반대했던 것이다. 오경대가 신고하면 북한에 있는 아들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며 반대하는 큰 어머니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던 오경대는 결국 불고지죄를 비롯해 간첩죄까지 씌워져 수사기관에 잡혀가고 말았다. 담당 수사관에게 자신은 이복형에게 속아 북한에 납치된 것이며, 부모님 말을 거역하지 못해 신고하지 못했다고 하소연했지만 오경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 이미 공안기관의 결론이 나 있는 상태였다.
오경대의 구술 = "큰 어머니하고 자수하자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나 참아달라는 거예요. 아들 한 번 만날 수 있게만 해 달라 그러시는 거예요. 지금 시절이야 그렇지 않지만 옛날에는 집안 어른 말이라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 거예요. 그러니 거절을 어떻게 해요. 결국 그때 신고를 하지 못했죠. 그리고 나서 집으로 돌아와 농사짓고 살았어요. 그러다가 67년 3월 26일 새벽인가 붙잡혔어요. 나는 땅 만평 농사짓고 사는 게 꿈이었어요. 그 때 땅 값이 5천 평에 백 원, 팔 십 원 했을 때인데 땅을 사가지고 개간하려고 했어요. 그런 준비를 하다가 잡힌 거죠.
원래 그 전날 경찰이 찾아와서 요즘 뭐하고 지내느냐며 이것저것 묻길래 낌새가 좀 이상했죠. 그래도 뭐 그런가보다 하며 대수롭지 않게 지냈거든. 그런데 다음 날 새벽에 중앙정보부에서 딱 온 거라. 그날 잡혀가지고 제주시 칠성통에 갔었는데 지금은 자리가 기억나지 않는데 무슨 무역상사인가 간판이 된 건물로 들어갔어요.
▲ 그가 서울로 연행될 때 이용했던 알뜨르 비행장.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관들과 이곳에서 군용비행기를 타고 오산비행장으로 이동해 남산으로 연행되었다고 한다. |
ⓒ 한톨 |
전향 강요
법정에서 차라리 죽여 달라는 외침이 나올 정도로 고문은 심각했고, 무자비했다. 이 사건으로 형님들과 누이들이 모두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실형을 선고 받았다. 그야말로 한 순간에 집안이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분단으로 헤어졌던 핏줄을 만난 대가는 혹독했다. 속아서 이북에 다녀왔지만 신고하지 않은 것 외에는 죄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 그 순진한 농부는, 정권과 수사기관의 수사를 피할 길이 없었다.
오경대의 구술 = "(이복 형) 생모가 제주시에 살았어. (북에서) 돌아와서 생각을 하니까 큰 어머니에게 (이복형 생사)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어요. 한국전쟁 전에 공부 잘한다고 서울까지 유학을 보냈던 자식이 전쟁으로 행방불명이 되어가지고 그래서 살았는가 죽었는가 오매불망 부모 마음이 그렇지 않습니까?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어요.
내가 이북에 끌려 가 있을 때 이북 사람이 하는 말이 '만약에 제주도로 돌아가서 신고하면 온 가족을 몰살시킬 테니까 그렇게 알라.' 그렇게도 말했다고요. 꼭 그것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내 생각에는 단순히 생각해서 '내가 신고를 안 해도 이북 가서 한 일이 없으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죠.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은 생각이죠. 그래서 큰 어머니한테 얘기 안 할 수가 없었고, 그 이야기를 들은 큰 어머니는 신고하라고 하겠습니까? 자식이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어머님이 '나를 죽이고 신고하라'는 거예요."
▲ 오경대 씨가 광주교도소 복역 시절 찍었던 유일한 사진. |
ⓒ 변상철 |
오경대의 구술 = "국가보안법이다 뭐다 해서 간첩은 양산되는 것 같아. 교도소 생활하면서 전향서를 쓰라는 거예요. 아 내가 공산주의자가 아닌데 어떻게 전향서를 쓰라는 건지 앞뒤가 안 맞잖아요. 내 사상을 쓰라는 거예요. 공산주의 사상에서 자유민주주의로 바꾼다고 쓰라는 거지. 난 한 번도 공산주의 사상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 무슨 수로 그런 말을 써요. 그래가지고 한참 동안 있었어. 전향 못 한다고 한동안 버텨봤지만 전향 안 하면 운동도 안 시키고 재소자 시켜서 계속 괴롭히고, 면회도 안 되고 여러 가지 고통을 줍니다. 결국 그래서 나중에 할 수 없이 억지로 전향했는데 그런 식으로 자꾸 빨갱이 아닌 사람을 빨갱이로 만든다니까.
지금 생각해도 나는 공산주의자도 사상주의자도 아닌데 왜 전향을 하라는 거냐, 그게 제일 의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몇 개월 동안 독방에 나 혼자 가둬놓고 내 사상이 공산주의사상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거야. 그런데 나는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간첩 활동한 적도 없고, 나는 대한민국 국민인데 결국 그렇게 괴롭히니 안 쓸 방법이 없지. 전향서를 쓰지 않으면 나오지 못하니까 독방에서 나오지를 못하니까."
그렇게 대한민국의 국민임을 선언하고 인정받으려는 '전향서'를 작성하지만 결국 그들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인정받지 못했다. 수감 중이나 출소 후에도 그들은 늘 감시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 굴레는 자신만이 아닌 가족과 공동체로 이어졌다. 그래서일까? 53년 만에 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은 그는 무죄 선고 후 이렇게 이야기 했다.
▲ 재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은 오경대 씨.(2020년 11월 20일) |
ⓒ 변상철 |
연좌제, 보안관찰 등으로 늘 감시받고 조사받으며, 창살 없는 감옥에 살아야 했던 피해자들. 그들은 숨 쉬며 살고 있지만 사는 것이 아닌, 그러한 삶을 살아야 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전두환이 건넨 2억원 거부... 제대로 당했다
- 신규 확진 950명 폭증... 국내 유행 후 '최다'
- "첫 앨범 발표 후 동생 유재하가 했던 말, 아직도 맴돌아"
- 91세 어머니와 트로트를 듣는 아침... 참 별일이네요
- 산재 유족에 "때밀이들"이라 한 정찬민 의원 "유족인줄 몰랐다"
- "제발, 그만..." 김용균 어머니·이한빛 아버지, 무기한 단식농성 돌입
- 방역수칙 안 지킨 대구 교회, 확진자 35명까지 늘어
- 미국, 곧 백신접종? 트럼프 "빨리하라" FDA "서두를것"
- '성범죄 발언 논란' 김웅 "민주당 같은 무리에 빌미 줘 화나"
- 라트비아서 숨진 김기덕 감독에 애도와 냉소 교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