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상의 시시각각] 음모론은 힘이 세다

이현상 2020. 5. 8.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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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 양극화할수록 음모론 득세
논리와 이성의 입지 점점 좁아져
이참에 비합리적 세력과 정리를
이현상 논설위원

‘양털깎기 이론’이란 걸 들어보셨는지. 로스차일드 가문 같은 유대인 자본이 아시아·남아메리카·동유럽 등에 저금리 자금을 푼다→돈이 돌고 경제가 커진다→갑자기 돈을 거둬들여 경제 위기를 일으킨다→자란 양털 깎듯 헐값에 알짜배기 기업과 자산을 손에 넣는다. 쑹훙빙의 저서 『화폐전쟁』에 나오는 국제금융 음모론이다. 1997년 한국이 당한 아시아 외환위기가 전형적 사례란다. 황당무계하지만 단순명쾌하다. 속절없이 경제 붕괴 현장을 지켜봐야 했던 한국인들의 억울한 심경을 달래주기도 했다.

대개의 음모론은 패배자의 정신 승리다. 세상에는 숱한 음모론이 있지만, 실제로 드러난 것은 손꼽힐 정도다. 그렇지만 음모론은 힘이 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설명해 주는 ‘치트 키’다. 힘 있는 누군가가 일을 꾸몄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인지 부조화의 문제가 단번에 해결된다.

“관내 투표함은 모두 CCTV로 볼 수 있다. 불 켜놓고 CCTV를 틀어놨는데도 조작할 수 있나.” “그렇다.”

“관외 투표를 옮기는 우정사업본부가 동원됐단 이야기인가.” “갑자기 (우체국에서) 알바처럼 보이는 소녀들이 나왔다.”

이준석 통합당 최고위원의 제안으로 열린 총선 사전투표 조작설 토론회 장면이다. 패배의 충격이 컸긴 컸나 보다. 조작 확신 앞에는 아무리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반박도 소용없다. 극우 유튜버들의 ‘코인팔이’(돈벌이) 소재 정도로만 여겨졌던 투표 조작설이 의외로 힘을 얻고 있다. 희극인가 비극인가.

논리로 음모론을 이기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훌륭한 음모는 증명할 수 없어요. 증명할 수 있다면 망한 음모죠(영화 ‘컨스피러시’의 대사).” 이들을 깨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상식이다. 손가락 하나로 양심 고백이 가능한 SNS 시대에 음모에 동원된 숱한 사람들이 입을 다무는 것이 가능한가. 21세기 대한민국이 시황제의 무덤을 감추기 위해 인부들을 그대로 묻어버렸다는 중국 진나라 시대쯤 되는가.

이들의 주장을 코미디쯤으로 여기면 그만이지만 우리 사회가 어느덧 ‘음모론 공화국’이 된 것은 씁쓸하다. 2012년 대선 후 방송인 김어준씨는 ‘비밀의 숫자 K’라는 그럴듯한 개념으로 영화까지 만들었다. 숱한 현 여권 인사들이 이 음모론에 동조했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며 비판했던 한 진보 인터넷 언론은 진보 진영 자해라는 비판까지 들어야 했다. 세월호 참사, 천안함 폭침, 국정농단 등 굵직한 사건마다 사람들은 그 뒤에 무슨 음모가 없을까 눈을 반짝였다.

우리 현실을 뒤흔들며 깊은 골을 남긴 음모론은 지금도 눈앞에 있다. 검찰의 정치적 욕심이 조국 일가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음모론에는 평소 그럴 것 같지 않은 지식인들까지 가세했다. 서초동과 광화문으로 사회 구성원의 사고와 가치관을 갈라놓았고, 총선이 끝나서도 현실 정치의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누가 진실을 말하는가』의 저자인 미국 하버드대 캐스 선스타인 교수는 “사회가 이념적으로 양극화되면 음모론이 기승을 부리기 마련”이라고 말한다. 이를 ‘가짜뉴스’라고 억누르려는 시도는 소용도 없고 위험한 일이다. 다양한 생각과 주장이 유통되는 가운데 저절로 걸러지길 기대하는 수밖엔 없다. 그게 우리가 사는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의 원칙이다. 물론 그 전제는 집단에 휘말리지 않고 자유롭고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개인이다. 지식인들마저 너무나 쉽게 음모론에 넘어가고, 심지어 이를 확대 재생산하는 사회는 분명 위험하다.

터무니없는 투표 조작설이 아주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이런 주장을 합리적 보수와 극단 세력을 가르는 일종의 시금석으로 삼는 건 어떨지. 보수의 권토중래를 위해서라도 필요한 ‘이념의 구조조정’이다. 그런데 왜 미래통합당은 “선관위가 밝힐 일”이라며 어정쩡한가. 혹시나를 바라는 건가.

이현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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