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부대 핵심 서경석, 당시엔 학생운동 개척자였지"

최육상 입력 2020. 11. 19. 09:33 수정 2020. 11. 19.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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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취업 1세대 윤조덕의 증언 ③] 그 때 그 사람들

[최육상 기자]

 
 서울대학교 개교25주년 기념식 날이던 1971년 10월 15일에 위수령이 내려져 군인들이 정문을 지키고 있다. 박정희 정권은 3선 연임과 대통령선거 부정을 규탄하는 대학생들의 민주화 시위가 격화되자 위수령을 발동해 서울의 대학가를 봉쇄하는 정책을 썼다.
ⓒ 윤조덕
 
 1971년 10월 서울대 공대 축제. 오른쪽 단상 위 공대 학장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학생들의 사열을 받고 있다. 학생들이 미는 차량에 '고관은 서민의 피', '특권층', '교련 반대' 등의 문구가 붙어 있다. 윤조덕 원장은 "축제 때 사열을 받는 등 교련을 정식 학점으로 매기면서 대학생들을 마치 군인처럼 대했던 시대였다"라고 회상했다.
ⓒ 윤조덕
 
2편 "유일하게 찾아온 이가 후배 김문수였어"(http://omn.kr/1qcrj)에서 이어집니다.

1970년 8월에 인천 지역 산업실태를 견학하고 11월에 전태일 열사의 분신을 접한 뒤 1970년 겨울방학에 공장체험 활동을 했던 윤 원장은 1971년 3월 발생한 한영섬유 노동자 김진수 테러 사건을 접하게 된다.

이 때 윤 원장은 KSCF(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학사단 조직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1971년 여름방학 학사단 활동은 서울대 공대 산업사회연구회 회원들을 비롯해 감리교신학대와 이화여대 등 각 대학 학생들 총 20여 명 정도가 참여했다. 학사단 프로그램은 인천시 화수동에 하숙방을 여러 곳 정해 놓고 약 한 달간 공장에 취직해 공장 생활을 체험하거나, 빈민가 등 취약 지역에 들어가 주민을 조직하거나, 노동조합 활동을 체험하는 세 가지로 진행됐다.

윤 원장과 학사단 회원들은 신진자동차 김창수 노조위원장 탄압 사건을 접하고 한국노총 금속노동조합연맹 본부를 방문하여 금속노조 김병용 위원장에게 문제를 제기해 김창수 위원장의 제명을 저지하기도 했다. 윤 원장은 KSCF 학사단 활동을 하고 있을 때 운명처럼 김진수 열사 장례식에 참여하게 된다.

"KSCF 간사 안재웅 선생님이 영등포에 있는 도시산업선교회를 함께 가자고 했어. 71년 3월 18일에 한영섬유 노조에서 활동하는 노동자 김진수씨가 회사 측의 노조 와해 구사대 일행 중 한 명에게 드라이버로 찍혔는데 병원에 갔더니 의식불명이라는 거야. 결국 김진수 열사가 5월 16일에 돌아가셨고 장례식은 6월 25일에 치렀지. 그 한 달 동안 유족하고 회사하고 보상 문제로 협의를 해야 했어. 내 역할은 이를 집중적으로 사회 이슈화 하는 거였지. 처음엔 전면에 나서지 않았어. 노동현장으로 들어가려 했기에 대학생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했지."
   
 한국교회도시산업문제협의회 등이 주관한 고 김진수 영결식 안내 자료(1971년 6월 21일)는 “고 김진수 군의 죽음은 오늘의 기업 풍토가 가져온 죽음이며 폭력의 난무가 가져온 죽음”이라고 알리고 있다. 윤조덕 원장은 김진수 열사의 장례식에서 집행위원회 부위원장과 호상을 각각 맡았다.
ⓒ 윤조덕
서슬 퍼런 군사정권도 막지 못한 

당시 장례식 고문들은 교계 인사들이었다. 그간 윤 원장의 활동을 지켜본 그들은 대학생 신분이던 윤 원장에게 장례집행위원회 부위원장과 호상을 맡겼다. 조지송 목사가 직접 권유했다고 한다.

"세브란스병원에서 오후 3시엔가 발인 예배를 했지. 장지인 모란공원묘지로 출발하려 했을 때였어. 학생들이 만장 수십 장을 만들어서 기습적으로 올려 들었지. 노동운동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어. 교계 어른들이 참여한 장례식이었으니 서슬 퍼런 박정희 정권에서도 어떻게 하질 못했지. 이처럼 김진수 열사 장례식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결합한 계기가 됐어."

그날 윤 원장과 산업사회연구회 회원들이 참여한 김진수 열사의 장례식에는 이런 문구가 적힌 만장이 등장했다.

'차라리 철폐하라, 허울 좋은 노동 조건'
'김진수의 죽음은 제2의 전태일 사건'
'노동운동을 탄압 말라! 현재의 모든 노동운동 탄압을 즉각 중지하라'
'이 사건을 암장하려 한 악덕 경찰 즉각 처단하라!'
'언론은 약자의 편에서 김진수 사건의 경위와 진상을 정직하게 보도하라!'
'노동자들을 더 이상 죽음 속으로 몰아넣지 말라!'
- <김진수-시대의 불꽃3>(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2년, p148~p152)

공은 공대로 시대의 평가에 맡겨야

인간의 기억만큼 불완전하고, 단편적이며, 자의적이기까지 한 것이 또 있을까. 불리하고 어두운 구석은 묻어두고, 조금이라도 유리한 부분은 과장하기 마련이다. 동료가 가르침을 전해준 사이로 뒤바뀌고, 때로는 인생의 물줄기를 틀어준 위인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윤 원장은 인터뷰 내내 이런 기억의 덧칠에 대해 엄격하게 거리를 두려 했다. 공과 과에 대해 평가하지 않으려 했고, 자신의 지난날이 빛나 보이거나, 타인의 공이 작아지는 것에 대해서도 명확한 선을 지켰다.

윤 원장이 풀어놓은 1970년대 이야기에는 고 조영럐, 장기표, 고 제정구, 고 김근태, 서경석, 인명진, 김문수, 이미경, 최영희, 장하진 등 익숙한 정치권 인물들이 등장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이들도 있고, 이념과 사상적으로 윤 원장과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들도 있다. 윤 원장은 "시대의 역사는 시대의 역사로 인정해야 한다"며 현재 시각으로 당시 인물들을 평가하는 것을 경계했다.

"내가 유일하게 서경석 목사에 대한 용비어천가를 쓴 사람이야. 서울대 공대 산업사회연구회 민주화운동사(안) 50년사 정리하는 내용에 '과거는 과거고, 현재는 현재다'라고 했어. 서경석 선배가 그 시대에는 굉장히 열정적이었어. 후배들이 많이 따랐고, 교회 청년학생 운동의 핵심이자 개척자였지. 굉장히 선진적이고, 일반 학생운동권 중심 인물과도 밀접했지. 서경석 선배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이야. 그때 학생운동 개척자들이 장기표 선배, 고 조영래 선배, 고 김근태 선배 등의 그룹이었으니까. 다만 서경석 선배는 1971년 군대를 가게 됐고, 노동 현장을 가보지 못했기에 한계가 있었어. 선배가 지금은 태극기 부대의 핵심멤버 중 하나인데, 그게 현장 경험의 차이에서 나오는 거라고 봐.

또 빈민운동은 김진홍 목사의 활빈교회가 있었고 제정구 선배의 야학 등이 있었지. 1960년대 말 청계천변 움막과 판자촌 등지에서 시작해 1970년대 초반부터 한양대 부근 둑방에 자리 잡았지. 나도 그곳에 꽤 드나들었지. 여기저기 많은 이들을 만나 의견을 나누며 서로를 성장시켰어."

윤 원장은 공교롭게도 유신이 시작되자마자 군대에 입대했다. 윤 원장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했음에도 감옥을 가거나 수배를 받은 적이 없기에 무난히 군대 생활을 마치고 만기 제대했다.
  
▲ 1971년도 서울대 학생 수첩 학사력 '대학생 교련 검열 11월 9일~11월13일'이라고 명시돼 있어 대학교 정규 학사일정에 교련 검열이 들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최육상
   
▲ 서울대 법대에서 발행한 '자유의 종 제9호'(1971년 3월 17일) '교련 철폐 95% 찬성' 글에서 교련 철폐를 주장하는 근거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왔다고 전했다. '위기는 국가의 위기인가? 정권의 위기인가?' '국가의 위기라면 어찌하여 저들은 골프와 도둑질 계집질에만 골몰하는가!' '교련, 현역, 향군을 통해 15세부터 20년간의 병영생활은 전체 국민을 상명하복의 명령체계 속에 몰아넣어 파쇼체제 확립의 터전을 마련하고자 함이 아닌가?'
ⓒ 최육상
   
"대학생 때 3선 개헌 반대도 했지만, 교련 반대도 심하게 했었어. 그래서 박정희가 1971년 10월 15일 서울 지역에 위수령을 내려서 대학 앞에 무장 군인들이 진을 쳤지. 대학생들 제적시키고 군대 강제징집해서 최전방으로 보내서 감시도 많이 했어. 대학 동기였던 새문안교회 대학생회 회장 원정연과 야학교장 정인승 등도 군대에 끌려가서 다들 고생 많이 했는데 나는 표적의 대상이 되질 않았어. 노동 현장을 가야겠다고 최대한 신분을 감췄으니까. 대학에서 교련 2년을 받아서 34개월 복무 중에 2개월이 단축된 군 생활을 했어. 주변에 솔선수범해야 한다, 그런 의식이 강해서인지 군 생활은 잘 했어."

결단

윤 원장은 제대를 한 뒤 유신 시절 대학 졸업 이후의 진로를 고민하다가 결국 위장 취업을 선택했다.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면 대기업에 취업해 먹고 사는 건 걱정 없던 시대였다.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복학하고 나서 졸업 한 학기가 남으니 고민이 되더라고. 서울대 기계과면 대개 공장장까지 하고 은퇴를 할 수 있었는데, 정해진 길을 갈 것인가? 생각해 보니 그 길은 아니었지, 써클 멤버들끼리 같이 고민을 했어. 누군가는 장기적으로 노동현장을 들어가야 한다, 그런 본보기가 필요하다, 결국 내가 결단을 내렸지."

그는 그렇게 현장 중심의 노동 운동을 선택했다. 위장 취업해 노동현장을 갔다가 장기적으로 들어간 첫 번째 사례였고 69학번 서울대 공대 동기들 중 유일했다.

"일종의 사회 구원을 택한 셈이지. 76년 1월에 일신제강 오류제조소 기능직 사원모집 광고가 동아일보에 났어. 일명 '공돌이'라 불리던 작업원이야. 서류 제출하고 영어, 일반상식을 치른 후 면접 보고 합격했지. 고졸로 위장 취업한 거야. 오류제조소만 해도 종업원이 천 명 넘었고, 부산과 부평에도 공장이 있고 굉장히 큰 회사였어."

1976년 2월에 입사했을 때 일당은 하루 8시간에 920원, 당시 일신제강(주)이 괜찮다고 했는데 그 정도였다. 그나마 작업원이라 그 금액이었고, 일용공은 800원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래도 열심히 몸으로 노동을 익혀가던 그는 고졸로 위장 취업한 게 결국 1년 만에 들통이 나 강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전태일 열사 분신 이후 새문안교회 대학생회에서 서경석 선배가 주동이 돼 '참회와 호소의 금식기도회'를 하고 있었고, 나와 후배들이 동네 교회에 기도회를 알리는 찌라시를 뿌렸지. 그 때 후배가 잠복 형사에게 잡혔어. 당시에 후배가 '윤조덕 선배가 시켰다'고 진술서를 쓰고 나온 게 경찰 기록에 남았던 거야. 정보과 형사가 3개월 동안 내 뒤를 밟았는데, 별 문제가 없더라는 이야기를 해주더군. 그래서 '1970년 11월 당시 찌라시를 돌렸던 주모자였다'는 자술서를 쓴 뒤에 계속 일을 했지만, 누구를 만나거나 할 때 외부로 노출되면 안 되는 게 철칙이었으니까 정말 조심했지. 노출이 되면 무조건 감옥을 갈 수도 있었으니까. 친구들 만나는 것도 단절했고."

윤 원장은 위장 취업이 들통났음에도 3년 5개월이라는 장기간 동안 일신제강 노동현장에서 일을 했다. 그중 마지막 1년은 노동조합 대의원에 선출돼 노조 간부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위장 취업 발각 후 '빨갱이', '산업스파이' 등 온갖 소문에 시달렸어. 저녁에 일 끝나고 동료들과 소주라도 한 잔 하면 다음날 바로 인사과에 소식이 들어가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지. 오히려 동료들에게 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자책감도 들고. 신변의 위협도 느꼈지. 그때 인천산업선교회 조승혁 목사님이라고, 대성목재에서 노동자로 현장을 체험하고 산업선교를 시작한 분이셨는데, 내게 노동자의 안전 분야를 공부해 보라고 권하셨지. 그래서 대학원 시험공부를 위해 한 달간 휴직을 했어."
  
회사 측은 윤 원장에게 현장노동자 대신 화이트칼라에 해당하는 엔지니어 직을 권하던 때였다고 한다. 그래서 대학원 시험을 보고 합격자 발표 나기 전에, 정식으로 사원 발령을 내달라 요청했더니 도리어 인사과에서 나가라는 말이 돌아왔다.

"대학원 가면 자연스럽게 그만두려니 한 거겠지. 그게 싫으면 도로 현장직으로 가라고 하더군. 그래서 알겠다며 현장으로 돌아갔지."

윤 원장이 예상을 깨고 태연히 현장에 복귀하니 주변에서 "저 놈이…"하면서도 호감어린 눈길을 보내는 게 느껴졌다. 마침 그 때가 노조 대의원 선거였다. 당시 노조는 대개가 어용이었다. 노조가 오히려 사측을 대변하고, 임금협상 때는 어용노조 지부장이 뒷돈을 받고 사측하고 담판 짓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위장 취업했던 일신제강(주) 오류제조소 1978년 노동조합 임원 야유회 때의 윤조덕 원장(맨 왼쪽)
ⓒ 최육상
  
 1978년 겨울 전국신용협동조합본부가 주최한 산악회에 참가한 일신제강(주) 노동조합 윤조덕(둘째줄 가운데)과 최이순 선배(오른쪽).
ⓒ 윤조덕
 
'윤조덕이는 못 자른다'

"고향인 파주 출신 최이순 선배라고, 철판 만드는 공장의 조직 부장이 있었는데 나를 조사통계부장으로 추천했어. 결국 새로운 노조 집행부가 딱 1표 차이로 기존 노조를 뒤집고 들어섰지. 내 1표가 컸던 거지. 그런데 다음날 강서경찰서 조사관이 전화를 해서 지부장을 통해 나를 자르라 했어. 내가 위장 취업한 거니까 불순분자라 이거지. 지부장이 최이순 선배에게 '네가 책임져'라 그러니까 선배가 '내가 책임진다, 윤조덕이는 못 자른다!'라고 해버렸대."

노조 대의원으로 있으면서 윤 원장은 회사와 집에서 계속 감시를 받았다. 특히 둘째 동생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이후에는 형사들이 한 달에 한 번씩 집에 와서 조사를 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다. 노조에서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었는데 초대 회계이사를 맡았다. 그때는 한 달에 5부 이자가 있던 시절, 신협은 이자율을 1%로 정했다. 모두가 만족해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나서 대의원 선거를 다시 했을 때 그는 낙선했다. 경찰인지 혹은 회사였는지, 모종의 낙선 작업이 들어왔는데 심증은 있되 물증이 없는 시대였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에 전두환 5공 정권이 들어선 후 노조가 탄압으로 와해되고 회사에서 부당 해고된 최이순 선배와 노조 간부 4명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가게 됐지. 지부장과 사무장은 미리 알고 도망가서 피했고. 나는 위장 취업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어 회사를 그만두는 바람에 화를 면했고. 노조 부지부장 등 임원들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걸 보면 미운털이 지독하게 박혔던 거지."

그는 일신제강에 위장 취업했던 걸 인생의 수확으로 여긴다. 윤 원장은 5.18민주화운동 이전 1976년 2월부터 79년 6월까지 위장 취업으로 노동운동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학교가 아닌 현장에서 불살랐던 젊은 시절의 기억은 아직도 또렷하다.

- 4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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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자료 제공 : 윤조덕 원장의 대학 동기 노태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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