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 서울의 땅·건축은 다자간 게임의 산물

김현길 2020. 11. 19.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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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서울해법, 김성홍 지음, 현암사, 360쪽, 2만5000원
‘서울해법’은 지난 60년간 쉼 없이 땅을 갈아엎으며 건물을 일으킨 서울의 어제와 오늘을 되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내일에 대한 고민도 함께 던진다. 저자인 김성홍 서울시립대 교수는 “수도로 건설된 지 626년이 넘었지만, 건축물의 나이는 환갑이 채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도시를 백 살로 보면 건축은 겨우 열 살이다. 어린이다. 모든 것이 서툴고 문제를 일으키는 나이다”라고 말한다. 게티이미지뱅크


600년 도읍지 서울엔 대한민국 압축성장의 흔적이 뚜렷하다. 세계 어느 도시보다 빠르고, 크게 변해왔다. 이는 글로벌 도시들과의 인구 비교를 통해 단적으로 확인된다. 인구 100만 명의 런던이 800만 명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129년이다. 뉴욕은 127년, 도쿄는 76년이 걸렸다. 이에 비해 서울은 46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것도 200만 명이 더 많은 1000만 명이 되기까지 소요된 시간이다.

단기간에 급성장한 ‘블랙홀’ 서울은 넓어지고, 높아질 필요가 있었다. 강남, 목동을 비롯한 여러 도시계획을 통해 새로운 생활공간을 확보했다. 추가된 공간 위로는 한 뼘이라도 더 공간을 늘리려는 치열한 ‘용적률 게임’이 펼쳐졌다. 수많은 2차원의 계획들과 3차원의 고심들이 결합된 결과물이 오늘날 서울의 외형인 셈이다. 이방인의 눈으로 본 서울이 고층빌딩으로 뒤덮인 최첨단 도시이면서 가로·세로로 긴 네온사인이 덕지덕지 붙은 복잡한 길거리인 것은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여러 겹으로 덧댄 서울

책 ‘서울 해법’은 서울의 변화를 여러 겹으로 기운 천 조각에 비유한다. 서울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네 가지 도시 조직이 핵심 조각이다. 조선 도읍 한양의 골격이 남은 역사 도심, 1934년 ‘조선시가지계획령’에 의해 근거가 마련된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조성한 격자형 조직, 택지개발사업으로 조성한 신시가지, 재개발·재건축 사업으로 정비해온 조직이 이에 해당한다.

역사 도심은 건폐율(대지면적에 대한 건축면적 비율)이 용적률(대지면적에 대한 연면적)과 같았던 한양 단층집이 위치한 사대문 안과 사대문 밖 일부다. 서울시 전체 면적의 2.9%밖에 되지 않지만 어느 지역보다 불균질하고, 불규칙하다. 삐뚤빼뚤하고, 제각각인 필지 위에 용적률은 강남보다 높다. 반면 일제시대부터 1988년까지 이어진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마련된 격자형 조직은 한결 정돈된 모습이다. 영등포, 대방, 돈암, 청량리 지역 등으로 각종 사업지 중 가장 넓다. 가장 큰 사업지였던 영동지구 개발로 강남이 탄생했다.

택지개발사업은 1983년 목동·신정동 일대를 신도시로 만드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전면 시행됐다. 이후 상계동·중계동·창동 개발, 마곡, 상암 등으로 확대됐다. 수도권 신도시 속도전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마지막 천 조각인 재개발과 재건축은 서울 전역에서 산발적으로 사업이 이뤄졌다. 40년 간 복잡한 과정을 거쳤지만 아파트를 짓는 사업으로 귀결됐다. 사업별, 지역별로 사업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주거 격차를 벌리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땅의 모습이 네 개의 큰 천 조각으로 달라졌다면 개별 건축물의 외형을 결정한 건 땅과 법, 용적률, 시간과 비용 등이다. 이 중 용적률은 절대 인구수, 인구밀도, 국가 전체 인구 대비 집중도가 모두 높은 서울에서 첫 번째 관심사였다. “용적률은 돈이기” 때문이다. 건축가들이 민간 프로젝트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 역시 최대 용적률 계산이다. 들쑥날쑥한 외형, 우스꽝스러운 지붕 모양 등은 용적률 셈법의 결과인 경우가 많다. 한때 ‘불법’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던 아파트 발코니 확장도 용적률을 향한 욕망이 광범위한 불법을 합법으로 바꾼 경우다.

이밖에 가로로 방이 길게 배열된 남향 횡장형 평면을 선호하는 한국인의 취향은 아파트는 물론이고 단독·다세대·다가구 주택을 비슷한 형태로 만든다. 또 주차장 문제 역시 건축물의 외형을 바꾼 주요 동인이다. 필로티 주차장을 연면적과 층수에서 제외하면서 주차에 강점이 있는 필로티 구조를 한 다세대·다가구 주택이 크게 늘었다. 또 구릉지 아파트 단지에 대규모 옹벽이 생긴 것도 대규모 지하주차장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재 서울은 법과 제도, 개인과 단체, 기업과 관료 등의 이해관계가 얽힌 “다자간 게임”의 결과물이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현재의 서울은 여러 주체가 치열하게 싸워서 만들어낸 절충의 산물이다. 겉으로 무질서해 보이지만 각 주체의 치밀한 논리, 전략, 전술이 숨어 있다.”


더 나은 서울을 위해

저자는 서울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하게 된 과정을 되짚으며 문제점과 그에 대한 생각도 곳곳에 심어놓는다. 역사도심 재개발 과정에서 ‘노포(老鋪)가 사라진다’는 반발에 부딪혀 사업이 좌초된 것에 대해 “개발은 악이고, 보존은 선이라는 도식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논의를 압도했다”고 지적한다. 서울시 역시 여론에 떠밀려 “해법 없는 후퇴를 성급히 선택했다”고 비판한다.

건축은 “여기, 지금”에 집중하고, 그것이 목표가 돼야 한다는 말도 반복해서 변주한다. 일제 식민지를 거치면서 전통이 단절되고, 서구 건축문화가 이식된 역사 속에서 전통과 서구를 지나치게 의식할 필요가 없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그러면서 경북 안동에 있는 봉정사 극락전·영산암과 전통을 살린 것처럼 보이는 경북도청 건물을 대비한다. 저자는 극락전과 영산암이 당대에 맞는 해법을 찾은 건축물인 반면 경북도청은 “모방을 자랑하는 모조품이 태어났다”고 꼬집는다.

재개발·재건축 과정에서 공공임대주택을 배척하고, 대단지 고급 아파트 건설을 밀어붙이는 왜곡된 공동체와 집단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도 빠트리지 않는다. 강남으로 쏠리는 개발 이익을 분산해야 한다는 주장도 한다. “지난 수십 년 간 공공이 주도한 양질의 도시 인프라 위에 개인이 과대한 이익을 누리고 있다. 강남에서 발생한 비대칭적 개발 이익은 비강남의 도시 인프라 개선에 쓸 수 있도록 재분배해야 한다.”

에필로그에선 구체적인 해법도 몇 가지 확인할 수 있다. 역사 도심 지역의 주택 공동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중산층 거주 시설 건설, 청계천 이남에 청년과 신혼부부가 살 수 있는 공공주택 건설을 제안한다. 대규모 유휴 부지를 활용한 공공임대주택 공급의 필요성도 강조한다. ‘좋은 건축’과 ‘옳은 도시’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책의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저자는 시간이 지나도 품격과 품질을 잃지 않는 기본에 충실한 건축을 좋은 건축으로 정의한다. 또 1%의 명품 건축과 99%의 나쁜 건축으로 이뤄진 도시보다 10%의 좋은 건축이 바탕을 이루는 도시가 살기 좋은 도시라고 설명한다.

생소한 건축 용어와 개념이 낯설 때도 있지만 서울이 오늘의 외형을 갖춘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책이다. 부동산 관련 뉴스가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내일의 서울에 대해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저자가 중간중간 활용하는 비유도 책장을 넘기는 데 도움이 된다. ‘길모퉁이 건축’ ‘도시 건축의 새로운 상상력’(이상 현암사)을 펴낸 저자가 9년에 걸친 ‘도시 건축’ 3부작을 마무리하는 의미가 담긴 책이기도 하다.

김현길 기자 hg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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