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주문 폭발해도 배가 없다..익산에 갇힌 韓트랙터 1000대
지난 25일 찾은 전북 익산 왕궁농공단지에 있는 농업기계 제조업체 동양물산기업의 출하 대기장은 870여 대의 트랙터로 가득 차 있었다. 평소(150~200대)보다 4배나 많은 물량이다. 공장 지붕 위에 올라가서 보니 흡사 빨간색 메뚜기떼(트랙터)가 누런 익산 평야에 내려앉은 듯한 모양새다.
"미국 수출용인데 선적을 못 해 쌓여 있다. 오늘 해외 사업부에서 이번 주 내내 선적할 컨테이너가 없다고 연락이 왔다. 주말까지 출하를 못한다. 앞으로 사흘 치 생산량까지 합하면 대기 물량이 1000대가 넘을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차가 다니는 길에도 트렉터를 세워놓아야 할 판이다." 김형준 동양물산 출하 담당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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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임 두배 내도 배 못 구해"
동양물산은 한 달에 1000대 이상의 트랙터를 미국으로 수출한다. 40피트(12m) 컨테이너 한 개에 2~20대의 트랙터를 실을 수 있어 약 100여 개의 컨테이너가 필요하다. 하지만 미주 노선 선복량(배에 실을 수 있는 화물의 총량) 부족과 운임 폭등으로 선적을 못 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배를 구하지 못해 수출을 못 하는 어려움은 대기업보단 중소·중견기업에 집중되고 있다. 대기업의 전자제품은 글로벌 현지 생산이 많고, 자동차·철강 등은 전용 선박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동양물산은 지난 9월부터 미주 노선 해운 운임을 2배로 내고 있지만, 컨테이너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이달 들어 동양물산이 포워딩 업체에 낸 운임 단가(1컨테이너)는 미국 서부 3520달러(약 388만원), 동부 5093달러(약 562만원)다. 지난 4~8월엔 각각 2020달러와 3333달러를 냈다. 이달 추가 운임만 약 20만 달러(약 2억1000만원)에 달한다. 중견기업인 동양물산은 5~6개월 단위로 물류주선(포워딩) 업체와 계약을 맺지만, 미주 노선의 경우 최근 화물량이 폭주하다 보니 계약은 사실상 무의미해졌다.
글로벌 해운 운임도 고공행진 중이다. 지난 27일 상하이컨테이너운임지수(SCFI)는 2048.27로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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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가는 배, 중국서 한국 건너뛰고 미주 간다
미주 노선의 수요·공급 불균형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바이러스(코로나19) 여파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 상반기 코로나19로 줄어든 물동량이 하반기 들어 폭증한 게 가장 큰 이유다. 특히 머스크·MSC 등 글로벌 대형 선사가 주로 운용하는 중국-미국 물동량이 대폭 늘었다.
이로 인해 평상시 중국 동부 항에서 출발해 부산에 들러 미국으로 가는 배가 한국을 거르고 가는 경우가 많아졌다. 중국 화물만으로 배가 다 차기 때문이다. 또 국적 선사인 HMM(옛 현대상선)은 올해 2만4000TEU(1TEU 20피트 컨테이너 한 개)는 급 초대형 컨테이너선 12척을 띄었지만, 이는 유럽 항로에 투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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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취미 농사' 급증, 한국 트랙터 호재
올해 국내 트랙터 제조업체는 뜻밖의 호황을 맞았다. 코로나19로 인해 수시로 '록다운(봉쇄조치)'에 들어간 미국에서 '가든용' 소형 트랙터 수요가 폭발한 덕이다.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자 잔디 깎기 등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며, 소형 농업기계 수요로 이어졌다. 그래서 배가 없어 못 싣는 상황이 더 속이 탄다.
이주영 동양물산 공장장(이사)은 "미국 사람들은 소형 트랙터에 '모어(잔디 깎는 기계)'를 장착해 쓴다"며 "올해 하반기에 내년 물량을 거의 수주했다. '이상 수요'라 할 정도로 뜻밖의 상황"이라고 말했다. LS엠트론 관계자도 "코로나19로 '하비 파머(Hobby Farmer, 취미 목적 농사일)'가 늘어나 미국에서 주문이 대폭 늘었다"고 했다.
미국의 소형 트랙터 시장은 한국과 일본, 인도 등이 경쟁하고 있다. 동양물산·대동공업·LS엠트론·국제기계와 일본의 구보타·미쓰비시·얀마·이세키 그리고 인도의 마힌드라 등이다. 한국 트랙터는 일본 브랜드의 주문자상표부착방식(OEM) 생산에서 시작해 이제 글로벌 시장에서 일본과 경쟁하는 수준에 접어들었다.
업계는 적기 공급을 못 해 모처럼 찾아온 호기가 날아가지 않을까 걱정이다. 이주영 이사는 "수주 물량이 내년 상반기에 몰려 있다"며 "제때 공급을 못 하면 수주가 일본과 인도에 넘어갈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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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는 고수익, 배 안 늘릴 것"
미주 노선 화물 수급 불균형은 당분간 해소되지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이상윤 인하대 아태물류학부 교수는 "글로벌 선사들은 코로나19 전부터 경기 부진으로 해운 물동량이 줄자 선복량을 줄였다"고 말했다. 올해 국제해사기구가 시행한 배출가스 규제로 오래된 컨테이너선들은 개선·수리에 들어간 것도 배가 부족한 이유다. 이 교수는 "선사들은 지금의 높은 마진을 이어가기 위해 당분간 선복량을 늘리려 하지 않을 것"이라며 "하반기 해소하지 못한 물동량과 연말연시 미국 소비 수요로 인해 수급 불균형은 내년 상반기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박양균 중견기업연합회 정책본부장은 "수출 기업의 애로사항을 접수해 정부 부처에 전달하고 있지만, 뾰족한 대책이 없는 상황"이라며 "최근 화물안전운임제 도입으로 부산항까지 가는 물류비와 미국 내 육상 물류비도 올라 중견 수출 기업은 삼중고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임시 편을 투입하는 등 대책을 내놓았지만, 업계는 '언 발에 오줌 누기'라는 반응이다. 지난 25일 해양수산부는 HMM(옛 현대상선)과 손잡고 미주 노선에 긴급 투입하는 컨테이너선에 중소기업을 위한 350TEU의 선적 공간을 마련하기로 했다. HMM은 오는 연말까지 총 6회 미주 항로에 이 선박을 운항한다. 그러나 익명을 요구한 업계 관계자는 "3500TEU도 아니고 350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출발한 컨테이너선이 부산을 거치지 않고 지나치는 상황에 대해 "올 것이 왔다"라는 시각도 있다. 전문가들은 한진해운이 파산하며, 글로벌 해운 업계에서 한국의 위상이 낮아져 벌어진 일이라고 말했다. 양종서 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연구원은 "HMM이 글로벌 해운동맹 '디 얼라이언스'에 가입해 있긴 하지만, 아직 한진해운보다 힘이 미약하다"며 "이참에 국내 선사와 화주가 힘을 합해 간판 국적 선사로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선사와 화주가 단기 이익보다는 안정적인 물류 환경 확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양종서 연구원은 "HMM은 국내 화주를 위한 서비스를 마련하고, 중소 수출 기업은 연합해서 물동량을 확보하는 등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동반자 관계가 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익산=김영주 기자 humanes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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