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을 최다 득표차로 누른 조봉암, 그 기적의 숨은 공로자

박만순 2020. 10. 17.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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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코발트광산 사건을 세상에 알린 강창덕의 이야기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강창덕 전 대구매일신문 기자(94세)
ⓒ 박만순
 
"행님, 조심해서 올라가이소." "그려, 동생도 조심하게." 대구광역시 중구 중앙시장에 있는 2층 사무실은 계단이 가파랐다. 맨 앞에서 가는 이는 94세, 뒤따라가는 이는 88세 노인이었다. 선두의 강창덕은 아픈 무릎을 부여잡으며 잘도 올라간다.

2층에 올라서니 웬 사진이 7개나 걸려있다. 모두 익숙한 인물로 전봉준, 허위, 김구, 김창숙, 여운형, 조봉암, 전태일이었다. "선생님, 이게 웬 사진이에요?" "예, 제가 모시고 있는 7인 애국열사 영정이요. 잠시 묵념합시다." 강창덕의 제안에 김하종 경주유족회장과 필자는 묵념을 했다. "제가 매년 조촐하게 합동위령제를 지냅니다." 작년에 10회째 위령제를 지냈다고 한다.

"7인의 애국열사를 선정한 기준이 뭐예요?" "제가 존경하는 분들인데, 농민(전봉준), 의병장(허위), 독립운동가(김구·김창숙), 좌·우 합작 정치인(여운형), 평화통일운동가(조봉암), 노동자(전태일)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소회의실에는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다.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을 알리다
 
 1960년 6월 7일 대구매일신문 보도내용.
ⓒ 심규상
 
"강 기자, 코발트광산 취재해 보게"라는 편집국장의 권유도 있었지만, 그렇잖아도 강창덕은 '해골 광산'으로 불리는 경산 코발트광산을 취재해 볼 생각이었다. 1960년 4.19혁명 직후 사회 각 분야에서 민주화의 물결이 휘몰아칠 때, 피학살자 유족들도 일어났다. 경남 거창 유족들이 제일 먼저 일어났고,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도, 제주도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대구매일신문 사회부 기자였던 강창덕은 1960년 5월 21일 카메라를 챙겨 경산 코발트광산에 갔다. 주민들에게 10년 전 그 일을 물었지만 주민들은 미리 짠 듯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자신의 뒤를 어슬렁거리던 마을 청년과 눈이 마주쳤고, 역사의 진실을 캘 수 있었다. 

사실인 즉, 일제강점기에 '돈방석'이라 불리던 코발트광산에서 한국전쟁 전후 대구형무소 재소자와 경산·청도지역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되었고 광산 주변에는 두개골과 다리뼈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돈방석'이 '해골광산'이 된 연유다.

강창덕은 이 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다음 날인 5월 22일자 대구매일신문은 코발트광산 학살사건 기사를 내보냈다. 또 자부담으로 전단지 2만장을 제작, 11개 읍면에 배포했다. 방송 시설을 갖춘 지프차를 임대해 "가족 중에 6.25때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은 없습니까?"라며 마을 곳곳을 다녔다.

11개 읍면에는 "신고서를 받아 놔주시오"라며 연락사무소를 설치했다. 그는 유족회 결성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강창덕은 피학살자 유족이 아니었기에 김종석을 회장으로 하는 '경산유족회'를 결성하고 본인은 고문을 맡았다. 그는 유족도 아니면서 왜 코발트광산 사건 진실규명을 위해 애썼을까?

유치장에 갇힌 15세 소년

"1937년에 김일성부대가 보천보를 습격했다데"라는 강창덕의 말에 그의 친구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런데 소년 강창덕은 대가를 혹독히 치러야 했다. "칙쇼(이런 젠장)! 불령선인같으니라구." 지하 유치장에서 주재소장은 강창덕에게 호통을 쳤다. 그는 경북 경산군 하양주재소(현재의 파출소) 소장이었다.

15세에 불과한 소년이 '명성황후 시해사건', '고종황제 독살음모사건', '3.1 만세운동'과 '보천보 전투'를 겁없이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다니. 두 평이 안 되는 공간에서 소년은 15일 동안 꼼짝없이 구류를 살아야 했다. 

유치장 생활을 하면서 강창덕은 민족의식이 더 커졌다. 아버지 강문찬은 구한말에 탁지부 주사로 잠시 근무하다가 전라도 정읍으로 낙향해 보천교에 입교했다. 강문찬은 자신의 토지를 팔아 보천교를 통해 독립운동자금을 전달했다.

이런 아버지에게 평소 들은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말했는데, 일제 경찰에게 '불령선인'으로 찍히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을 시발로 평생동안 그는 감옥을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했다. 2차 투옥은 해방 직전인 1945년 8월 초였다. 경산군 하양주재소 순사부장이 해군지원병을 가라고 하자, 거부하고 도피했다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됐다.

해방 후에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일본 경찰에서 미군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1947년 11월 하순 강창덕은 대구역전 공회당에서 '분단반대·통일독립국가 건설'을 주제로 연설했다가 '포고령 위반'으로 붙잡혔다.

이날 자리는 세계일보와 중앙일보가 공동주최한 '남녀학생 웅변대회'였는데, 강창덕은 대구상업학교 3학년생으로 대회에 참가했다.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그는 퇴학 조치와 더불어 벌금 5천원을 내고 석방되었다. 

경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한 조봉암
 
 제3대 조봉암 대통령 후보 벽보와 이범석 부통령 후보의 벽보.
ⓒ 국가기록원
 
"최종 개표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개표장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선거관리위원장은 침을 삼키며 "조봉암 후보 3만4212표로 전체 유효 득표율 중 74.6%를 얻었습니다." "와!"하는 소리와 함께 투표소에 있던 이들은 여야 가릴 것 없이 깜짝 놀랐다.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 결과, 경북 경산에서 진보당 조봉암 후보가 이승만 후보를 압도적으로 이긴 것이다.

조봉암의 전국 총 득표수는 216만3808표로 30.0% 득표율에 그쳤는데, 경북 경산군에서는 3만4212표로 74%를 얻었으니 기겁할 만했다.

경북 경산군이 1956년 대선에서 '진보의 아이콘'이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경산은 6.25 당시 북한군 비점령 지역으로 이념 갈등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또 진보적 지식인 피난민들이 전쟁 후에도 경산에 살면서 진보적 여론을 주도했다. 여기에다 당시 대선에서 조봉암 경북 경산군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고군분투한 강창덕의 공도 컸다.

대구상고에서 퇴학당한 강창덕은 우여곡절 끝에 건국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에는 한민당 소속 국회의원 서상일의 비서로 정치에 입문해 일했다. 이후 1956년 진보당 창당에 합류한 서상일과 행보를 같이 한 강창덕은 '조봉암 전국 최다득표 선거구'라는 쾌거를 이루었다. 하지만 조봉암은 1958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이듬해인 1959년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승만의 반공주의 체제 하에서 강창덕은 더 이상 정치활동을 할 수 없었다. 1956년 9월 <영남일보> 공채시험에 합격한 그는 정치부 기자 생활을 잠시 하다가, 당시 '한강 이남의 최고 비판지'라 불린 <대구매일신문>에 입사했다.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어

1960년 4.19혁명은 강창덕의 가슴을 들끓게 했다. 교원노조·농민·학생운동이 활발해졌고, 한국전쟁 피학살자 유족회가 결성되었다. 강창덕은 유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코발트광산 사건 실태조사를 진행했고, 경산유족회를 탄생시킨 일등공신이었다. 

유족회가 만들어진 이후에 그는 사회대중당 활동에 주력했다. 1960년 7월 29일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강창덕은 사회대중당 후보로 출마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34세의 젊은 나이에 선거에 출마하려고 했지만 중앙당은 3.15 부정선거와 관련된 이를 공천했다. 그는 눈물을 머금고 중앙당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국회의원 선거 후 사회대중당은 분열됐고, 그는 '사회당'을 선택했다.

그런데 그는 민주당 정권에서 다시 한 번 고초를 겪어야 했다. 장면 정권은 2대 악법, 즉 데모규제법과 반공임시특례법을 제정하려 했다. 데모로 만들어진 정권이 데모를 막겠다는 것이다. 1961년 4월 2일 대구에서 열린 '2대 악법 반대투쟁'에 참여한 강창덕은 '공무집행방해죄'로 입건됐지만 기소유예로 석방됐다.

한 달 후인 1961년 5월 10일 사회당 경북도당 주최 '남북학생회담 촉진 대구시민 궐기대회'가 만경관 앞에서 열렸다. 그날 그가 외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사자후는 '반국가행위'로 규정되었다. 5.16 쿠데타 직후 강창덕은 생애 여섯 번째로 투옥되었다. 반국가행위로 12년 구형에 7년 징역형 선고를 받은 것이다.

이후에도 강창덕은 1968년 '범야권 단일후보운동'을 추진해 윤보선 후보 선거운동을 했고, 1971년에는 민주수호국민협의회(민수협) 경북지부 총무부장을 맡았다.

재산압류 당한 인혁당재건위 관계자들

1974년에 그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되었다. 그는 후일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으로 사형이 집행된 이재문과 함께 지하신문 <참소리>를 만들다가 구속됐다. 이번에는 무기징역이라는 끔찍한 형을 선고받았다.

구속된 지 10년 만인 1984년 성탄절에 강창덕은 잔형 면제 사면을 받았다. 2005년 출범한 진실화해위원회는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고, 피해자와 유가족들이 청구한 재심에서 사법부는 정의의 편에 손을 들어 주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대법원에서 인혁당 재건위 피해자 및 유족들에게 너무 많은(?) 배상금을 지불했다며 받은 돈의 상당 부분을 토해 내라고 한 것이다.

강창덕을 포함한 인혁당 관계자 상당수는 대법원의 재산압류 결정에 따라 파산위기에 빠졌다. 일부는 신용불량자가 되어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강창덕은 방 보증금 300만 원이 가압류됐으며 시가 50만원 이상의 부동산에는 빨간색 가압류 딱지가 붙었다. 구십 평생을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그에게 대한민국은 방 보증금을 압류하고 TV, 냉장고, 세탁기에 빨간 딱지를 붙였다. 94세 강창덕이 "내가 이럴려고 민주화 운동했나"라는 자괴감이 들지 않을까 나는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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