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열 야구학] ②속도보다 지속 가능한 성장이 중요하다

2020. 9. 16.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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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속구는 FA 계약에도 최고 무기
직구 빨라졌지만 구사율 낮아져
최고 구속보다 활시위 폼이 중요
코치·트레이너·의사가 협력해야

일간스포츠가 창간 51주년 특별기획 ‘선동열 야구학’을 연재합니다.

‘선동열 야구학’은 야구를 가르치는 내용이 아닙니다. 야구를 새로 배우는 과정입니다. 국보 투수로, 프로야구 감독으로, 국가대표 코치·감독으로 지낸 과거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40년 넘게 축적된 ‘선동열 야구’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선동열 전 국가대표 감독은 올해 초 메이저리그(MLB) 뉴욕 양키스로 지도자 연수를 떠날 예정이었습니다. 그의 전문 분야인 투수 파트 외에도 타격과 수비, 작전 등을 폭넓게 경험하고 싶어서였습니다. 프런트 오피스 미팅을 통해 구단의 의사결정 과정을 경험할 계획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연수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선동열 전 감독은 ‘온택트(ontact) 연수’를 시작했습니다. 온라인을 통해 MLB를 공부했고, 오프라인에서 야구장 밖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수개월 동안 야구를 공부하면서 선동열 전 감독은 새로운 정보를 얻었습니다. 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야구를 봤습니다. 관념적으로 알았던 정보를 데이터를 통해 재해석 했습니다. 그의 여정을 일간스포츠가 따라갑니다. 매주 수요일 아침 여러분을 찾아갑니다.〈편집자 주〉

게릿 콜(왼쪽부터)·스티븐 스트라스버그·제이콥 디그롬

지난겨울 메이저리그(MLB) 스토브리그는 강속구 투수들의 계약으로 뜨거웠다. 게릿 콜이 MLB 투수 최고액인 9년 총액 3억 2400만 달러(3800억원)에 뉴욕 양키스로 이적했다. 스티븐 스트라스버그는 7년 총액 2억4500만 달러(2900억원)에 워싱턴과 재계약했다. 두 투수 모두 압도적인 구위를 자랑한다. 강속구는 타자와의 승부뿐 아니라 계약에도 확실한 ‘무기’다.

지난해 류현진(토론토)을 2위로 밀어내고 내셔널리그 사이영상을 받은 제이콥 디그롬(뉴욕 메츠)도 강력한 패스트볼을 던진다.

거인들의 힘을 감상하는 건 야구팬에게 커다란 즐거움이다. 콜과 스트라스버그, 디그롬의 키는 모두 193㎝다. 셋 다 시속 100마일(161㎞) 안팎의 패스트볼을 뿜어낸다.

비슷한 덩치에서 같은 스피드의 공을 던진다고 해서 같은 클래스의 투수는 아니다. ‘강속구의 시대’에서도 특히 돋보이는 투수가 있다.

직구, 속도는 늘고 비중은 줄었다

내 눈에는 디그롬의 피칭이 가장 아름다워 보인다. 그의 투구에 매료돼 영상을 수백 번 돌려봤다.

전광판에서 찍은 영상에서도 디그롬의 오른팔은 잘 보이지 않았다. 타자 눈에는 더 안 보일 것이다. 디그롬이 일부러 디셉션(deception, 투구 전 허리 뒤로 공을 감추는 동작)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테이크백이 워낙 짧고 빨랐다.

제이콥 디그롬. 연합뉴스

뒤에서 만든 반원이 작으니 디그롬의 긴 팔은 앞을 향해 큰 원을 그릴 수 있다. 투수판부터 공을 놓는 지점까지 익스텐션(extension)이 충분히 확보된다. 익스텐션에 대해서는 다시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로 인해 디그롬은 불필요한 에너지 손실 없이 최대한 앞에서 강하게 공을 때린다. 어깨와 팔꿈치가 수평을 만들어야 하는 기본을 잘 지키고 있다. 투수라면 당연히 몸에 배어있어야 할 동작이지만, 그렇지 않은 선수들이 꽤 많다.

디그롬의 환상적인 피칭의 핵심은 하체 이동에서 나온다. 오른발이 힘차게 땅을 박차며, 골반과 허리 회전으로 이어진다. 왼발은 홈플레이트를 똑바로 향하고 있다. 뛰어난 체격을 가진 투수가 이런 폼까지 완성했으니 놀라울 따름이다.

나는 지난해 펴낸 책 『야구는 선동열』을 통해 ‘프로 투수 교정 3단계’를 설명했다. 어려운 용어와 복잡한 이론을 쓴 게 아니다. 활시위(투수의 상·하체)를 팽팽하게 만들었다가, 온몸을 쫙 펴서 활(공)을 쏘는 원리를 강조했다.

투수마다 체격과 특성이 다른 만큼, 투구법은 각자 다르다. 그러나 목표는 하나다. 팽팽한 활시위를 만드는 것이다. 디그롬의 피칭이 딱 그렇다.

투수가 자신에게 맞는 폼을 찾고, 최적의 밸런스를 유지하는 방법은 뭘까. 나는 스텝 앤드 스로(step and throw)를 강조한다. 한 발, 두 발, 세 발을 걷고 공을 던져보는 훈련이다. 팔의 각도나 다리의 높이를 고민할 게 아니라, 편한 걸음을 통해 중심 이동을 느껴보라는 것이다. 기본으로 돌아가 기초 공사를 다시 하라고 조언한다. 이 과정에서 최상의 밸런스가 만들어진다.

디그롬의 투구 동작은 매우 빠르다. 그러나 슬로 모션이나 사진으로 그의 피칭을 보면, 아주 자연스럽게 마운드에서 ‘걸어 내려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지난주 칼럼에서 프로 투수가 스피드를 올릴 수 있는 한계는 시속 5㎞ 정도라고 언급했다. 여기에 아주 예외적인 경우가 있는데, 디그롬이 바로 그렇다.

디그롬은 2014년 26세 나이에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됐다. 당시 그의 패스트볼 평균 구속은 150.4㎞였다. 디그롬의 패스트볼은 약간의 증감을 보이다가 2018년 154.4㎞에 이르렀다. 지난해에는 155.9㎞였고, 32세가 된 올해는 평균 158.5㎞의 패스트볼을 던지고 있다.

2020시즌은 표본이 작아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해도, 디그롬은 30대 나이에 5㎞ 이상의 구속 증가를 만들어냈다. 그는 MLB 정상급 투수가 된 후에도 꾸준히 딜리버리(delivery, 투구 동작)에 대해 공부한 선수다. 디그롬의 투구는 재능과 연구, 훈련의 합작물이다.

이렇게 강력한 공을 던질 수 있다면, 투수는 타자를 상대하기 쉬워진다. 힘을 가졌다고 해서 힘을 모두 쓸 필요가 없어진다. 디그롬의 패스트볼은 점점 빨라졌다. 동시에 그의 패스트볼 구사율은 매년 떨어졌다.

공이 빠를수록 타자는 스윙 여부를 빨리 결정해야 한다. 그만큼 체인지업이나 슬라이더에 속을 확률이 높아진다. 디그롬의 경우 2014년 61%를 넘었던 패스트볼 비중이 올해는 43%대로 줄었다.

패스트볼 구사율이 줄어드는 건 MLB 전체적인 현상이라고 한다. 2002년 MLB 전체 투구에서 64% 정도가 패스트볼이었는데, 지난해에는 52% 수준으로 낮아졌다.

‘강속구의 시대’를 맞아 패스트볼의 강도는 높아진 반면, 빈도는 낮아진 것이다. 타자가 강속구를 의식할수록 슬라이더나 체인지업을 던져 속이기 쉽기 때문이다.

유용한 만큼 위험한 강속구

강속구는 두말할 필요 없이 강력한 무기다. 100마일 패스트볼을 던지는 것만큼 중요한 게 ‘지속 가능성’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얼마 전 아쉬운 뉴스를 들었다. 스트라스버그가 손목 수술을 받아야 해서 올 시즌을 마쳤다는 소식이었다.

스트라스버그는 10년 전부터 ‘내셔널 트레저(national treasure·국보)’로 불렸을 만큼 대단한 스타였다. 2010년 MLB 데뷔전에서 7이닝 동안 삼진을 14개나 잡았다. 그는 그해 오른 팔꿈치 인대접합 수술을 받았다. 이후에도 팔 부상이 여러 번 있었다.

스트라스버그는 대학 시절부터 마이너리그, MLB에 입성한 뒤에도 투구 수 관리를 꾸준하게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가 규정 이닝을 채운 시즌은 네 번밖에 되지 않았다.

피칭은 그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동작이다. 특히 강속구 투수라면 타자보다 부상과 싸우는 것이 더 어렵다.

스티븐 스트라스버그. 연합뉴스

내가 스트라스버그를 직접 본 게 아니어서 부상 원인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영상을 통해 본 그의 투구 폼은 상당히 거친 느낌이었다.

먼저 그의 스트라이드를 보자. 이동발인 왼발을 아직 내딛기 전이다. 그러나 오른발에 체중이 60%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은 것 같다. 여기서 이미 추진력에 손실이 생겼다.

그리고 왼발을 보면 홈플레이트가 아닌 우타자를 향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앞으로 곧게 뻗은 디그롬의 발과 차이가 있다. 이동발이 닫혀 있으면, 투수는 그만큼 허리와 어깨·팔꿈치 회전을 더 해야 한다. 에너지가 분산될 뿐만 아니라 부상 위험이 높다.

팔 움직임도 부드럽지 않다. 사진을 보면 그의 백스윙은 불필요하게 크다. 게다가 팔꿈치 위치가 어깨보다 높다. MLB에서는 이를 ‘인버디트(inverted) W’라고 한다. 이렇게 던지면 상체의 큰 근육을 쓸 수 있어 구속을 높이는 데 유리하다. 반면 스윙이 전체적으로 커져 관절과 근육에 무리를 가한다는 반론도 있다.

그래도 ‘인버트 W’ 자세가 편한 투수도 있을 것이다. 젊을 때는 가능하겠지만, 유연성이 떨어지는 나이가 되면 위험해진다고 본다. 지난해 스트라스버그는 커브와 체인지업 비중을 늘리는 등 변화를 시도하며 데뷔 후 가장 많은 이닝(209)을 던졌다. 그러나 올해 또 부상을 입었다.

강속구는 선수의 무기이자. 팀의 자산이다. 유용한 만큼 위험하다. 투수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돕는 게 나의 중요한 연구 과제다. MLB처럼 선수 자원이 풍부하지 않은 KBO리그에서는 정말 중요한 일이다.

투수마다 가장 잘 맞는 폼을 찾아주는 건 선배로서, 코치로서, 감독으로서 나의 임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서 국내 전문의와 MLB 트레이너들로부터 조언을 받았다. 그 결과 코치, 트레이너, 의사 등 3개의 파트가 긴밀하고 유기적으로 협력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감독 시절 난 트레이닝 파트를 일본인에게 맡겼다. KBO리그보다 더 체계적인 지식을 갖고 있다고 판단해서였다. 최근에는 MLB 구단들이 일본식 트레이닝에 미국식 의학을 결합한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MLB 구단은 담당 의사나 트레이너가 바뀌어도 변치 않는 시스템이 있다. MLB는 트레이닝을 컨디셔닝(conditioning)과 스트렝스닝(strengthening·보강)으로 나누는데, 파트별로 3~5명의 담당자가 있다. 부상자가 많으면 인력을 더 충원한다. 부상 치료는 병원에서 하지만, 부상 예방은 구단에서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다.

MLB는 선수의 모든 트레이닝 데이터가 축적돼 있다고 한다. 러닝 시간, 역기 무게만 봐도 피로도와 부상 위험을 알 수 있는 수준이다. MLB 팀들은 정확한 트레이닝 데이터를 얻고, 선수의 피로 회복을 돕기 위해 비싼 장비도 아낌없이 구입한다. 고가의 자유계약선수(FA)를 사들이는 것보다 훌륭한 코칭·트레이닝 시스템을 갖추는 게 훨씬 효율적이고, 지속 가능하기 때문이다.

국내 최고의 전문의들을 만나 재활의학에 대해 배울 기회가 있었다. 그분들 강의를 듣고 놀랐던 점은, 훌륭한 투수 코치와 전문의가 하는 말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전문의들은 ▶다치기 직전까지 훈련하면 최고가 될 수 있다 ▶트레이닝 데이터를 통해 선수들의 수치(훈련 기록) 변화를 파악하라 ▶야구는 비대칭 운동이기 때문에 반대 방향 운동(우투수라면 좌투수 자세)을 최소 3분의 1 이상 하라 ▶투수의 경우 상체가 뒤로 젖혀지면 안 된다 ▶던질 때 어깨와 팔꿈치가 수평을 이뤄야 한다고 조언했다.

무엇보다 모든 선수의 신체 능력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 최적의 훈련법과 운동량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를 위해서 코치와 트레이너, 의사가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면서 선수를 보호·강화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강속구는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다

인간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다”는 말을 좋아한다. 마라톤에서 2시간의 벽, 육상 100m에서 10초의 벽이 깨졌다. 2010년 미국 스포츠의학연구소 글렌 플레이직 박사는 “인간이 던질 수 있는 최고 속도는 시속 100마일”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가 설정한 이 한계를 MLB 투수들은 이미 넘어섰다.

플레이직 박사는 “100마일보다 빠른 공을 던지면 팔꿈치 인대가 견디기 어렵다”고도 했다. 나는 100마일이 한계라는 말보다 이 말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체격이 커지고, 근육이 강해지고, 관리를 잘 받으면 더 빠른 공을 던질 수 있다. 그러나 인대와 관절 강화에는 한계가 있다. 강속구의 시대에 부상 위험이 커지는 이유다. 그렇기에 투수에게는 ‘최고 구속’보다 ‘강속구를 지속적으로 던질 수 있는 폼’이 중요하다.

투수의 본질은 강속구를 던지는 게 아니라, 타자를 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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