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전 앨 고어 "다신 전화 안하겠다"..이게 승복 연설의 정석
고어부터 클린턴까지..'우아한 승복' 재조명
‘민주주의의 교과서’와 같은 미국이지만, 이번 대선에서 보듯이 모든 제도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제도의 맹점을 메우는 전통과 불문율로 더 성숙한 민주주의를 보여준다는 평가도 있다.
대선에서 패자의 ‘승복연설’과 승자의 ‘승리선언’으로 평화로운 권력 이양을 약속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이번 46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불복 의사를 밝히면서 현지에선 124년간 이어진 ‘우아한 승복’의 전통마저 깼다는 비판이 나온다.
미 공영 NPR에 따르면 패자의 승복 연설은 1896년 대선에서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 당선인인 윌리엄 매킨리에게 축하 전보를 보낸 것이 시초였으며 이후 한번도 끊어지지 않았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그간 다양한 승복 연설이 있었지만 공통적으로 담긴 내용은 ^유권자의 선택에 대한 존중 ^승자를 위한 기도나 지지 메시지 ^지지자들간의 분열을 치유하려는 노력 ^순조로운 권력 이양 약속 등이었다.
'대통령사'를 연구하는 로버트 달렉은 LA타임스에 “평화로운 권력 이양에 힘쓰겠다는 걸 보여주는 승복 연설은 단순한 연설이 아니다”며 “자신을 지지한 유권자에게 패배를 같이 받아들이라고 보내는 신호”라고 설명했다.
민주적 제도의 안정성, 국민 통합을 위해 꼭 필요하지만 법률로는 강제할 수 없는 구멍을 오랜 전통과 관례로 채워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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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 고어 “이제는 다시 전화하지 않겠다”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게 2000년 대선에서 조지 W 부시에게 패했던 앨 고어 민주당 후보의 최종 승복 연설이다. 당시 그는 “조금 전 조지 W 부시에게 전화해 43대 대통령이 된 것을 축하했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 전화 걸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며 연설을 시작했다.
당시 선거인단 4명 차이로 패배한 고어 전 부통령은 부시 대통령에게 승복했다가 플로리다주(州) 재검표 논란이 나오자 승복 선언을 한차례 번복했다. 그러다가 연방대법원이 “법률에 정해진 선거 일정에 맞출 수 없다”며 재검표 중단 판결을 내리자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다시 전화하지 않겠다"는 농담으로 다시 번복할 일은 없을 것이란 점을 아쉬워하는 자신의 지지자에게까지 명확히 전한 것이다.
그는 이어 “법원의 판결에 강하게 반대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인다”며 “국민으로서 우리의 단결과 우리 민주주의의 견고함을 위해 양보하겠다”고 말했다. 또 “나는 이제 부시 당선인에게 당파적인 감정은 내려놓고 신이 그가 이끄는 나라에 축복을 내리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WP는 앨 고어의 연설이 유머, 축하, 기도와 분열 회복에서부터 패배의 씁쓸함까지 담겨 있는 승복 연설의 가장 훌륭한 사례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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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 “헌법의 민주주의는 존중을 넘어 소중한 것”
4년 전 대선의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승복 연설도 주목을 받았던 장면이다. 당시 그는 트럼프 대통령보다 전국 득표에서 약 280만 표나 더 얻었지만, 선거인단 수에 밀려 패배했다. 힐러리 전 국무장관은 연설에서 “트럼프가 우리 대통령이 될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 마음을 열고 나라를 이끌 기회를 줘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우리 헌법의 민주주의는 평화로운 권력 이양을 보장한다”며 “우리는 이걸 존중할 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간직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공화당 내에서 트럼프와 반목을 겪었던 미국의 전쟁 영웅 고(故) 존 매케인 전 상원의원의 승복 연설도 ‘우아한 승복’의 전형으로 꼽힌다. 2008년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에게 패배한 매케인 전 의원은 “이번 선거는 역사적인 선거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겐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오늘날 미국은 잔인하고 교만한 과거의 미국과는 다른 세계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미국의 대통령이 된 것만큼 더 좋은 증거는 없을 것”이라며 단순한 승복을 넘어 역사적인 의미까지 부여했다. “오바마에게 축하 전화를 보냈다”는 대목에서 야유를 보내는 지지자들에게 매케인이 “제발”이라며 다독이는 모습도 당시 화제가 됐다.
석경민 기자 suk.gyeong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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