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 '세 친구' 최태웅·석진욱·장병철 감독의 35년 우정과 열정
최태웅·석진욱·장병철 감독은 35년 된 친구 지기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함께 하며 많은 추억을 쌓았고, 호흡도 척척 맞았다. 국내 최고의 수비형 레프트였던 '돌도사' 석진욱이 상대 서브를 받아 올리면, '컴퓨터 세터' 최태웅이 정확하게 공을 배달했다. 현역 시절 시원한 스파이크를 자랑한 장병철이 상대 코트에 공을 내리 꽂았다. 그렇게 아마추어 시절 우승 트로피를 싹쓸이했다.
장병철 감독은 성균관대, 최태웅·석진욱 감독은 한양대에 진학하며 잠시 떨어져 지냈지만 삼성화재에 함께 입단해 다시 손발을 맞췄다.
세 사람이 일간스포츠 창간 51주년을 맞아 처음으로 공동 인터뷰를 했다. 이 자리에서도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왔다. 내년에는 비시즌 연습 경기를 좀 더 크게 마련해 "장소와 전기는 한국전력, 제반 비용은 OK저축은행, 마케팅은 현대캐피탈이 맡자"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세 사람의 우정은 변함없다.
-첫 만남, 첫인상을 기억하나? 석진욱(이하 석)="(장)병철이와 1학년 때 짝꿍이었다. 반에 남자 학생이 더 많아서…입학 첫 날에 태권도복을 입고 왔더라. 나보다 키가 큰 친구가 거의 없었는데, 병철이가 더 컸다. 게다가 인상도 조금 무서워 보였다. 병철이를 처음 보고 '얘 싸움 잘하겠다. 나 큰일 났네' 싶었다."
장병철(이하 장)="어렸을 때 태권도를 시작해 도복을 입고 자주 등교했다. (석)진욱이는 마치 샌님 같았다. 피부가 하얀 녀석이 재킷을 입고 얌전하게 앉아 있어 그렇게 느껴졌다." 석="병철이가 인상만 그랬지 날 때리진 않았다(웃음)."
-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장="(최)태웅이랑은 3학년 때 같은 반에 배정돼 처음 만났다. 당시 선생님이 키가 큰 아이들을 한 반에 모아놓았다." 석="초등학교 3학년 때 셋이 뭉쳐 같은 날에 배구를 시작하고, 선수 등록도 함께 이뤄졌다." 최태웅(이하 최)="선생님의 권유로 입문했다. 당시에는 배구가 뭔 줄 몰랐다. 그냥 빵 주고, 라면을 끓여줘 신나서 들어갔는데 점차 재미를 느꼈다. 체육관에서 개구쟁이처럼 뛰어놀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그렇게 인연이 시작돼 초·중·고 학창 시절을 함께 했다. 인하부고 시절 동기로 3년 동안 42연승 무패, 전국대회 전관왕의 대기록을 썼는데. 석="3학년 때 전관왕을 했다. 연습도 재밌었지만 계속 이기니까 시합이 막 기다려지더라." 최="당시에는 우리가 그렇게 배구를 잘하는 줄 몰랐다. 단지 전국대회에서 계속 이기니까 '우리 실력이 괜찮네' 정도로 생각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선수 생활을 오래 하고, 지도자 생활까지 함께하게 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장="같은 멤버로 10년을 함께 손발을 맞추는 게 쉽진 않지." 석="10년을 함께 해 다른 팀 세터에 대해 전혀 신경을 안 썼다. 모든 세터가 공을 잘 올려주는 거로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다른 세터와 한 번 호흡을 맞출 기회가 있었는데, 확실히 (최)태웅이랑 기량이 다르더라. 이 친구(최태웅)가 정말 잘하는구나 싶었다." 장="나는 성균관대, 진욱이랑 태웅이는 한양대에 진학했다. 성균관대가 세터가 조금 약한 편이다. 이 친구(최태웅)가 정말 실력이 좋은 친구였구나 느꼈다." 최="(쑥스러운지) 포지션은 달랐지만 서로 경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승부욕도 모두 강했다. 덕분에 각자 기량이 발전했다."
-삼성화재에서 다시 뭉쳤다. 장="시대가 우리를 다시 만나도록 해줬다. 당시 IMF 체제 시작으로 한 해를 쉬고 입단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 셋이 삼성화재에서 만나지 못했을거다. 4년 만에 다시 만났을 때 역시 호흡은 변함이 없었다." 석="우승을 많이 해서 좋았는데 훈련을 나갈 때마다 '어휴' '아이고'하며 나갔던 기억으로 가득하다." 장="맞다. 우승까지 그 과정이 너무 힘들었다." 석="운동이 끝나면 정말 행복했다. 오전 운동 종료 후 점심 식사 때 수박 2조각을 먹은 적도 있다. 밥이 안 넘어가더라." 장="훈련 보다 차라리 경기를 뛰는 것이 더 좋았다."
-요즘 훈련량과 비교하면. 장="지금 훈련량은 그 당시의 절반도 안 되지 않을까? 요즘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삼성화재 적응 시기에 모두가 굉장히 힘들어했다." 석="우리 선수들에게 당시 삼성화재의 훈련 강도에 관해 얘기를 했더니 '그런 얘기 하지 마라'고 그러더라. '라떼는 말이야(기성세대가 자주 쓰는 '나 때는 말이야'를 풍자)'가 되더라." 최="그래도 삼성화재 멤버가 정말 좋았다. (김세진·신진식 등) 고참 선배들이 은퇴하고, 우리 셋이 딱 남았다. 형들이 없어도 '우린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뭉쳤었다. 덕분에 삼성화재 제2의 전성기를 우리가 이끌어나가지 않았나 싶다. 그 이후에 박철우(현 한국전력)·유광우(현 대한항공)가 삼성화재의 전통을 이끌어나갔다. 당시 함께 고생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기에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있지 않나 싶다."
"훈령 양이 많다"고 한 두 감독에게 재발언의 기회를 주자 장병철 감독은 "(최태웅 감독이) 정리를 잘했다"라고 말했다. 석진욱 감독도 "해명하면 추해진다"며 "(최)태웅이가 우리 생각을 잘 정리해 말했다"고 웃었다.
-장병철 감독이 2009년 은퇴했고, 최태웅 감독은 2010년 박철우의 FA 보상선수로 현대캐피탈로 떠나며 각자 다른 길을 걷게 됐다. 석="병철이가 은퇴하지 못하게 붙잡아두려고 술도 많이 먹였다." 최="엄청나게 말렸다. '정신 차려, 뭐 하려고 그래?'라고 그랬었는데."
장="내가 그때 정신이 나갔었나 보다(웃음). 한때 후회도 남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결정이 옳았던 것 같다. 이후 아마 무대에서 현역 생활을 이어가는 등 8년간 밖에서 있다가 돌고 돌아 다시 (프로 무대에) 왔다." 최="지난해 감독 선임 되기 전에 내게 먼저 전화로 알려오더라." 장="태웅이에게 정신 차렸다고 했다." 석="병철이 은퇴 때는 엄청나게 말렸고, 태웅이가 이적할 때는 짐을 싸줬다. (보상선수 이적은) 어쩔 수 없는 거지 않나. 신치용 감독님을 찾아가 '태웅이가 떠나는 거 맞냐'고 다시 한번 물어봤을 정도로 충격이었다. 울었던 것 같다. 한편으로 부럽긴 했다. 신치용 선생님 밑에서 많이 배우고, 또 김호철 감독 밑에서 배울 기회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이 친구가 정말 좋은 지도자가 되지 않았나 싶다. 정말 뛰어나고 좋은 감독님께 배웠으니까." 최="맞다. 변화의 중심에 서 있는 팀이 어떤 과정을 통해 바뀌는지 봐왔다. 그래서 변화에 두렵지 않게 된 것 같다. 최고의 지도자께 곁에서 보고 배운 점을 활용할 수 있게 돼 내게는 큰 도움이 됐다."
지난해 미디어데이에서 '친구들이 이끄는 팀을 상대로 올 시즌 몇 승을 거둘 것 같나'라는 공통 질문에 석진욱 감독은 "전승을 거두겠다"라고 선전포고했고, 장병철 감독은 "나도 석진욱, 최태웅 감독에게는 지고 싶지 않다. 최소한 상대 전적 4승 2패는 노리겠다"라고 말했다. 베테랑 최 감독은 "우리 팀과 할 때 조금 봐줬으면 좋겠다"고 몸을 사렸다.
공교롭게도 현대캐피탈은 개막 후 5연승을 달리던 석진욱 감독에게 부임 첫 패배(0-3)를 안겼다. 최하위 한국전력은 현대캐피탈은 1~2라운드 연속 무찔렀다. 첫 대결부터 물고 물리는 승부였다.
-감독 맞대결 때 의식하거나 부담감은 없었나. 장="어떤 상대와 붙든 다 똑같다. 단지 경기 종료 후에 격려나 위로가 조금 다를 뿐이다." 최="포지션의 영향인지 어렸을 때부터 감정조절을 해왔다. 그게 도움이 된다. 동기, 선배 관계를 전혀 의식하거나 의미를 부여하진 않는다." 석="다 똑같은 경기다. 개인감정이 들어가지 않는다. 선수들에게 늘 '이기는 배구'를 하자고 얘기한다. 평소와 다르게 얘기하면 선수들이 가장 먼저 안다."
지난해 미디어에서 세 감독은 유년 시절 추억을 떠올리며 유쾌한 도발과 폭로를 펼쳤다. 최 감독은 "어려서부터 내가 리더여서 (친구들이) 잘 따라오곤 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석진욱 감독은 "항상 최태웅 감독의 스타일을 보고 좋은 건 배우려고 한다. 그런데 '저건 아니지'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명언'이다. 조금 자제해주면 더 좋을 것 같다"라고 맞받아쳤다. 최태웅 감독은 "한 35년 그런 얘기를 들었으니 (석진욱 감독이) 지겨웠을 것 같다. 그 부분은 죄송하다"라고 사과의 말을 전했다.
석="이 친구가 많이 배워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는 거다. 아무나 얘기하면 주워 담지도, 수습도 안 될 것 같다. 명언을 통해 선수의 심리 상태를 자극하는 모습을 보면 대단하다. 누군가 내게 그렇게 하라고 해도 못 할 것 같다. 아내가 '사랑해'라고 말해달라고 해도 '응 알았어'하고 만다." 최="나는 (아내에게 그런 표현) 잘해." 석="최 감독은 명언, 장 감독은 화를 잘 참고." 장="술은 네가 잘 마시지." 석="사실 주량이 많이 늘었다. (수석 코치 시절에) 김세진 감독과 함께 다니다 보니…밤새워 마시고 아침에 공 때리는 날도 있었다. 주량이 자연스레 늘더라."
다시 지도 스타일 이야기로 돌아왔다. 석 감독은 "코치 때는 선수들을 많이 혼내고 강하게 몰아붙였는데 감독을 맡고선 이 친구(최태웅)처럼 하려 한다. 선수 심리상태 안정이 중요하더라. 훈련 때나 화를 내지, 경기장에선 절대 그러지 않는다"고 했다. 장 감독 역시 "내 플레이 스타일이 공격 성향이 강해서인지 성격도 급한 편이다. 그런데 감독이 되고 많이 누그러뜨렸다. 우리 선수들이 조용한 편이라 이번 비시즌에 투지를 갖도록 하는 게 첫 번째 목표였다"고 설명했다.
-이번 시즌 종료 후에 감독 계약이 만료된다. 서로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다면. 석="다음 시즌에도 코트에서 계속 만났으면 좋겠다. 우리끼리 만나면 '배구 발전을 위해 노력하자'고 많이 얘기한다. 배구 열정이 있는 이런 친구들과 오랫동안 함께해 한국 배구의 발전에 이바지했으면 좋겠다. 우리의 바람이 이뤄지려면 다 같이 살아남아야 한다. 물론 팀 성적이 좋아야 가능하다." 장="셋이 똘똘 뭉쳐 '랜선 매치'를 한 것도 마음의 소통이 있었기에 이뤄졌다. 나를 포함해 우리 친구들이 모두 잘해서 롱런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한국 배구가 좀 더 업그레이드됐으면 한다."
이때 최태웅 감독의 장난기가 발동했다. 최 감독은 "첫 시즌에는 시야가 좁아지겠지만, 두 번째 시즌은 눈앞이 캄캄해질 것이다"고 경고(?)했다.
석="이 친구는 조언을 이상하게 해. 왜 겁을 줘. 너 감독 몇 년 차야?" 최="6년 차." 석="그럼 감독 6년 차는 어떤데?" 최="네가 6년 차 감독 때 알려줄게." 장="(다르다는 듯) 나는 두 번째 시즌에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 것 같다." 최="(짓궂은 표정으로 놀리듯) 아직 시즌에 안 들어가서 그래. KOVO컵 우승? 아무것도 아니야." (인터뷰는 KOVO컵이 열리기 전에 진행됐다. 한국전력은 8월 말 KOVO컵에서 팀 창단 세 번째로 우승했다.) 장="(상관없다는 듯) 이번 시즌을 앞두고 하루도 안 쉬었다." 최="어렸을 때부터 장 감독을 봐왔지만, 성격이 이렇게 급한 줄 몰랐다. 작전 타임 때 보니까 성격이 굉장히 급하더라." 장="그렇게 되더라. 그래도 점점 내공이 생기는 것 같다."
옆에 있던 석진욱 감독은 두 감독이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보며 "나한테는 왜 메시지를 하지 않냐"고 투덜거렸다. 최태웅 감독은 석 감독에게 "너는 머리를 잘 쓰잖아"라며 "두 번째 시즌은 머리가 캄캄해질거다. (재계약이 이뤄져) 세 번째 시즌을 맞으면 그때 또 3년 차 감독의 어려움을 얘기해줄게"라고 했다.
"우리 모두 재미 없는 사람"이라던 세 사람의 인터뷰는,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짓궂게 마무리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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