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제환의 메디치家 리더십] (19) 로렌초 암살 위기 | 복수에도 절차 있다..先시민 지지 後단죄


1478년 4월 26일 오전, 두오모 성당에서 미사에 참여하고 있던 로렌초 동생 줄리아노는 단검으로 12군데나 찔려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로렌초는 귀 뒤쪽에 가벼운 상처만 입고 성당 내의 북쪽 성구실로 피신해 간신히 살아남았다. ‘파치 가문의 음모(Congiura dei Pazzi)’로 알려진 이 사건은 29세의 혈기 왕성한 지도자 로렌초에게 닥친 최대 위기였다.
이 음모 배후에 2명의 지도자가 있다. 성무는 뒷전이고 친족 챙기기에 골똘한 교황의 사적인 욕망, 그리고 메디치 가문에 대한 복수심과 권력욕에 눈먼 파치(Pazzi) 가문이다. 피렌체의 젊은 지도자 로렌초는 이들로부터 국가를 지켜내야만 했다. 교황과 파치 가문의 사적인 욕망, 그리고 로렌초의 공적인 책무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이 사건은 일어났다. 비록 동생을 잃기는 했지만, 로렌초는 이들로부터 국가를 지켜냈다. 지도자가 공적인 책무를 수행할 때 시민의 지지와 절차의 정당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젊은 지도자 로렌초로부터 배운다.
교황의 세속적 욕망과 로렌초의 공적인 책무 사이의 충돌

교황 식스투스 4세는 경건함과 청빈, 그리고 학식을 갖춘 성직자로 존경받아 교황으로 선출됐다(재위 기간:1471~1484년). 하지만 교황좌에 오르자마자 한 손에 칼을 쥐고 다른 손에 성경책을 든 세속군주로 변신했다. 교황은 조카 사랑이 남달라, 6명의 조카 모두에게 주홍색 추기경 모자를 씌워 성직으로 녹봉을 받을 수 있게 해줬다. 그중에서 조카 지롤라모 리아리오(Girolamo Riario)를 유독 사랑했다. 이 조카를 이몰라(Imola)라 불리는 지역 영주로 봉하려 했다. 교황이 이몰라를 사들이려면 금화 4만개가 필요했다. 교황은 교황청 금고를 운영하던 메디치 은행에 대출을 요구했지만, 로렌초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로렌초가 이미 전략적 요충지인 이몰라 지역을 사들이려고 공을 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노한 교황은 메디치 은행이 운영해오던 교황청 금고의 독점 운영권을 해지한다(1474년 7월). 교황은 파치 은행에 교황청 금고 독점 운영권을 넘겨주고 파치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아 이몰라 영토를 사들인다.
교황의 로렌초에 대한 반감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476년 10월, 교황은 프란체스코 살비아티(Francesco Salviati)를 피사 항구를 관할하는 대주교에 임명했다. 피사 항구는 피렌체의 유일한 무역 항구였다. 피렌체 경제에 상당한 영향을 주는 이 문제를 교황은 로렌초와 한마디 상의도 하지 않고 진행했다. 교황이 프란체스코 살비아티를 피렌체 대주교에 임명하려 했지만 로렌초의 반대로 한 번 무산된 적이 있어, 사적인 앙금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렌초가 항의했지만, 교황은 “로렌초가 일개 시민이고, 내가 교황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주기 위해 쇠붙이(칼)를 쓰게 되더라도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다!”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분개했다. 조카에게 영주 자리를 쥐어주고, 측근을 피렌체 속국인 피사 대주교로 임명하려는 교황의 사적인 욕망과 피렌체 영토와 무역로를 확보하려는 로렌초의 공적인 책무가 충돌한 지점이다.
파치 가문의 사적 복수심과 가문을 지키는 로렌초 책무 사이 충돌
파치 가문은 제1차 십자군 전쟁 때(1088년), 이스라엘 성벽 꼭대기까지 오른 파초 파치 가문의 후손이다. 덕분에 기사 작위를 받았고, 피렌체 시민들은 파치 가문을 존경해왔다. 이 가문 후손들은 은행업과 비단 제조업으로 부자가 됐다. 할아버지 코시모는 이 가문이 메디치 가문에 위협이 될 것을 예상하고 로렌초 누이 비앙카를 파치 가문 아들과 결혼시켰다(1459년). 사돈 관계를 맺어 보험을 들어둔 셈이다.
약 20년이 지난 시점에 파치 가문과 메디치 가문 사이의 악연은 엉뚱한 곳에서 터진다. 피렌체의 부유한 집안인 지오반니의 딸과 파치 가문 남자가 결혼을 했는데, 며느리 집안에 아들이 없어 파치 가문이 거액을 상속받게 됐다. 로렌초 동생 줄리아노는 “만약 파치 가문이 이 재산을 다 가져가면 우리에게 큰 위협”이라고 로렌초에게 계속 주장했다. 이후 로렌초는 영향력을 행사해 파치 가문에 지오반니의 재산이 상속되지 못하도록 했다. 또한 파치 가문 사람들을 공직에 참여할 수 없도록 하는 법률까지 제정했다. 교황청 금고 관리 독점권이 있고 교황의 후원을 받고 있던 파치 가문은 로렌초 형제만 없애면 자신의 가문이 피렌체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여겼다.
교황의 친족 챙기기와 파치 가문의 사적인 복수심은 쉽게 동화돼 로렌초 형제 살해 동기가 됐다. 1478년 4월 26일 일요일, 사제가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종을 드는 순간 암살자들은 동생 줄리아노를 현장에서 살해했지만, 로렌초를 살해하는 데는 실패했다.
▶메디치家의 리더십
▷시민 지지를 먼저 얻고 절차 정당성 확보
동생을 잃고 분노한 로렌초는 당장 반란자들을 찾아 살해하려 했지만, 절차를 지키는 신중함을 발휘했다. 먼저 피렌체에서 영향력이 있는 시민 300여명을 시청사 2층에 소집해 복수의 정당성을 역설한다.
“우리 가문은 자존심과 탐욕을 멀리해 명예를 얻었지만, 파치 가문은 탐욕으로 명예를 잃었다. 나는 파치 가문을 증오하도록 만들겠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복수는 명백히 잘못한 자들에게 국한하겠다. 그리고 사적인 적대감과 공적인 불만을 혼동하지 않겠다. 만약 시민들이 나의 손을 잡아주신다면, 나는 당신이 원하는 어떤 일도 함께하겠다.”
로렌초는 시민 지지를 확보했고 재판을 거쳐 반란에 참가한 80여명을 교수형에 처해 피렌체 시청사 창문에 효시해놨다. 처형된 자 중에는 피사 대주교 살비아티, 파치 가문 수장 야코포도 있었다. 그리고 파치 가문에 ‘기억의 말살(damnatio memoriae)’ 정책을 적용했다. 이 정책은 고대 로마 시대부터 내려온 형벌로, 반대파 가문 문장과 이름을 지워 후손들이 기억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피렌체 역사에서 이보다 더 철저한 복수극은 없었다. 이 복수극을 두고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는 “로렌초가 젊은 혈기만 믿고 경솔한 행동을 했다”라고 기록했다. 로렌초는 불안정한 상태에서 지나치게 고조된 군중 열기가 삐끗하면 방향을 바꿔 다른 지배계층으로 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래서 시민 지지를 먼저 얻고, 재판을 통해 복수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시민들은 “메디치 만세(Palle! Palle!)”를 큰 소리로 외치며 거리를 행진하는 식으로 메디치 가문 복수극을 지지했다.
[성제환 medici60@naver.com 석좌교수·JB문화공간 대표]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71호 (2020.08.12~08.18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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