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사 대신 '제2 견생' 찾았다..철장 벗어난 29마리 실험비글
안락사 대신 쉼터에서 치료·돌봄 받아

망설이던 비글 한 마리가 케이지 밖으로 첫 발을 떼는 순간, 지켜보던 사람들 사이로 "아"하는 탄성이 흘렀다. 비글은 철망으로 된 문이 열리자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응시했다. 나무바닥 냄새가 익숙하지 않은 듯 한참 동안 맡았다.
케이지 밖으로 수 차례 발을 뺐다넣다 반복하던 비글은 마침내 뭉툭한 발을 뻗었다. 평생 연구소에서 머물러온 비글의 발은 발가락 사이가 벌어져 있었다. 철장 바닥 사이에 빠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버터왔기 때문이다.
'세계 실험동물의 날'(4월 24일)을 나흘 앞둔 20일, 충남 논산시의 ‘비글구조네트워크논산쉼터’에 비글 29마리가 도착했다. 생후 30개월인 이들 비글은 국내 모 연구기관의 실험실에서 동물 실험에 쓰이던 개들이다. 실험에 쓰인 비글은 안락사되는 게 일반적이지만, 해당 기관은 쉼터 측에 이들을 기증했다. 비글로선 제2의 삶을 얻은 거다.

이들 29마리의 실험용 비글들이 어떤 삶을 겪어 왔는 지 알 수 없다. 해당 연구기관은 비글을 쉼터에 기증하면서 출처 등을 공개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사람이 사용하는 의약품은 물론 농약, 식품 등 상당수 제품은 동물 실험을 거친다.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점검하기 위해서다.
작고 야무진 체구에 사람들을 좋아하는 비글은 동물 실험에 많이 쓰인다. 국내에서 동물실험에 쓰였다가 희생되는 실험 비글은 한 해 약 1만 5000마리로 추산된다. 이날 논산쉼터를 찾아온 비글 29마리는 지금까지 국내에 진행된 실험견 기증 사례 중 최대 규모라고 쉼터 측은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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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장서 나온 비글…30개월 만의 자유

오후 1시부터 논산쉼터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비글구조네트워크(비구협) 직원과 자원봉사자 20여명이 분주히 이동장을 닦았다. 실험실에서 나온 비글의 적응을 위한 배려다. 29개의 이동장 문이 열린 뒤에도 한참 망설이던 비글들은 신나게 뛰어놀기 시작했다.
이들 비글은 모두 한 연구기관에서 왔지만 각각 철장 안에서 생활해 사실상 '초면'이다. 개들은 서로 냄새를 맡으며 인사했다. 봉사자가 팔을 벌리면 꼬리를 치며 반갑게 안겼다. 그 새 '영역 표시'를 하는 비글도 있었다. 봉사자들은 "지난번에 온 비글보다 더 활발한 것 같다"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봉사자들은 관찰을 토대로 비글의 그룹을 나눴다. 성향이 비슷한 개들끼리 한 방을 쓰게 하기 위해서다. 정부윤 비구협 실험동물분과장는 “얌전하다가도 자신의 공간이 생기면 영역 다툼으로 싸우는 경향이 있어 비슷한 비글끼리 나눠야 한다”고 설명했다.
방 배정이 끝난 뒤 건강검진을 했다. 뛰어놀던 비글도 치료를 위해 들면 금새 얌전해졌다. 각종 백신주사를 놓을 때도 비글들은 마찬가지다.
정 과장은 동물실험을 하며 훈련된 습관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사람손이 닿으면 실험비글들은 약속이라도 한듯 다 얼음이 된다”며 “실험동물 교육에서는 '스테이(stay) 자세'라 하는데, 연구원을 물지않고 실험을 할 수 있게 태어나자마자 훈련받기 때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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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비글, 연구원 정들까봐 '못 생기게' 품종개량

비글이 동물실험견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이유는 관리가 쉬운 단모종의 중형견이라는 점과 사람을 좋아하는 특성 때문이다. 실험 비글은 실험 뒤에도 연구원을 보면 꼬리를 치며 반가워한다. 생후 2~3개월부터 연구에 적합한 실험 동물로 훈련된 비글은 대부분 안락사된다.
일반 비글은 동물 실험에 쓰이지 않는다. 품종개량으로 유전적으로 건강한 비글만 실험견이 된다. 비구협 유영재 대표는 “실험 비글과 일반 비글은 멀리서도 구분할 수 있다. '못 생겼다'는 평에 동의하고싶진 않지만 실험 비글은 연구원들이 실험하다 애착 관계가 형성될 수 있어 못 생기게 품종개량을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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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플란트·농약 실험도 겪어…PTSD 장애 앓기도
실험 비글은 농역 실험이나 외과적인 수술에 많이 이용된다. 치의대의 치아 임플란트 실습을 위해서도 사용된다. 보호소로 온 비글 중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앓는 경우도 있다. 같은 공간을 반복해서 도는 '써클링'이 대표적인 증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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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한 연구기관 "치료비 절반 부담"

“오늘 29마리의 비글이 구조됐지만 아마도 지금 그 연구원들의 마음도 구조됐을 거라고 전 생각해요.”
논산쉼터에서 비글을 맞이한 유 대표는 이렇게 답했다. 이날 비글을 기증한 연구기관은 이들을 치료하는 데 드는 비용의 절반 가량을 부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비구협은 행동전문수의사 지원을 받아 실험실에서 나온 비글들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연국기관이 기증하는 비글의 치료비를 내겠다고 밝힌 건 이번이 처음이다. 유 대표는 “연구원들이 직업으로 비글들을 대한다 하더라도 30개월을 같이 정을 나눴을 것”이라며“연구원들도 동물실험 후 안락사가 되어야 할 아이들에게 또다른 삶의 기회를 준 것을 기뻐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연수기자 choi.yeonsu1@joon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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