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한 미술] '스틸 미러'가 빚는 빛의 잔물결.. 만추의 풍광 품고 일렁

손영옥,미술·문화재 2020. 11. 19.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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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서울로 7017 '윤슬'
2017년 봄 고가보행로 ‘서울로 7017’이 탄생했을 때 함께 생겨난 공공미술 작품 ‘윤슬’. 부부 건축가 강예린·이치훈씨로 구성된 건축가 그룹 에스오에이가 반원을 음각시킨 형태의 이 작품을 만들었다. 천장에 매단 루버는 거울처럼 주변의 풍광을 비추고, 움푹 파인 내부 공간에는 반사된 빛이 물결처럼 일렁인다. 권현구 기자


“와, 보인다. 보여.”

해바라기를 휘감고 올라가 담장 너머 세상을 처음 구경하게 된 나팔꽃의 심정이 그랬을까. 소라고둥처럼 빙빙 도는 계단을 올라가 서울의 명물이 된 공중보행로 ‘서울로 7017’에 섰다. 탁 트인 전망이 눈앞에 펼쳐졌다. 옛 서울역사의 초록 지붕, 장벽처럼 버티고 서 있는 금호아시아나빌딩, 숭례문의 기와지붕, 빌딩 사이로 멀리 보이는 북악산까지.1970년에 탄생해 매연을 뿜는 차들을 제 등 위로 끊임없이 실어 보내다가 2017년에 시대적 소임을 끝내고 이제는 걷는 사람을 위한 길로 재탄생한 서울로 7017을 지난주 만추의 아침에 찾았다.

보행로에는 식물들이 여러 크기와 다양한 높낮이의 동그란 화분 속에서 튼실하게 자라고 있었다. 구렁이처럼 길게 누운 식물원 같았다. 마지막 정염을 불태우듯 노랗게 물든 자작나무, 이미 잎을 다 떨군 벚나무, 탐스럽게 익은 열매를 단 모과나무, 기세 좋게 여전히 초록을 자랑하는 측백나무…. 갖가지 자연을 품은 둥근 화분들이 리드미컬하게 이어져 원들의 군무(群舞)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러다 고가가 만리동 쪽으로 꼬리를 내리듯 땅을 향하는 지점에서 또 다른 큰 원을 만났다. 서울역광장 반대편 서부역 롯데마트 맞은편 평지에 설치된 공공미술 작품 ‘윤슬’이다. 군무를 추던 원 하나가 장난치듯 고가를 건너뛰어 풀쩍 내려앉은 것 같은 작품이다. 공중보행로 군무의 화룡점정처럼 보였다.

치솟기보다 움푹 들어가길 택한 작품

윤슬은 독특하다. 공공미술이라는데, 익히 예상하듯 제단 위로 치솟듯 올려놓은 조형물은 없다. 태양광 패널처럼 보이는 루버(폭이 좁은 판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열한 것)를 원을 그리듯 설치한 구조물 사이로 땅속으로 움푹 들어가는 계단이 보인다. 공연장이 꼭꼭 숨어 있나 싶기도 한 작품이다. 루버의 표면은 거울처럼 매끈해 주변의 사물을 비춘다. 존재를 드러내기보다 풍광 속에 묻히는, 내향적 작품 같다. 그러니 2017년 4월, 미국 뉴욕의 ‘하이라인’을 벤치마킹한 서울로 7017이 처음 개장했을 때 규모에서 스펙터클했고, 흉물 논란까지 빚었던 조경 프로젝트 ‘슈즈 트리’에 가려졌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권현구 기자


서울로 7017의 국제 현상설계 공모 당선자인 네덜란드 건축가 비니 마스도 흡족해 했다는 윤슬은 부부 건축가 강예린(46·오른쪽)·이치훈(40·왼쪽)씨로 구성된 건축가 그룹 에스오에이(SoA)의 당선작이다. 서울시가 공공미술 수준을 높이기 위해 시작한 ‘서울은 미술관’ 프로그램 1호 사업이다.

할당된 장소는 고가도로의 맨 끝, 후미진 공간이었다. 가로 25m, 세로 25m 땅. “마음대로 하라”고 서울시는 말했지만, 쓰레기 적치장이 있는 후미진 공간, 불법 주차를 하거나 쓰레기 불법 투기가 일어나는 곳이 아닌가. 누구도 주목하지 않고, 아무도 ‘장소’라고 생각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강씨는 “머리카락, 휴지 등 지저분한 걸 발로 쓱쓱 밀어넣어 감추는 침대 밑 같은 공간이었다”며 웃었다.

이들은 왜 치솟는 대신 땅속으로 꺼지는 작품을 구상하게 됐을까. 공공미술은 설치되는 장소의 성격을 고민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지론이다. 도시를 구렁이처럼 휘감는 서울로 7017에서 유일하게 평지인 이 공간에 뭔가를 세우면 답답할 거 같았다. 역설적으로 땅을 팠다. 위로 솟은 타원이 아니라 거꾸로 옴폭한 타원이 생겨난 것이다.

서울로 7017에서 내려다본 윤슬. 권현구 기자


공중보행로가 생겨날 미래를 상상해봤다고 했다. 차만 다녔던 공중의 길을 걷는 시대, 사람들은 고가 아래를 내려다보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사람들이 고가 위에서 내려다보는 행위, 거꾸로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행위가 동시에 거울에 상(像)으로 맺히면 재미있을 것 같았어요.”(강)

“루버의 표면을 거울처럼 쓰는 아이디어가 나온 거지요. 거울처럼 상이 맺히지만 동시에 상이 퉁겨져 나올 수 있도록 반사도가 아주 높은 스테인리스스틸 슈퍼 미러 재질의 루버를 천장에 달았어요.”(이)

그리하여 윤슬은 공중보행로 덕분에 가능해진 ‘오르고 내리고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는 행위’의 경험을 증폭시키는 장치가 되었다. 특히 ‘거울 루버’가 부리는 마술은 놀랍다. 사방의 풍광을 품고, 그 아래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기도 한다. 움푹 꺼진 콘크리트 바닥에는 루버에 반사된 빛이 물결처럼 일렁인다. 물속으로 들어온 기분이 들 정도. 그래서 작품 제목이 윤슬이다. 윤슬은 우리말로 햇빛이나 달빛이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뜻한다.

자연스럽게 무대가 되는 공간

움푹 들어간 땅으로 시루떡 모양으로 켜켜이 쌓인 격자 형태가 계단처럼 내려간다. 보는 각도에 따라 격자의 무늬가 달라진다. 맨 아래 바닥은 타원 형태다. 약간 삐딱한 타원이라 무대인 양 자연스럽게 한쪽으로 시선이 쏠리게 하는 구조다.

“공간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니 여기가 관중석 같고, 저 끝이 무대가 될 거로 생각하는 거지요.”(강)

조각은 대개 양감을 갖는 형태를 띠기 마련인데, 윤슬은 형태가 반전된 ‘네거티브 조각’이다. 음각된 공간을 가진 형태이다 보니 극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은 용케 그걸 알고 활용했다.

지난 13일 ‘윤슬’ 을 무대삼아 박래영씨 등 젊은 무용인들이 공연을 하고 있다. 최종학 선임기자


지난 13일에도 젊은 예술가들이 공연했다. 서울예술대학 무용과를 갓 졸업한 안무가 박래영(25)씨가 재학생 4인과 함께 꾸민 무용 ‘레디메이드 타깃’이다. 이 작품은 서울문화재단이 주는 창작활동 지원 공모에 당선됐다. 코로나 때문에 오프라인 공연은 없고, 영상으로 찍어 유튜브에 올리기만 한다. 관객이 없어 서운하긴 하지만 안무가로, 무용가로 발돋움하도록 날개를 달아주는 기회라 늦가을에도 비지땀을 흘리며 연습했다. “의상도 윤슬 톤의 회색으로 했다”는 박씨는 “바닥이 동그란 원이 아니라 길쭉한 타원이기 때문에 움직일 때마다 달라 보이는 공간에 대한 감각이 이 장소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이곳에서는 무용, 명상, 심포지엄, 콘서트, 음향 전시, 옷 퍼포먼스 등 다양한 행사들이 열렸다. 심지어 계단마다 화분을 올려둔 조경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장소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창조적으로 활용되는 것에 두 건축가는 흡족한 반응을 보였다. 도심의 후미진 곳, 버려졌던 장소는 그렇게 ‘서울을 비추는 만리동’으로 거듭나고 있다.

건축과 미술은 어떻게 만나나

두 사람은 건축가다. 서울 종로구 서촌의 핫플레이스가 된 백송 터 옆 신축 건물 ‘브릭웰’이 이들의 작품이다. 전시장을 갖춘 이 건물에서 올해 들어 ‘유미의 세포들’ 특별전이 열리면서 젊은층에게 인기 만점의 공간이 됐다.

집 짓는 건축가들이 공공미술의 영역으로 나온 것은 그리 오래된 건 아니다. 미국에서는 1960년대 중반 이후 공공미술이 생겨나며 미술관 작품을 확대해 공공장소에 내놓는 방식이 성행하자 이에 대한 반성이 일었다. 70년대 중반부터 주변 건축과 풍경을 고려하는 공공미술이 새롭게 등장했다. 이 시기부터 건축가들이 공공미술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는데, 국내에서는 2010년대 들어 현대미술 분야에서 건축가들을 호출하는 문화가 생겨났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2013년 개관한 이래 야외마당에서 건축가들이 참여하는 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이 건축과 미술의 만남을 가속화했다. SoA도 2015년 현대카드가 후원하는 제2회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에 ‘지붕 감각’이라는 작품을 제안해 당선됐다. 갈대발을 유선형으로 지붕처럼 걸쳐 놓은 작품인데, 도시인들에 잃어버린 지붕에 대한 감각을 환기시키는 작품이었다. 건축 철학을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건축에서 중요한 건 내부에서의 경험입니다. 내부를 어떻게 느끼느냐가 중요합니다. 저희는 건축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경험을 풍요롭게 하려고 비워내는 전략을 씁니다.”(이)

요약하지만 ‘비움으로써 풍요로워지는 공간’을 추구한다. 윤슬도 그렇다.

손영옥 미술·문화재 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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