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범의 문화탐색] 민화와 팝 아트 사이 또는 차이

2020. 12. 3.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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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이 없기에
외설적이지 않은 민화
소비사회 찬양한 팝 아트
둘의 차이 드러낸 김홍식
최범 디자인 평론가

‘\’. ‘원’화(貨)를 표시하는 기호가 한가운데 커다랗게 박혀 있다. 홍대 앞 서드 뮤지엄에서 열린 김홍식 개인전 ‘Faith’(10월 10일~11월 8일)에 전시된 ‘Won’이라는 제목의 작품이다. 앤디 워홀의 ‘달러 사인($)’ 시리즈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한가운데의 황금색 ‘\’ 기호, 그를 둘러싸고 있는 붉은 바탕의 사각형, 그리고 파랑과 보라색 배경의 세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 ‘\’ 기호에는 용(龍)·무궁화·자동차 등의 문양이 채워져 있고, 붉은 사각형에는 꽃병과 함께 에로틱한 남녀가, 다시 그를 둘러싸고 있는 외곽은 단청과 식물 넝쿨이 아로새겨져 있다. 전체적으로 동·서양의 이미지가 뒤엉켜 있는 이 그림은 뭔가 뒤죽박죽 하면서도 묘한 일체감을 풍긴다.

김홍식은 대학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뒤 그래피티를 거쳐 요즘에는 주로 팝 아트 작업을 하는 작가다. 그는 오래전부터 전통미술에 관심을 갖고 민화와 단청 등을 공부해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래피티나 팝 아트 같은 매우 서구적인 장르의 작업을 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에는 동양적인 모티브가 많이 발견된다. 따라서 그에게 이러한 동·서양 혼합은 매우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형식을 통해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단지 동·서양의 조화 같은 것은 아닌 듯하다.

홍대 앞 서드 갤러리에서 열린 김홍식 개인전에 출품된 ‘Won’. [사진 김홍식]

20세기 최고의 스타 작가인 앤디 워홀은 “나는 돈을 사랑한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말하며 달러 그림을 그렸다. 그는 최고의 예술은 비즈니스라고 말하기도 했다. 워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관점이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그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예술은 사기”라는 백남준의 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듯이 워홀의 말도 액면 그대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한국인들이 사랑하는 민화는 세속적인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그림이라는 점에서 앤디 워홀이나 김홍식과 다르지 않다. 아니 앤디 워홀과 김홍식이야말로 민화의 충실한 후예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사실 민화는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아랫도리를 드러낸 어린아이처럼 욕망 앞에서 어떠한 망설임도 없다. 꽃과 새, 물 위로 솟아오르는 잉어, 책과 문방구, 십장생은 모두 세속적인 삶에 대한 직접적인 욕망의 표출일 뿐 거기에는 어떠한 초월적인 의식도 없다. 오로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는 세속적 인생관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다.

홍대 앞 서드 갤러리에서 열린 김홍식 개인전에 출품된 병풍 그림인 ‘The World is Yours’. [사진 최범]

그러면 민화는 욕망의 포르노일까. 하지만 영국의 미술사가 케네스 클라크가 벌거벗음(the naked)과 누드(the nude)가 다르다고 했듯이, 민화와 포르노는 다르다. 이중섭의 나동(裸童) 그림을 포르노라고 하지 않듯이, 부끄러움이 없기에 민화는 외설적이지도 않다. 그저 그 숨김없는 욕망의 진솔함 속에서 우리는 과거 사람들이 숭배하고 추구한 대상이 무엇이었는지를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민화를 사랑하는 이유도 사실 거기에 있다.

김홍식의 작품들도 욕망의 아카이브라는 점에서는 민화와 다르지 않다. 그의 전시에는 화폐 그림 이외에도 각종 총기류를 그린 병풍, 옻칠과 금박으로 그린 ‘카무플라주’ 시리즈 등 현대 한국인들이 숭배하고 욕망하는 대상들이 가득하다. 그런 점에서 김홍식의 작품이야말로 진짜 현대 민화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민화와 팝 아트 역시 동일하지 않다. 팝 아트를 가리켜 현대 소비사회를 맹목적으로 찬양하는 예술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그렇게만 볼 것은 아니다. 팝 아트의 노골적인(?) 태도에는 역설적으로 모종의 비판적인 시선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민화에는 자신이 무엇을 욕망한다는 사실에 대한 어떠한 자의식도 없어 보인다. 마치 대상과 욕망이 자연 그 자체인 듯이 완벽하게 일체화되어 있을 뿐이다.

팝 아트는 그렇지 않다. 팝 아트는 얼핏 보기에 소비와 욕망을 드러내고 찬양하는 것 같지만, 대상과 욕망 사이에 거리가 있다. 팝 아트에서 욕망의 대상과 주체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어떤 불편한 어긋남이 있다. 민화와 팝 아트의 이러한 차이는 김홍식의 작업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도움을 준다. 그가 그려낸 도상들(돈과 권력)은 현대 한국 사회가 그러한 것들을 욕망하고 숭배하고 있음을 환기시킨다. 김홍식은 전통 민화의 요소를 차용하고는 있지만 그 세계관을 재현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러한 일치와 불일치를 통해서 틈새를 벌리고 새로운 의미를 주입한다. 그래서 김홍식의 그림들은 민화와 팝 아트 사이에 있으면서 차이를 드러낸다. 그 사이와 차이가 그의 그림을 민화의 모방이 아닌 현대미술로 만든다.

최범 디자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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