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이 쿠데타를 두 번 해야 했던 이유
[김종성 기자]
전두환의 집권은 2개의 쿠데타에 의해 뒷받침됐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등을 박정희 피살 연루 혐의로 체포하는 과정에서 총격전을 벌인 1979년 12·12 쿠데타와 국회와 국무회의장을 계엄군으로 봉쇄한 가운데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발표하고 행정부를 장악한 1980년 5·17 쿠데타다.
12·12쿠데타로 전두환은 군부 1인자가 됐다. 군부는 물론이고 의회·행정부·여당에서도 그를 능가할 자가 없었다. 그렇지만 12·12 직후에 쿠데타 정부 혹은 군사정부를 수립하지 못했다. 쿠데타 정부를 세운 것은 5·17 쿠데타와 5·18 광주항쟁 직후인 1980년 5월 31일이다.
이날 그는 형식상으로는 대통령 보좌기관이지만 실제로는 임시정부나 마찬가지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세우고 이 기구의 요직인 국보위 상임위원장직에 취임했다. 최규하 대통령이 국보위 설치령 제3조에 따라 국보위 의장이 됐지만 제4조에 따라 국보위 권한이 국보위 상임위원회에 위임됐기 때문에 이날부터는 전두환이 실질적인 행정부 수반이었다.
박정희는 1961년 5·16 쿠데타 당일에 군사혁명위원회라는 군사정부 혹은 임시정부를 세웠다. 이틀 뒤 이 기구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한 그는 제3공화국 출범 전날인 1963년 12월 16일까지 이 기구를 통해 국정을 운영했다.
이와 달리 전두환이 최초의 쿠데타로부터 5개월 보름 뒤에야 임시정부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민주화 요구가 드높았던 1980년 '서울의 봄' 상황에서 대중적 기반이나 민주적 정통성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박정희를 정점으로 했던 기존의 지배 블록 내에서 그의 입지가 완전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지배 블록 내에서 분명히 1인자였지만, 하위 블록들(군부·관료집단·여당)을 전반적으로 장악하지는 못했다. 그가 5·17 이전에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하지 못한 데는 이런 사정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10·26 직전까지 정국을 이끌었던 박정희의 최측근 그룹은 10·26의 총성과 함께 순식간에 자멸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대통령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을 쓰러트린 뒤 체포됐고, 화를 모면한 비서실장 김계원은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박정희를 최측근에서 보좌했던 비서실·경호실·중앙정보부가 그날 밤 술자리와 함께 일거에 공멸한 것이다.
이렇게 사라진 최측근 그룹을 제외하고 지배 블록 내에서 살아남은 유력한 집단은 정승화 참모총장이 이끄는 군부, 최규하 국무총리가 이끄는 행정부 관료집단, 김종필이 이끄는 민주공화당(공화당)이었다. 이 중에서 군부는 12월 12일에 전두환의 수중에 넘어갔지만, 관료집단과 공화당은 그렇지 않았다. 두 집단은 5·17 이전까지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향유했다.
그래서 5·17 이전의 전두환은 군부 1인자 지위를 바탕으로 지배 블록 내에서 1위를 유지하기는 했지만 관료집단과 공화당에 대해서는 제한적인 영향력밖에 행사할 수 없었다. 그가 5개월 만에 제2차 쿠데타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민주화운동을 억누르기 힘들었다는 점과 함께 이 같은 지배 블록 내부의 사정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전두환의 지위가 다소 유동적이었던 5·17 이전 시기에 관료 집단의 실질적 리더였던 인물이 있다. 10·26 당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었다가 12·12 당일에 국회에서 임명동의안이 통과돼 13일부터 국무총리 직무를 개시한 신현확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5·17 이전까지 지배 블록 내에서 협력과 경쟁을 연출하면서 이 시기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 5공 청문회 증인석에 나온 전 신현확 국무총리 |
ⓒ 자료사진 |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경북 칠곡에서 출생한 신현확은 대구고등보통학교와 경성제국대학 예과(고교 과정) 및 본과를 거쳐 대학 졸업 연도인 1943년에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했다. 행정고시에 합격한 식민지 한국인은 지방 군수로 가는 게 상례였지만 그는 달랐다. 처음부터 대장성(재무부) 근무를 제의받았다.
1943년 봄 일본 도쿄에서 고등문관시험을 치렀다. 합격이었다. 그해 조선인 합격자 중에서 제일 우수한 성적이라고들 했다. 난다 긴다 하는 경성제대 학생들 중에서도 재학 중 고시에 패스한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이를 계기로 아버지는 '경성제대 3대 천재'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얼마 안 있어 해방을 맞이한 그는 대구대 교수로 근무하다가 1951년부터 대한민국 정부에 몸을 담았다. 상공부에 첫발을 내디딘 그는 이 정부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39세 때인 1959년에 부흥부 장관이 됐을 정도다. 하지만 이듬해 4·19 혁명으로 2년간 옥살이를 피할 수 없게 됐다. 3·15 부정선거에 연루됐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경성제대 3대 천재 소리를 들으며 고시에 합격한 뒤에 일본제국주의가 갑자기 패망하고, 세상의 부러움을 받으며 39세에 장관이 된 뒤에 이승만 정권이 곧 망했다. 유사한 패턴이 그 뒤 그의 인생에서 두 번 더 나타난다.
1975년 12월 개각 이후 TK 출신의 비율이 20% 이상으로 높아졌고, 이는 박정희 체제의 마지막 시기인 1977년, 1978년 개각에서 26~28% 선으로 더욱 높아졌다. 이때 비로소 TK가 하나의 세력으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규모가 되었던 것이다.
10·26 직후에 관료 집단 및 군부의 수뇌부는 김대중·김영삼과 더불어 김종필을 극력 견제했다. 두 집단은 김종필이 박정희 체제 2인자였다는 점을 이유로 김종필을 견제했지만 박정희 체제의 수혜자인 그들이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두 집단 수뇌부는 대체로 TK 출신이고 김종필은 충남 부여 출신이었다. 이 점은 김종필에 대한 그들의 거부감을 이해하는 단서가 될 수도 있다. 10·26 이후 여당 내에서 김종필이 급부상하는 현상은 이들 TK 출신들에게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TK 관료 집단의 리더인 신현확은 이 시기에 관료 출신답지 않은 정치적 행보를 보였다. 박정희 사후의 권력 공백기에 군부·관료 집단·공화당 수뇌부와 협력하면서도 동시에 이들과 경쟁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그는 정치권을 조율하는 작업에도 뛰어들었다. <신현확의 증언>은 "아버지는 본격적으로 여야 정치인들을 만나기 시작했다"고 한 뒤 김종필의 대선 출마 소식이 들리자 "김종필 고문과 담판을 짓기 위해 단둘이 만났다"라고 말한다. 이 자리에서 신현확은 김종필을 만류하면서 "헌법을 고쳐 3김에게 공정한 기회를 보장하겠소"라고 제안했다. 현행 헌법 말고 다음 헌법하에서 출마하라고 말했던 것이다.
신현확은 대통령 최규하도 어느 정도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최규하의 마음을 이원집정부제 쪽으로 움직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1980년 3월 14일 자 <동아일보> 기사 '최 대통령, 절충식 정부형태 바람직'은 "(최규하가) 새 공화국 헌법상의 정부 형태로는 대통령중심제와 의원내각제를 가미한 절충 형태가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시사했다"라고 보도했다.
대통령은 외교를, 총리는 내정을 분담하는 이원집정부제는 전두환의 권력욕에 부합하지 않는 시스템이었다. 이는 외교전문가인 최규하와 행정 실세인 신현확에게 좀 더 유리한 시스템이었다. 이런 모습이 김종필의 눈에는 신현확이 최규하를 꼭두각시로 이용하는 모습으로 비쳤다.
<김종필 증언록> 제2권에서 김종필은 "권력 의지가 약했던 최규하가 대통령직에 목을 걸기 시작한 것에는 신현확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한다"라고 한 뒤 "아마도 신현확은 절대 권력이 사라진 정치 공간에서 최 대통령을 앞세워 행정부가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믿었던 모양이다"라고 회고했다.
김종필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앞으로 나오게 될 신당(新黨)이 실은 신당(申黨)이 아닐까 하며 신(申)현확을 바라보는 시선도 많았다. 1980년 4월 25일 자 <경향신문> 인터뷰 기사 '신 총리 일문일답 내용'을 쓴 기자가 "최근 정가에 신 총리가 주도하는 신당설(申黨說)이 나오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것도 그 때문이다. 이에 대한 답변은 "나도 모른다"였다.
김종필을 견제하고 최규하를 이용했다는 평가만 받기에는 신현확의 행동이 너무 '광폭적'이었다. 그는 좀 더 대담한 행보를 남겼다. 중앙정보부장 서리직을 차지해 행정부에도 교두보를 두려는 전두환의 움직임에도 일정 정도 제약을 가했다. 중앙정보부장 서리직에 민간인을 임명해야 한다고 최규하 대통령에게 간곡히 역설함으로써 군인인 전두환에게 불리하게 행동했던 것이다.
위의 강원택 논문은 "흥미로운 점은 그 과정에서 전두환이 신현확의 반대 입장을 잘 알고 있었고, 이 때문에 신현확을 찾아가 자신의 임명에 동의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신현확이 전두환을 상대로 일정 정도의 견제자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이다.
최규하 대통령이 신현확 총리의 간곡한 제의를 뿌리치고 결국 전두환을 그 자리에 임명한 것과 관련해 위 논문은 "최규하는 전두환을 활용하여 신현확과 TK 세력을 견제하려고 했다"라고 평가한다. 출신지가 큰 비중을 차지한 당시의 관료 집단 내에서 강원도 원주 출신인 최규하의 입지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은 대구에서 성장했지만 경남 합천 출신이었기 때문에, 최규하 입장에서는 전두환이 신현확 견제에 도움이 되리라는 판단이 생겼을 수도 있다.
▲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청와대를 떠나는 최규하 대통령을 악수로 환송하고 있다(1980. 8.). |
ⓒ 국가기록원 |
한편, 신현확이 전두환에 대해 일정한 견제 역할을 했다는 해석에 대한 반론이 있다. 신현확과 최규하 등의 활약상이 지나치게 부각될 경우 전두환과 신군부 집단의 역할이 지나치게 축소되는 왜곡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견해다.
강원택 논문에 대한 반론인 <역사비평> 2018년 가을호 논문 '1980년 봄을 빼앗아간 신군부와 그 공모자들'에서 정상호 서원대 교수는 "그의 논문은 그러한 권력의 작동이 마치 신군부와 무관하게 일어난 것처럼 묘사함으로써 '1980년 봄'의 전체 구도를 왜곡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정상호 논문에서 지적된 것처럼 신현확·최규하의 역할을 과대평가하면 전두환과 신군부의 죄악이 어느 정도 감춰질 수도 있다. 하지만 5·17 이전의 전두환 권력은 그 이후의 전두환 권력과 분명히 다르므로, 박정희 사후의 권력 공백기에 있었던 신현확 등의 역할을 조명하는 것은 당시 상황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김종필·최규하뿐 아니라 전두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견제자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 신현확은 5·17 쿠데타가 감행되고 5·18 광주항쟁이 일어난 지 이틀 뒤인 5월 20일에 각료들과 함께 사표를 제출했다. 이로써 전두환 정권과 거리를 두게 됐지만, 완전히 멀리한 것은 아니다. 전두환 정권의 핵심부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제5공화국 헌법의 입안에도 관여하고 국정자문위원으로도 참여했다.
위에서 신현확이 승승장구하던 중에 얼마 안 있어 정권이 망하는 일이 일제강점기 때와 4·19 때 있었으며 그 후 두 번 더 유사한 일이 있었다고 했다. 그중 하나는 부총리로 맹활약하다가 10·26 사태로 대통령이 피살된 일이고, 나머지 하나는 총리로 활약하다가 5·17 쿠데타로 최규하 정권이 사실상 무의미해진 일이다.
나름대로 용기 있는 행동을 많이 하고 사셨지만, 젊은 혈기에 무모한 위험을 무릅쓰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않았다. 훗날 12·12 당시에 아버지가 대단히 용기 있고 죽음을 불사하는 영웅처럼 행동한 것으로 묘사한 드라마도 있는데, 사실 그렇지는 않았다. 한계선에 최대한 가까이 가면서, 그러나 무모하지는 않게 행동하는 것이 아버지의 일관된 특징이었다. 물론 아버지는 분명한 소신파였지만 이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 <신현확의 증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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