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릴 쪼을 임원까지 숨어버렸다"..'생존이 제일'돼 버린 직장
롯데마트의 지방 소재 점포에서 근무 중인 이정근(가명·47) 수석은 요즘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경쟁 격화로 수익이 나지 않는 점포들에 대한 폐점이 이뤄지고 있어서다. 그가 몸담은 점포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회사의 입장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점포가 문을 닫으면 다음엔 어디로 가야 할 지 누구도 얘기해주는 사람이 없다. 한 마디로 스스로 앞길을 열어가야 할 판이다.
그런 중에 회사는 사실상의 권고사직을 실시 중이란 얘기도 들린다. ‘동일 직급에서 7년 이상 재직 중’이면서 ‘50세 이상’인 직원이 대상이다. 이 수석은 25일 “회사 쪽에선 ‘인위적인 구조조정은 없다’고는 하지만, 점포가 문을 닫으면 옮길 곳이 마땅찮은 직원들은 결국 버티기 힘들다”라며 “현재 40대인데, 더 늙기 전에 차라리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아봐야 하는 건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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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에 몰린 직장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사태 탓에 직장인들이 ‘약자’의 위치로 내몰리고 있다. 기업들이 실적 부진 등을 이유로 조직 규모를 줄이고 있어서다. 지난달 통계청이 내놓은 ‘8월 고용 동향’에 따르면 8월 취업자 수는 2708만5000명으로 1년 전보다 27만4000명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항공업이나 여행업 관련 기업은 물론이고, 롯데마트가 속해 있는 롯데쇼핑 같은 내로라하는 대기업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롯데쇼핑의 경우 지난해 말 2만5298명이던 임직원 수가 올 상반기(6월 30일 기준)에는 2만4228명으로 반년 새 1070명이나 줄었다.
공감 속 '퇴사 브이로그' 인기
고용불안과 그로 인한 직장인들의 사기 저하가 이어지면서, ‘퇴사 브이로그(Video+Blog)’가 유튜브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과거엔 퇴사 브이로그의 내용이 주로 ‘새로운 꿈을 위해 퇴사했다’는 희망적인 내용이 많았다면, 최근엔 "코로나19로 인해 다니던 회사가 문을 닫았다", "실적 악화로 회사를 떠나게 됐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일부 퇴사 브이로그는 조회 수가 100만회를 넘을 정도로 관심을 끈다.
기업 내에선 도전적인 과제를 새로 시작하기보다는 가능하면 안전한 기존 업무에 안주하려는 분위기도 역력하다. 익명을 원한 재계 관계자는 “직장인 중 상당수는 올해는 더는 일을 벌이지 말고, 안전하게 가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다”며 “기업들이 임원 인사 등을 앞당기며 분위기를 다잡으려 하지만, 정작 열심히 일할 것을 독려해야 하는 임원들과 직원들 스스로가 불안한 위치에 있다 보니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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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사원 늙어가고, 희망급여는 낮아져
현직 직장인들이 느끼는 불안과 고통은 취업 시장에도 영향을 준다. 기존 인원도 줄이는 판이니, 새로운 고용을 늘리기는 어렵다. 취업 포털인 잡코리아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하반기 공채 구직자의 30.3%는 지원 회사 중 단 한 곳에서도 서류전형에 합격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구직자의 눈높이도 낮아지고 있다. 이 회사의 또 다른 조사결과, 취준생의 희망 월평균 급여는 246만9000원으로 나타났다. 지난해보다도 소폭(-1만8000원) 낮아졌다. 반면 신입사원의 평균 연령은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 선발 인원이 적어지다 보니 상대적으로 경험치가 많은 ‘중고 신입’들이 입사 전형에서 더 나은 평가를 얻는 경우가 많아서다. 구인ㆍ구직 플랫폼 사람인이 최근 기업 381개사를 대상으로 ‘신입사원 연령 변화’를 조사한 결과, 10곳 중 6곳(57.5%)이 "신입사원의 연령이 높아졌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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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비전 부재 아쉽다"
물론 이런 식의 ‘불안한 환경’이 장기적으론 기업에 대한 직장인의 충성심을 떨어뜨릴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그래서 SK이노베이션 등은 '인위적인 인력감축은 없다'는 방침을 강조하며 직원들이 업무에 매진할 수 있도록 한다. 이 회사 역시 과거 비슷한 사유로 인원을 줄였다가 부작용을 경험한 바 있다.
이명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단기적인 실적악화에 대응하지 않을 순 없지만, 장기적인 비전 없이 인력을 운용하는 건 노사 양쪽에 부정적인 영향만 남을 것"이라며 "무작정 다른 기업을 따라 '빅데이터'나 '인공지능(AI)'만 떠들 게 아니라 앞으로 산업이 어떻게 바뀔지 깊게 고민한 다음, 그에 맞춰 인력을 운용하고 인재를 키웠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수기 기자 lee.soo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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