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명의 진지한 고딩들,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습니다
기사의 사진은 필름을 이용하여 촬영하고 직접 스캔하였으며 사이즈 조정 등 기본적인 보정만 했음을 밝힙니다. 괄호 안에 간단한 기종과 필름 종류를 기재하였습니다. <기자말>
[안사을 기자]
[*<투덜대던 아이들이 변했다 "쌤, 저도 운동장에서 잘래요">에서 이어지는 기사입니다.]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해외이동학습을 국내 백패킹 노작기행으로 새롭게 기획한 지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5개월은 그렇게 더디더니 1개월은 마치 사흘 같았다. 떠나기 전날, 함께 인솔하는 옆반 담임선생님이 단톡에 이런 글을 남겼다. 하늘이 까매지고 몇 시간이 흐른 뒤였다.
"아침이 오겠죠? 여태껏 배낭 꾸렸네요. 울 아들이 걱정이 한가득입니다."
나야 이런 여행이 이골이 난 사람이지만 배낭에 텐트며 침낭이며, 일주일이 넘는 기간 동안 입을 옷가지를 넣은 채로 야외취침을 해가며 다녀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엄두가 나지 않을 여정이었다. 더구나 각양각색을 띠는 대안학교 아이들을 인솔하는 사람으로서는 배낭의 짐 외에도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가 몇 배는 더 했을 것이다.
2학년 부장으로서 이번 기행을 기획하고 성공적으로 다녀올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의 협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교사는 교사대로 각자의 자리에서 능동적으로 서로의 빈틈을 채워주었고 그 배려가 쌓이고 쌓여 결국 우리 모두의 '성장'이 되었다.
장호항에서 우리를 떠나간 전세버스
완주에서 장장 5시간을 달려 삼척 중앙시장에 도착한 우리는 중국음식점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4끼니 식사의 장을 봤다. 애초 생각했던 그림은 재래시장에서 아이들이 흥정도 하고 어르신과 애정어린 대화도 나누는 경험을 통해 세대교류를 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민 끝에 시장 옆 하나로마트에서 장을 보기로 했다. 영수증 처리가 어렵고 가공되지 않은 식재료를 다듬기에는 야영장의 환경이 열악했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런 경험은 비상차량을 가지고 간 내가 실컷 했다. 학생들이 깜빡하고 짐에 못 넣은 물건들이 있어서 시장을 헤집어 필요한 물건들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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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설치된 텐트들 (645N/Portra400) |
ⓒ 안사을 |
전세버스 두 대는 장호항에 우리를 내려놓고 유유히 돌아갔다. 이제부터는 도보, 시내버스, 기차 등을 이용해 이동해야 한다. 아이들은 낯선 곳에 떨어진 데 더해, 의지했던 버스마저 휭하니 떠나버리니 그제서야 이곳에 덩그러니 남았다는 것이 실감이 난 듯했다. 게다가 남은 날이 아직도 일정이 일주일 넘게 있다는 사실에 더욱 막막했을 것이다.
첫날 텐트와 타프를 치고 짐을 정리하니 어느덧 땅거미가 졌다. 모둠 당 하나씩 배부된 작은 랜턴에 불을 켜고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코펠을 펼쳤다. 지름이 20cm밖에 안 되는 작은 프라이팬에 식재료들이 올려졌고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각 모둠에서 맛있는 김이 피어올랐다.
교사들은 모둠을 돌면서 화기 사용 안전을 점검했다. 학교 운동장에서 이미 한 차례의 요리경연대회를 거쳤기 때문에 딱히 도울 것도, 고쳐줄 것도 없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이들은 완성된 요리들을 하나 둘 가져다주었다. 그토록 속을 썩이고 날마다 머리를 부여잡게 하던 녀석들이었는데, 감격스러운 마음이 혀뿌리 근처로 훅 올라왔다.
아이들의 이러한 대견하고 착한 모습이 계속되었고, 기행의 4일째 되던 날 모든 계획을 애초 승인하고 용기를 주었던 전 교장선생님께서 전화로 안부를 물으셨을 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잘 있는 수준이 아니고요. 은혜로운 순간들의 연속입니다. 우리 아이들 너무 잘 하고 있습니다. 정말 행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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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호항의 아침 (645N/Ektar100)시화 활동을 해야하는 날, 마침 아침부터 하늘이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
ⓒ 안사을 |
둘째 날은 이동을 하지 않고 온전히 장호항과 해변을 느끼는 날이었다. 오전에는 케이블카 체험이 계획되어 있었고 이른 점심을 먹은 후 12시부터는 <장호항을 그리다>, <장호항을 노래하다>라는 주제로 그림과 시를 짓는 시간이었다. 저녁에는 2차 요리경연대회도 예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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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와 구름 (645N/Ektar100)멀지 않은 바다에서 비가 내리는 것이 보였다. |
ⓒ 안사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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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 곳을 바라보며 (MZ-S/C200) |
ⓒ 안사을 |
"얘들아. 저기 비 오는 것 봐라. 신기하지?"
"우와. 저게 비예요?"
"응. 여기는 안 오는데 저기만 비가 오네. 저렇게 멀리서 비 오는 것을 보게 되는 경우가 흔하지 않아. 잘 봐두렴."
"근데 우리는 괜찮아요?"
"괜찮아. 보통 구름은 편서풍을 타고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니까, 더 먼 바다로 나갈거야."
자신있게 기상에 대한 대화를 마치고 30분 뒤. 우리는 비를 쫄딱 맞았다. 비구름이 동쪽이 아닌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곶으로 나와있는 지형에 있었던 우리 위로 가을비가 내렸다. 기행 직전 각자 우비를 두 벌씩 나누어주긴 했지만 배낭은 야영장에 있었다. 우리는 처마 밑을 메뚜기처럼 뛰어다니며 비를 조금씩 피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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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척해양케이블카 (MZ-S/C200) 비는 금새 멈췄고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
ⓒ 안사을 |
점심은 근처 식당에서 간단하게 사먹고 그림과 시를 짓는 활동을 시작했다. 반나절이라는 긴 시간이 한꺼번에 주어졌을 때 아이들은 방황하거나 휴대폰만 보고있지 않을지 걱정했다. 그런데 그 걱정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네임팬과 사인펜 한두 자루, A4용지 몇 장 만으로 아이들은 몇 시간이고 바다 앞에서 글과 그림을 지어 나갔다. 어찌나 고요하고 진지했던지 그 모습이 오히려 블랙코미디의 한 장면처럼 느껴져서 계속 감탄과 웃음을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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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색에 잠긴 학생 (MZ-S/C200)누구보다 말이 없던 이 학생은 이날 외에도 몇 시간이 넘도록 바다를 바라보며 마음으로 파도와 씨름을 했다. |
ⓒ 안사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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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짓기 중 (MZ-S/C200)항상 차분하고 착실한 학생. 이 학생은 이틀 후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방법으로 전체 닭싸움에서 우승한다. 후속기사에서 상세한 이야기를 밝힐 예정. |
ⓒ 안사을 |
백패킹 기행이다보니 그 흔한 서류판 하나 준비할 수 없었다. 한 학생이 나를 불렀다.
"선생님. 받칠 것이 없어서 너무 불편해요."
"그래? 방법을 찾아보자. 어? 그래. 이 물통을 쓰면 되겠네!
"오! 완전 좋아요. 감사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만이 많은 것 같은 투덜이가 생수통 받침대 하나에 만족을 하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이 아이는 다름 아닌 우리 반 학생인데 통합기행 전까지는 불만과 두려움이 고루 섞인 불평을 해대더니 막상 와서는 누구보다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한가로움을 즐기며, 주어진 환경에 점차 만족해나가는 과정이야말로 이 아이들에게 둘도 없는 최고의 교육이었다. 이런 광경을 흐뭇하게 지켜보면서 교사들은 둘째 날을 순조롭게 보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농담처럼 이런 말이 오고갔다.
"우리 얼마나 남았지?"
"이제 이틀째니까 7일 남았지요?"
"아, 그렇구나. 하하하하."
장호항에서의 마지막 날은 날씨가 매우 맑았다. 원평해수욕장으로 도보 이동을 해야 하는 날이어서 참 다행이었다. 우리는 2박3일 동안 벌여놓은 짐과 각종 장비들을 10시 안에 정리를 해야했다. 전날 밤 교사들과 회의를 하면서 가장 걱정했던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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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호항을 떠나며 (MZ-S/C200) |
ⓒ 안사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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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겁지만 즐겁게 (MZ-S/C200)브이를 하고있는 학생은 기행을 떠나기 전 나에게 잔소리를 들어가며 옷가지의 삼분의 일 가량을 뺐다. 학생 하나하나와 나누었던 상호작용을 모두 나열하면 500쪽은 나올 것 같다. |
ⓒ 안사을 |
* 근덕면 매원2리 원평해수욕장캠핑장에서의 2박3일에 대한 기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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