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한 박사의 '당신이 모르는 三國志'] 황건적의 난이 실패한 이유-시대 흐름 읽지 못하고 한나라 힘 과소평가

2020. 7. 27.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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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8호부터 매경이코노미는 임용한 박사의 ‘당신이 모르는 三國志’를 연재합니다. 역사학자 임용한 박사는 충북대 연구교수를 거쳐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현재 유튜브 채널 ‘임용한의 진짜 삼국지’를 운영 중 입니다. ‘전쟁과 역사’ ‘세상의 모든 전략은 전쟁에서 탄생했다’ ‘한국고대전쟁사’ 등 다수 저서가 있습니다.

소설 삼국지는 보통 황건적의 난에서 시작한다.

과거에 낙방하고 실의에 빠져 있던 장각이라는 유생이 어떤 도인에게 ‘태평청령서’라는 비서를 받는다. 이때부터 신통력을 얻은 그는 태평도라는 교단을 창설한다.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병자를 치료하면서 명성을 얻고, 교세를 확장해서 수십만 신도를 거느리는 교주가 된다.

역사적으로 중국 농민반란은 종교 조직을 기반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종교는 기독교를 변형한 태평천국을 제외하고는 거의 도교였다. 태평천국이라는 이름도 태평도와 천국의 혼합이다. 황건적의 난은 이런 의미에서 선구적인 사건이었다.

장각은 허베이(하북)성 쥐루(거록) 출신이다. 장각은 실존 인물이지만 한나라 때는 과거제도가 없었다. 소설과는 다르게 태평도를 창설하는 과정 역시 알려진 바가 없다. 교리도 모른다. 병자가 찾아오면 죄를 회개하게 하고, 부적을 태운 신성한 물을 마시게 했다고 한다.

다만 후한 말 세상이 어지러워지면서 이런 신흥 종교가 창궐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돼 있었다. 장각은 허베이, 허난(하남)성 일대에서 교세를 넓혔다. 한중 지역에서도 장로를 교주로 하는 ‘오두미교’라는 신흥 교단이 태평도처럼 도교에 기반해 교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장로가 신앙단체를 기반으로 서서히 합법적으로 힘을 키워 한중의 왕과 같은 존재가 됐다면, 장각은 혁명적인 방법을 택했다. 장각은 교단을 조직하면서 1만명을 단위로 36개 방을 조직하고 수제자를 지휘자로 삼았다. 전체적인 조직을 여차하면 군사 조직으로 전환할 수 있는 구조였다. 그리고 두 동생 장보와 장량을 각각 지공장군과 인공장군으로 임명했다.

봉기일은 갑자년인 184년 3월 5일이었다. 오행사상에 입각해 한나라 색은 청색이고 청색 다음의 색은 황색이라고 해 노란색 두건을 둘렀다. 황건적이란 명칭은 여기서 유래했다.

거사 방법은 청주·서주·유주·기주·형주·양주·연주·예주 8개 주 군현에서 동시에 봉기해 관아를 장악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후대 어떤 봉기에서도 볼 수 없는 대담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필자는 장각의 봉기 방식을 대담함보다는 소심함의 결과로 본다. 반란은 규모가 크면 반드시 정보가 새나간다. 반란이나 봉기는 완전한 방법이 아니라 승부사적 용기가 필요하다. 장각이 구상한 8개 주는 나중에 원소와 조조가 화베이(화북)의 패권을 두고 관도대전을 벌일 때 두 사람 영토를 합한 규모였다.

아니나 다를까 낙양에서 봉기를 준비하던 마원의라는 자가 체포돼 봉기 계획이 누설된다. 놀란 장각은 184년 3월 5일 서둘러 지시를 내린다. 계획에 어긋났음에도 7주 28군에서 봉기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됐다. 이것만 보면 장각의 계획이 괜찮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전에 정보원들은 관아 체제가 허술하고 신도들을 동원하면 충분히 장악할 수 있다고 보고했을 가능성이 높다. 장각 입장에서는 잘 깔려 있는 교단 조직을 굳이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는 큰 실수였다. 관아 정복은 쉬웠지만 이후 후한 조정 대응은 녹록하지 않았다. ‘환관의 시대’였던 후한 말은 무능하다는 평가에도 반란군을 진압할 능력은 갖추고 있었다. 조정은 아직 남아 있는 유능한 인물로 즉시 반란 진압 팀을 꾸렸다.

대장군 하진은 능력보다 하태후의 오빠라는 배경이 작용했지만, 환관이 황실 외척에게 대권을 맡겼다는 데 의미가 있다. 황보숭과 주준을 장군으로 임명하고 낙향해 있던 노식을 불러들였다. 동시에 환관에게 대항한 관원들에게 내렸던 금고령을 해제했다. 지방과 농민의 반란을 막기 위해서는 지방 호족, 사대부 세력과 손을 잡아야 했다.

주준은 즉시 하비현 승으로 재직 중이던 손견을 좌군사마로 등용했다. 10년 전 손견은 겨우 1000명의 병력으로 회계현에서 봉기한 수만의 도적을 처부순 적이 있다. 썩고 무능한 조정이었지만 그래도 인재를 기억하고 있었다. 손견은 주준의 휘하에서 맹활약을 한다.

황보숭, 주준, 노식은 장각의 근거지인 현재 허베이·허난성을 나눠 맡아 공략했다. 승패는 일찍 갈렸다.

184년 6월 황보숭이 허난성 황건군을 괴멸하고 허베이성 남부도 격파했다. 주준은 허난성 동부에서 남부로 쓸고 내려와 11월에 남양군을 함락했다. 노식은 허난성 남부에 있는 광쭝현으로 진군해서 장각을 포위했다. 운 좋게도 장각은 황건적의 종말을 보지 못하고 병사했다.

음모론을 좋아하지 않지만 장각은 살해됐는지도 모른다. 그는 반란을 지휘할 군사적 재능이 없었다. 애초에 그는 종교적 지도자에 불과했다. 반란의 기획부터 운영까지 배후의 인물이 지휘했을 수 있다.

유력한 배후 인물은 두 동생 장량과 장보인데 두 사람은 각기 그해 10월, 11월에 살해됐다. 조정은 12월에 황건적 난의 종식을 선포한다. 황건적의 난은 중국 역사에서도 많이 알려진 반란이지만 유명세에 비해 오래 버티지 못했다. 불과 8개월 만에 진압이 완료됐다. 애초에 봉기 방법이 잘못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8개 주에 강력한 교단 조직이 있는데, 이 방법을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이런 방식이 장점을 살리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왜 자신의 장점을 버리고 힘든 방법을 선택하겠는가.

이것이 수많은 리더가 저지르는 실수다. 포교 조직을 반란에 이용한다 해도 포교와 반란은 엄연히 다르다. 포교는 감성을 만족시켜야 하고, 전쟁은 감성을 거슬러야 한다.

전쟁의 핵심 포인트는 힘의 집중이다. 36만명 신도를 자랑했지만 36만명을 28개 군현에 흩어놓으니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정부군이 재빠르게 영역을 나눠 남북으로 휩쓸자 각개 격파되고 말았다.

한 기업이 새로운 업종에 도전한다고 하자. 기존 인력을 사용하는 것은 좋지만 기존 업종의 방법까지 가져가서는 안 된다. 양자 차이를 먼저 확실히 인지하고 창의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의외로 많은 기업이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실수를 저지른다. 장각 또한 그랬다.

두 번째 잘못은 더 크다. 반란은 시대의 흐름을 읽어야 한다. 장각은 400년 역사를 이어온 한나라의 저력을 과소평가했다.

후한 말 진짜 황건적의 난은 황건적이 소탕된 후에 벌어진다. 황건적 이름을 빌려 전국에서 민중봉기가 발생했다.

타이항산(태항산)의 흑산적, 산시(산서)성의 백파적, 나중에 조조의 주력군이 되는 산둥(산동)성의 청주적은 그 수가 100만명을 헤아렸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황건적이 전국에 횡행했다. 한나라는 여기서 끝이 났다. 각지 황건적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야심 찬 관료나 호족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다.

이 과정에서 삼국지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무대가 마련된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68호 (2020.07.22~07.28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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