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 딸 결혼인데 국민 눈치보는 日왕세제..일왕제 딜레마
나루히토(德仁) 일왕의 친동생인 후미히토(文仁·55) 왕세제가 딸 마코(眞子·29) 공주의 결혼을 허락하자 현지 언론들이 이를 대서특필했습니다. 지난 11월 30일 55번째 생일을 맞아 연 기자회견에서 나온 발언이었습니다.
눈에 띄는 대목은 '흔쾌한 승낙'이 아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후미히토 왕세제는 “결코 많은 사람이 납득하고 기뻐해 주는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서 “결혼할 단계가 되면 경위를 포함해 제대로 얘기하는 게 중요하다”고 단서를 달았습니다.
일본 왕위계승 서열 1위인 후미히토 왕세제도 딸 결혼을 놓고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2017년 9월 마코 공주가 처음 결혼을 발표했을 때 일본 언론은 약혼자 고무로 게이(小室圭·29)의 집안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었습니다.
남편과 사별한 어머니 고무로 가요(佳代)가 교제하던 남성으로부터 빌린 돈을 갚으라는 독촉을 받고 있고, 왕실에 경제적 지원을 요구했다는 보도가 잇따라 나왔습니다. 또 가요가 신흥 종교를 믿고 있고, 고무로의 아버지가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한 배경에 가요가 있다는 의혹도 터져 나왔습니다.
대학 입학 동기로 만나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을 약속한 마코 공주 커플을 향한 여론의 환호성이 반대 목소리로 뒤바뀐 계기입니다. 결국 마코 공주는 2018년 11월로 예정했던 결혼식을 2020년으로 일단 미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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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착오적 왕실 논란? 일본서도 “고민할 시기가 왔다”
왕이 없는 한국 정서에선 이런 일로 여론이 들썩이는 게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공주라고 해도 왕족에 앞서 한 명의 개인일 뿐인데 결혼을 놓고 국민적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게 시대착오적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일본 내에서도 비슷한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나라의 상징 역할과 개인의 자기 결정권 사이의 괴리 문제를 이제는 고민해야 한다는 겁니다.
마코 공주의 결혼 논란으로 드러난 일왕제의 딜레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왜 하필 이 시점에 이런 문제가 불거졌는지를 따져봐야 합니다. 그간은 왕실도, 국민도 일왕가의 대소사를 국가적 행사로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왕실 가족도 국민 정서를 고려해 큰 하자가 없는 배우자를 선택했고, 국민도 이를 기꺼이 받아들여 왔습니다.
일왕제를 연구하는 가와니시 히데야(河西秀哉) 나고야(名古屋)대 대학원 교수(역사학)는 아사히신문에 “(아키히토 일왕 재임 연호인) 헤이세이(平成·1989년 1월 8일~2019년 4월 30일) 때까진 시대에 부응해 일왕은 국민의 폭넓은 이해를 얻었다”며 “하지만 이번엔 국민과 어긋남이 생겨났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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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추구했던 왕세제의 딜레마
하지만 이번엔 달랐습니다. 후미히토 왕세제부터가 자유분방한 인물입니다. 아키히토 전 일왕의 차남인 그는 키코(紀子) 비와 연애결혼을 했고 자녀들의 진학 문제에서도 왕실의 전통에 구애받지 않는 등 개인의 자유에 가치를 두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처럼 속 편한 인물로 보이던 후미히토 왕세제였지만 형이 일왕에 오르고 왕위계승 1순위 지위를 얻자 바뀌어야만 했습니다. 왕실이라는 가문 전체를 위해 권위나 체면, 그리고 보수층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부닥쳤습니다.
가와니시 교수는 “그러면서도 자녀의 자연스러운 연애 감정과 결혼을 끝까지 반대하는 건 스스로의 삶을 부정하는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라며 “후미히토 왕세제의 발언에 그런 고통이 느껴진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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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 천황제 다시 생각해 볼 때”
이번 논란을 통해 상징 천황제(일왕제)의 미래를 논의해봐야 한다는 얘기가 일본 내에서 나오는 건 그래서입니다. 어차피 실권도 없는 왕족에 '국민 통합'의 상징이라며 개인의 자유 의지를 꺾도록 강요하는 게 타당하냐는 문제 제기입니다.
실제 일본 헌법 1장은 일왕을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라고 하면서도 허용되는 행위는 '국사 행위'로 엄격히 한정하고, 그 국사 행위를 할 때도 '내각의 조언과 승인'이 필요하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행보를 어느 정도 용인하는 다른 나라의 입헌군주제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와타나베 오사무 히토츠바시(一橋)대 명예교수는 “그래서 나루히토 일왕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국면에서 영상 메시지 하나 내는 것도 자제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일왕이 ‘힘내자’라고 하면 현 정부의 대처 미흡을 뜻한다는 등 정치적 해석이 나올 수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가와니시 교수는 아사히신문에 “살아있는 인간을 상징으로 삼는 한 비슷한 고통이 또 나타날 것”이라며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일왕제라는 제도의 균형을 어떻게 잡을지를 시대에 맞는 형태로 생각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가타야마 모리히데(片山杜秀) 게이오(慶應)대 교수도“감정적인 자세를 지양하고 이 시대에 일왕이 필요한 것인지, 일왕이 필요하다면 어떤 모델을 구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더 많은 민주주의적 사고와 논의가 가능한 정치 공간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이근평 기자 lee.keunp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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