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근영의 숨은그림찾기] 83세 호크니의 '그림 그리기 좋은 때'

2020. 4. 21.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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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근영 JTBC 스포츠문화팀 기자

“겨울나무를 그리고 있었는데, 결국 꽃이 피었지 뭐에요.” 3월 초 프랑스 노르망디에 간 영국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83)는 코로나19로 발이 묶여 버렸습니다. 봄이 오는 걸 그리러 간 참이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매일 아이패드를 들고 밖에 나가 그림을 그렸고, 그중 몇 점을 영국 BBC에 공개했습니다. 나뭇가지에서 돋아나는 연둣빛 새순, 노랗고 흰 꽃송이…. 수선화 그림에는 ‘기억하세요, 봄은 꼭 옵니다’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흙에서 새싹이 움트고, 양동이에 담긴 식물들이 저마다 형형색색의 꽃을 피워내는 이 그림(사진)도 그중 하나입니다. 가둬 둔 양동이에도 봄은 옵니다. 근심 가득한 세상에 경쾌한 꽃그림을 내놓으면서 호크니는 “예술은 스트레스를 완화할 수 있어요. 스트레스는 미래의 뭔가를 걱정하는 건데, 예술은 지금의 일이니까요”(영국 가디언, 지난 4일자)라고 했습니다.

호크니는 성실한 관찰자입니다. 기교보다 관찰, 잘 봐야 잘 그릴 수 있다는 것을 평생 보여줬죠. 외눈박이 카메라가 찍어 내는 평평한 세상과 달리 그의 그림은 그곳의 공기까지 체험하고 난 뒤 담아내는 세계였습니다. BBC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자연의 일부임에도 어리석게도 자연과 접촉하는 방법을 잊었고, 자연 밖에 있는 줄 압니다. 코로나도 언젠가는 끝나겠죠, 그 뒤에는 뭐가 올까요? 우리는 뭘 배울 수 있을까요?” 질문했습니다. 세계대전도 겪어 본 1937년생 노화가의 말입니다.

데이비드 호크니가 격리생활 중에 아이패드에 그린 그림

밀폐된 실내를 피해 사람들이 밖으로, 공원으로 나오는 때입니다. 남들처럼 격리 상태인 화가는 지금이 그림 그리기 딱 좋은 때라고 합니다. “뭔가 관찰하고,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보이는지 생각하세요.”

연필이든, 본인처럼 아이패드의 ‘브러쉬즈(Brushes)’ 앱이든, 손에 잡고 그려보라고, 거기서 위로를 얻고 자연과 새롭게 만나라고 합니다. 호크니는 2010년 아이패드 출시 때부터 이 새로운 스마트 기기를 활용해 그림을 그렸습니다.

83세라는 나이가 잘 와 닿지 않는 분들은 85세에 세상을 뜬 앙리 마티스(1869∼1954)를 떠올려 보세요. 마티스는 관절염이 심해지자 손에 붓을 묶어 그림을 그렸고, 이마저도 안 되자 색종이를 오려 붙였습니다. 아이들 장난 같은 종이 오리기가 얼마나 위대한 예술로 남았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더이상 붓을 잡지 못하는 화가가 83세에 오려 붙인 종이는 한층 단순화된 형태, 경쾌한 색채로 여전히 삶을 찬양합니다. 그러니 초보 예술가인 우리도 이면지든 색연필이든, 손에 잡히는 것으로 그려보면 되겠습니다.

본의 아니게 삶에 대한 성찰이 깊어지는 때입니다. 격리의 시기는 지나가고 꽃도 지겠지만, 뭔가를 한참 들여다보고 기록해 본 흔적은 남을 테니까요.

권근영 JTBC 스포츠문화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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