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에 127만원, 하루 18번 바늘꽂는 20대.."여긴 자본주의 끝"

최연수 2020. 12. 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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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 <제57화>
꿈과 생계 위해 '피 뽑는' 20대

"아침이 되면 약을 먹고 온종일 피를 뽑아가요. 18번 정도 채혈을 한 뒤에 팔을 보면 주사 때문에 멍이 들어있거든요. 멍 자국 보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죠."

지난 6월 생동성 시험 아르바이트 중 채혈을 하고 있는 모습. 취업준비생 김모(28)씨 제공


8일에 127만원. 위성경(27)씨가 지난 10월 '생동성 시험' 아르바이트로 번 금액입니다. 생동성 시험은 이미 출시된 약의 특허 기간이 만료돼 같은 성분의 복제약을 내놓을 때 진행하는 임상시험입니다. 제약회사가 새 약을 출시하기 전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하죠. 아르바이트 구인·구직 사이트에선 ‘고수익ㆍ편한 알바’라는 설명과 함께 임상시험 아르바이트 지원자를 받기도 합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취업난이 닥쳐오면서 아르바이트 구하기도 치열해졌습니다. 청년들은 꿈을 위해, 눈앞에 놓인 생계를 위해 ‘고수익’ 생동성 시험 아르바이트에 몰렸다는데요. 이들의 이야기를 밀실팀이 들어봤습니다.

#'임상시험 알바'의 진실, 영상을 통해 만나보세요


‘단기 알바’ 10번 탈락 후 임상시험 참가

서울의 한 고시원에서 9개월째 고시원에서 생활중인 위성경씨의 모습. 부모님의 도움없이 광주에서 올라와 홀로서기 중이다. 최연수기자

위성경씨는 서울에서 홀로서기를 시작한 지 9개월째입니다. 부모님 도움 없이 광주에서 올라와 고시원 생활 중인데요. 외국 항공사 승무원을 지망하던 위씨는 지난 2월 코로나19로 항공사 사정이 안 좋아지자 면접을 포기했습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급하게 단기 아르바이트를 찾아봤지만, 연락 오는 곳은 없었습니다. 그는 "10곳 넘게 단기 알바를 지원했다"며 "생동성 알바를 하면 100만원가량 받는다. 그 정도면 한두 달 버틸 수 있으니까 생활비를 위해 (임상시험에) 참여하게 됐다"고 설명했죠.


코로나로 횟수 줄었어도 2030 지원 ↑

생동성 시험 과정중 혈압을 재는 모습. 독자 제공

생동성 시험이 진행되는 병원의 풍경은 이렇습니다. 위씨에 따르면 병동 양쪽에 일렬로 세워진 침상에서 60명가량의 지원자들이 본인의 채혈 순서를 기다리고요. 정해진 시간에 맞춰 점심과 저녁 식사가 나옵니다. 시간대별 채혈이 끝나면 저녁 시간엔 자유롭게 스마트폰을 보거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냅니다.

채혈이 끝난 뒤 각자 개인시간을 갖는 모습. 취업 준비생. 독자 제공

임상시험 중인 병원엔 20ㆍ30대 성인 남자가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임상시험센터 관계자는 “생동성 시험은 신체 건강한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올해는 코로나로 시험 횟수가 줄었지만, 지원하는 20~30대는 많아졌다”고 설명했죠.

사전 신체검사에 합격해야 생동성 시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신체검사를 통해 흡연·음주량이 기준치를 넘는지, 2주 안에 헌혈한 적 있는지 등을 확인합니다. 위씨는 위궤양 치료제 시험으로 8일 중 이틀을 병원에서 지내고 18번에 달하는 채혈을 했습니다.


"자본주의의 밑바닥 근처가 바로 이곳"

생동성 임상 시험에서 채혈이 있기 전 순서를 기다리는 모습. 이모(27)씨 제공

취준생만 임상시험에 나서는 건 아닙니다. 원래 다니던 직장이 코로나로 문을 닫아 생동성 시험 아르바이트에 뛰어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스포츠 복지센터에서 일하는 이모(27)씨는 코로나19로 센터 문이 닫혔다고 하는데요. 그는 "고용지원금으로 최소한의 생계를 이어가고 있지만, 집 사기 위한 중도금이 급하게 필요해 몸을 갈아 넣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수십 명의 사람이 병동에서 별 대화 없이 채혈하는 모습. 이씨는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자본주의의 밑바닥에 와있는 기분"이라며 “'처참한 마음에 노동하러 온 거다' '몸 팔러 왔으니까 당연한 거다' 식의 자기 세뇌로 시험을 버텼다”고 털어놨죠.

생동성 시험 아르바이트. 구인구직 홈페이지 캡쳐

김모(28)씨도 코로나19 여파로 잘 다니던 언론 홍보계열 회사가 문을 닫았습니다. 김씨는 두 차례 생동성 시험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직업훈련을 받으면서 생활비까지 벌기엔 '고수익 단기 알바'인 생동성 시험이 적합하다는 판단에서였죠.

김씨는 "친구들에게 같이 하자고 하니 '위험한데 미쳤냐'는 얘길 듣기도 했다”고 말했는데요. 하지만 "내 몸으로 시험했다 생각하면 큰돈은 아니지만, 그래도 시간이 된다면 또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전했죠. 이틀 입원해서 받은 돈은 60만원가량이었습니다. 김씨는 현재 주중엔 직업훈련, 주말엔 물류센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꿈이 있어 궂은일도 마다치 않는다

지난 1일 중앙일보에서 위성경씨와 인터뷰하는 모습. 백경민

"'노가다'라도 해보겠다고 하고 택배 상·하차, 배달 일처럼 궂은일은 다 하고 있거든요. 그래도 불쌍하게 안 봐주셨으면 해요. 지금은 하고 싶은 게 많아요. 대학원 가서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보고도 싶고, 지금 하는 유튜브도 잘 운영했으면 하고요." (위성경씨)
밀실팀이 만난 청년들은 입을 모아 "모두가 힘든 상황이니 참고 이겨내자"고 했습니다.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에게 건넨 위로죠. 자신의 몸을 돈벌이에 기꺼이 내놓는 등 현실이 녹록지 않아도 미래만큼은 녹슬지 않습니다.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위씨는 눈을 반짝이며 설명하기도 했죠.

‘취업난’ ‘고용불안’ ‘버림받은 청년세대’. 뉴스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말입니다. 코로나19로 얼어붙은 고용시장, 청년들은 그래도 꿈과 희망을 품고 버티고 있습니다.

최연수ㆍ박건ㆍ윤상언 기자 choi.yeonsu1@joongang.co.kr
영상=백경민, 이진영·이시은 인턴

「 밀실은 '중앙일보 밀레니얼 실험실'의 줄임말로 중앙일보의 20대 기자들이 밀도있는 밀착취재를 하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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