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한 박사의 당신이 모르는 삼국지

2020. 11. 20.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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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가 황건적에게 고당현을 잃고 빈털터리가 돼 공손찬을 찾아갔을 때, 유비의 심정은 어땠을까.

공손찬과 유비는 탁현에 있던 노식의 문하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 유비는 탁현 토박이였고, 공손찬은 랴오둥 외지에서 온 유학생이었다.

노식 문하 시절 공손찬 관련 일화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텃세나 무시가 없었을 리가 없다. 유비는 공손찬과 친해서 그를 형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유비 특유의 친화력과 포용력으로 타지인 공손찬과 좋은 관계를 맺었던 것 같다.

▶북방의 맹주로 거듭난 공손찬

▷오랑캐와 전쟁으로 세력을 확장

학업을 마친 후 황건적의 난과 동탁의 난을 겪는 동안 두 사람의 지위는 엄청나게 벌어졌다. 랴오둥으로 돌아간 공손찬은 북방에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황건적, 한족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오환족(선비족의 일파)과 격전을 벌이면서 지방 군벌로 성장했다.

어느 날 공손찬이 기병 수십 기를 이끌고 요새를 순시하러 나갔다가 수백 명의 선비족 기병과 조우했다. 고지로 후퇴했지만 적에게 포위되고 퇴로가 막혔다. 그는 병사들을 설득해 강행 돌파를 시도했다. 공손찬은 양쪽에 칼을 차고 창을 들고 부하들을 이끌었다. 부하 절반을 잃었지만, 수십 명을 죽이고 탈출에 성공했다. 기가 질린 선비족은 다시는 공손찬의 영역을 침공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큰 명성을 얻은 공손찬은 정부로부터 도독 지위를 받고 3000명의 기병을 거느리게 됐다.

한나라 조정은 유주 지역(현재 베이징과 톈진 일대)을 평정하기 위해 강온양책을 썼다. 공손찬을 분무장군으로 임명해 주둔하게 하고 유우를 유주태수로 임명해 유화책을 사용하게 했다. 유우는 이전부터 이 지역과 주변 이민족에게 인망이 있어서 유주를 빠르게 안정시켰다.

반면 공손찬은 유우의 인기가 못마땅했다. 자신이 피 흘려 평정해놓은 땅을 유우가 차지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동탁의 난 당시 북방 지역에서는 소위 ‘미니 삼국지’가 펼쳐졌다. 랴오둥의 공손찬, 유주의 유우, 발해와 기주의 원소였다. 셋이 잘 협력하거나 한 번에 승부를 내서 주종 관계가 형성됐더라면 삼국지 스토리는 완전히 달라졌을 테다.

그러나 세 사람은 너무나 달랐다. 유우는 황족이었고 한 황실에 마지막으로 남은 군벌이었다. 유우는 원소를 극도로 싫어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원소의 야심이 남달랐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황족답게 현실을 모르는 고집불통이라는 점은 유우의 가장 큰 단점이었다. 결국 유우는 실력자였던 원소와 협력을 일체 거부했다.

공손찬은 원술과 손을 잡고 원소, 유우와 대립했다. 침공하는 여러 선비족 부족과 싸우고 황건적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공손찬의 전공은 남달랐다. 하지만 공손찬의 최대 약점은 정치적 유연함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는 직선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사람은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작은 원한도 반드시 보복했다. 장인이 공손찬을 노식에게 보낸 이유가 그 성격을 고치고 타협과 유연함을 배우라는 의도였는데 유학 생활도 큰 효과가 없었다. 공손찬은 황건적과 전투에서 유우, 원소와 잠시나마 협력한 적이 있지만 결국 여러 문제로 사이가 벌어졌다.

공손찬 입장에서 마침 좋은 기회가 왔다. 황하 북쪽 세력 판도를 보면 공손찬은 북방에 있고, 남쪽에는 원소와 유우가 자리 잡았으며 기주에는 한복이 있었다. 공손찬은 남으로 향하는 진로가 완전히 막혀 있었다. 하지만 동해안을 따라 산둥반도로 가는 지역에 황건적이 여전히 날뛰고 선비족, 흉노족이 출몰하는 통에 행정 공백 지대가 많았다. 기병 전문가답게 공손찬은 그 지역에 과감하게 자신의 군대를 투입했다. 정사에는 공손찬의 세력이 허베이성 중앙부인 계교까지 진출했다고 한다. 그 동쪽 옛 제나라 땅과 산둥반도 지역은 확실하게 공손찬 세력이 됐다. 그 남쪽에는 도겸이 다스리는 서주가 있고 서주 남쪽은 원술이 차지하고 있었다.

서주가 걸림돌이 되기는 했지만 공손찬은 동해안을 따라 원술과 연결되면서 원소를 북쪽과 동쪽에서 압박할 수 있었다.

그런 공손찬에게도 고민이 있었다. 인재다. 당대 최강 기병대를 보유했지만 공손찬은 그 지역 점령뿐 아니라 통치할 수 있는 리더가 부족했다. 랴오둥인이 아닌 중원을 다스릴 수 있는 인물이 없었다.

공손찬의 원정군은 주로 그의 형제나 사촌이 이끌었다. 공손찬은 허베이성과 산둥성 지역에 수하인 엄강과 전해를 파견했다. 이들은 중국인 관리가 분명한 듯하다. 전해는 이력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산둥 지역은 춘추전국시대에 제나라 땅이었고, 제나라 왕족이 전씨였다. 전해는 산둥 지역에 기반을 둔 호족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들만으로는 불충분했다. 이 지역을 믿고 맡길 만한 중국인 인재가 더 필요했다. 그때 잘 아는 학교 후배가 ‘형님’ 하면서 찾아왔다. 한눈에 봐도 듬직해 보이는 무장 두 명까지 이끌고. 바로 유비다.

▶공손찬과 유비의 재회

▷유비 독자 세력 갖추는 기틀 마련

공손찬의 기억에 유비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학창 시절 유비는 친절하고 아랫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놀기 좋아하는 호인이었다. 단순 우직한 공손찬이 웬만한 지략가도 발견하지 못한 유비의 잠재력을 꿰뚫어 보기는 어려웠을 게다. 과거 의리를 떠나 당시 공손찬의 처지에서 유비는 딱 마음에 드는 수준의 인물이었다. 그는 유비를 전해와 함께 산둥으로 파견했다. 아마도 유비는 전해의 통솔을 받았을 것이다.

공손찬은 수십 명에서 잘해야 백 명 단위 유비의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애썼다. 자신의 최정예 오환족 기병 약간을 최근에 자신에게 귀순한 장교에게 맡겨 보내줬다. 그 장교는 체격이 크고 재능 있는 젊은 중국인이었다. 유비는 거저 얻은 청년 장교를 아주 맘에 들어 했다. 의리 있고 성실하고 맡은 일에 대한 책임감이 아주 강했다. 그 젊은 장교가 상산군 진정현 출신(현재 허베이성의 성도인 스자좡시)인 조운(조자룡)이다.

여기서 잠깐. 왜 갈 곳 없던 유비는 공손찬을 찾아갔을까. 유비는 한나라 조정에 기대를 걸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공을 세우고 능력을 인정받고 싶었다. 그 기대는 부서졌다. 정부는 그의 공로를 정당하게 평가해주지 않았다. 간신히 고당현령이 됐지만 황건적에게 패배하고 고당을 뺏겼다. 유비가 한 황실의 후손이라는 점 때문에 후대 역사가나 소설에서는 이 부분을 강조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당현을 뺏겼다는 사실은 당시 유비에게 재기 불능의 오점이었다.

원소나 한복, 심지어 종친이라는 유우에게 갈 수도 없었다. 원소나 한복은 자신을 무시할 것이고 과거에 얽매여 사는 유우는 한나라 조정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반면 랴오둥인 공손찬은 중국인 인재가 필요했다. 유비는 이 상황을 정확히 짚었다. 아무리 뛰어난 인재도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사람에게 의탁해야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다. 유비는 공손찬, 원소, 유우 세 명 중 공손찬이 자신을 가장 필요로 할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요동치는 허베이의 정세 속에서 유비는 그것을 발견하고 실행에 옮겼다.

[임용한 국역사고전연구소장]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84호 (2020.11.18~11.2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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