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사업 성공은 이름부터..社名 변경의 경제학

재계에 사명(社名) 변경 바람이 불고 있다. 낡은 회사명을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은 이름으로 바꿔 변화와 혁신을 추구하자는 취지에서다. 사명에서 아예 업종 이름을 떼거나 한글 대신 영문으로 변경하는 기업이 부쩍 늘었다.
물론 사명 변경이 반드시 긍정적인 효과만 주는 것은 아니다. 애매모호한 영문명을 쓸 경우 소비자 입장에서 무슨 일을 하는 회사인지 헷갈려 혼란을 줄 우려가 크다. 사명 변경에 소요되는 비용도 만만찮아 기대효과는커녕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도 흔하다.

▶사명 변경 나서는 기업들
▷4차 산업혁명 대비 업종 이름 떼기도
기업이 사명을 바꾸는 유형은 다양하다. 첫째,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사업 다각화를 위해 사명을 변경하는 경우다.
SK그룹은 올 들어 계열사 사명 변경 작업에 돌입했다. 급변하는 경영 환경 소용돌이 속에서 기존 사명으로는 ‘딥 체인지(근본적 변화)’를 추진하기 어렵다는 최태원 SK그룹 회장 지적에 따른 것이다. SK텔레콤, SK에너지, SK종합화학 등 사명에 업종명을 붙이면 기업 이미지가 특정 업종으로 제한된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이미 산업 간 경계가 무너진 상황에서 업종 이름을 사명으로 고집하는 것은 의미 없다는 얘기다. 최 회장은 지난해 임직원과의 행복토크에서 “과거에는 자랑스러운 이름이었지만 지금은 사회적 가치와 맞지 않고 환경에 피해를 주는 기업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며 사명 변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SK그룹이 사명 변경 이정표로 삼는 곳은 SK이노베이션이다. ‘혁신’이라는 의미를 사명에 담아 미래지향적이면서 유연한 회사라는 점을 강조한 덕분이다. SK이노베이션은 SK에너지, 종합화학, 루브리컨츠, 인천석유화학, 트레이딩인터내셔널, 아이이테크놀로지 등을 자회사로 거느리면서 다양한 신사업을 추진해 매출 50조원이 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를 참고 삼아 SK텔레콤은 사명에서 텔레콤을 떼고 초연결을 뜻하는 ‘SK하이퍼커넥트’로 변경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통신, 미디어, 보안 등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SK에너지, E&S, 브로드밴드 등 다른 기업도 사명에서 업종명을 떼는 방안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화그룹 핵심 계열사인 한화솔루션도 SK이노베이션과 비슷한 사례다. 한화솔루션은 한화그룹의 태양광, 석유화학, 첨단소재 등 3개 부문을 통합해 올 초 공식 출범했다. 김희철 큐셀부문 대표, 이구영 케미칼부문 대표, 류두형 첨단소재부문 대표가 각 부문을 책임지는 3인 각자대표 체제로 운영된다.
새 사명인 ‘솔루션’은 갈수록 경영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주요 사업을 통합해 새로운 솔루션(해결책)을 제시하겠다는 의미를 담았다. 글로벌 시장 1위로 도약한 태양광 사업과 그룹 주력 분야인 석유화학, 첨단소재 사업을 통합해 시너지 효과를 높이겠다는 포부다.
둘째, 기업 이미지 변신을 위해 사명을 바꾸기도 한다. 주로 타이어, 해운, 상사 등 전통 산업에서 이런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한국타이어그룹 지주사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는 지난해 사명을 ‘한국테크놀로지그룹’으로 바꿨다. 핵심 계열사 한국타이어는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로 변경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기존 타이어 산업을 넘어 새로운 사업 영역에 도전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한국타이어 측 얘기다. 글로벌 자동차 시장 불황으로 타이어 산업도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타이어 이외 신사업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국내 1세대 자원 개발업체 삼탄은 최근 사명을 ST인터내셔널로 바꿨다. 삼탄은 1993년 인도네시아 파시르 유연탄 광산 개발에 성공하면서 큰돈을 벌어 자원 개발 전문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석탄 생산량이 점점 줄어드는 데다 세계적으로 석탄산업이 사양화되면서 사명 변경을 통해 이미지 쇄신에 나섰다. 최근에는 베트남 풍력발전, 북미 송유관 투자 등 신재생에너지, 에너지 인프라 투자에 주력하는 모습이다.
금융권에서는 KEB하나은행이 최근 사명을 하나은행으로 변경했다. 하나은행은 브랜드 관련 컨설팅, 고객 자문단 패널을 통해 ‘KEB하나은행’ 브랜드를 지속할지 검토해왔다. 그 결과 ‘KEB’가 발음하기 어렵고 국민은행의 KB와도 혼동된다는 점이 부각됐다. 대부분 고객도 은행명을 하나은행으로 불러온 만큼 하나은행으로 바꾸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다.
르까프, 케이스위스 브랜드를 보유한 화승은 최근 ‘디앤액트(DNACT)’라는 이름으로 옷을 바꿔 입었다. 디앤액트는 ‘꿈꾸라, 그리고 행동하라(Dream and Action)’는 뜻. 오리지널 스포츠 정신(DNA)과, 대한민국 대표 스포츠 기업으로 새로운 도약에 나서겠다는 의미를 담았다.
셋째, 글로벌 시장 진출을 위해 사명을 영문으로 바꾸기도 한다. 1990년대 당시 영문 사명 붐이 일면서 대기업마다 줄줄이 사명을 영문으로 변경했다.
럭키금성그룹은 1995년 LG그룹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룹명을 따라 계열사 상호도 대부분 바뀌었다. 금성사는 LG전자, 럭키화학은 LG화학이 됐다. LG그룹이 GS, LS그룹으로 쪼개지면서 사명이 또다시 변경되는 경우도 잦았다. LG그룹 건설사였던 LG건설이 GS그룹 계열사가 되면서 GS건설로 바뀐 것이 대표적이다. 이 밖에도 태평양이 2006년 사명을 아모레퍼시픽으로 바꿨는가 하면 포스코(포항제철), KT(한국통신), KCC(금강고려화학) 등 사명을 영문으로 바꾸는 사례가 쏟아졌다.
2017년 말에는 동부그룹이 그룹명을 DB로 변경했다. 동부그룹 사명이 바뀐 것은 1971년 동부고속운수(현 동부익스프레스)가 동부라는 사명을 처음 사용한 이후 46년 만이다. 동부가 사명을 바꾼 배경은 다른 그룹과는 조금 다르다. 동부그룹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동부건설이 계열분리되자 사명 변경을 검토해왔다. ‘동부’ 브랜드 상표권을 동부건설이 보유했는데 이 회사를 사모펀드 키스톤에코프라임이 인수했기 때문이다. 키스톤에코프라임은 동부그룹에 ‘동부’ 브랜드 사용료를 요구했고 동부제철, 동부팜한농 등 주요 계열사 매각 이후 그룹 분위기 쇄신이 필요했던 동부그룹은 사명을 DB로 바꿨다.
넷째, 사명을 짧고 간결하게 단순화하는 기업도 적잖다. 주로 IT 기업이 그렇다. 다음커뮤니케이션과 합병한 카카오는 ‘다음카카오’에서 ‘카카오’로 이름을 변경했다. “다음카카오라는 사명으로는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다. 모바일 정체성을 강화하고 기업 브랜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사명을 바꿨다”는 것이 카카오 측 얘기다.
NHN엔터테인먼트는 지난해 엔터테인먼트 꼬리표를 떼고 NHN만 남겼다. ‘엔터테인먼트’를 떼어내면서 기존 게임사업을 넘어 클라우드, AI(인공지능), 빅데이터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넓히겠다는 의지를 반영했다. 넷마블게임즈 역시 ‘게임즈’를 지워버렸다. 게임 이외 다양한 신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다. 이에 발맞춰 최근 국내 렌털업계 1위 업체 코웨이를 인수하면서 렌털 사업에 뛰어들었다.

▶해외 사례 살펴보니
▷애플·던킨·월마트 등 눈길
국내 기업뿐 아니라 글로벌 기업도 경영 전략을 바꾸거나 시장 확대를 위해 사명 변경에 나서는 경우가 많다.
미국 유통업체 월마트는 2017년 공식 법인명인 ‘월마트스토어즈’에서 스토어즈를 없앴다. 오프라인 매장을 뜻하는 ‘스토어즈’를 삭제하며 전통 오프라인 매장에 국한되지 않고 온라인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전략을 내세웠다. 식품기업 중에서는 던킨도너츠가 사명에서 ‘도너츠’를 지웠다. ‘도넛 전문 브랜드’ 이미지를 벗고 사업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다. 기름에 튀긴 도넛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인식도 영향을 줬다.
애플은 글로벌 기업 중에서도 사명 변경을 잘 활용한 사례로 손꼽힌다. 지난 2007년 故 스티브 잡스 애플 CEO는 세계 첫 번째 스마트폰인 아이폰을 소개하던 날 그와 동시에 기존 사명이던 ‘애플컴퓨터’에서 ‘애플’로 회사 이름을 바꿀 것이라 발표했다. 평범한 컴퓨터 제조업체에서 스마트기기 기업으로 변신을 꾀하며 내린 결정이었다. 사명 변경을 발표하던 당시 애플 매출 중 42%는 컴퓨터가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명 변경 이후 매출구조가 바뀌면서 실적이 날개를 달았다. 컴퓨터 분야는 애플 매출의 8%(지난해 4분기 기준)에 불과했다. 반면 아이폰 매출은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61%로 급성장했다. 애플 전체 매출은 지난해 4분기 기준 918억2000만달러(약 108조원)로 분기 사상 최대 실적을 거뒀다. 컴퓨터 제조업체에서 최첨단 스마트폰 기업으로 탈바꿈하는 데 사명 변경이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야심 차게 추진한 사명 변경이 별다른 효과를 내지 못한 사례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휴대폰 브랜드 ‘블랙베리’로 유명한 리서치인모션(RIM)은 2013년 회사 이름을 휴대폰 기기 이름과 동일한 ‘블랙베리’로 바꾸겠다고 발표했다. 새 모바일 플랫폼 ‘블랙베리 10’을 내놓으며 브랜드 가치를 회복하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블랙베리는 사명 변경 이후 애플, 삼성과의 경쟁에서 밀리면서 2016년 스마트폰 생산을 중단했다. 중국 스마트폰 제조사 TCL과의 계약마저 연장하지 않기로 결정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브라이언 블레어 웨지파트너 애널리스트는 “새 하드웨어 기기를 아무도 사지 않는 상황에서 시도한 블랙베리 사명 변경은 의미가 없다”고 지적했다.


▶사명 변경 오히려 독 될 수도
▷실속 없이 간판만 바꿔 달면 부작용
기업들이 너도나도 사명 변경에 나서는 배경은 뭘까. 전문가들은 ‘비즈니스 기회 확대’를 가장 큰 이유로 꼽는다. 박재현 한국브랜드마케팅연구소 대표는 “사명을 변경하면 비즈니스 기회가 커지고 회사 가치를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다. 만약 SK이노베이션이 기존처럼 ‘에너지’ ‘정유’ 등 석유기업 이미지의 이름을 밀고 나갔다면 2차 전지 같은 신사업 입지를 다지지 못하고 전통적인 사업구조에 머물렀을 것”이라고 말했다.
회사 이미지 회복에도 긍정적이다. “과거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기업이 이름을 바꾸면 소비자들이 느끼는 불쾌감을 줄일 수 있다. 또 고루하고 식상한 이름을 가진 회사가 사명을 세련되게 바꿀 경우 소비자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와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기 쉬워진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의 설명이다.
한편에서는 지나친 사명 변경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기업 핵심 사업 실적이나 재무건전성이 좋아지지 않은 채 사명만 바꿔서는 뚜렷한 효과를 보기 어렵다는 의미다.
실제로 코스닥 상장사 중에서는 바이오 업종으로 사명을 바꿔 다는 경우가 흔하다. 소형 공작기계 제조업체 유지인트는 사명을 ‘에이비프로바이오’로 변경했다. 이 업체는 신규 사업으로 항체신약 개발, 바이오 단백질 재조합 의약품 연구개발에 나섰다. 인쇄회로기판(PCB), 발광다이오드(LED) 사업을 해온 우리이티아이도 천연물 의약품 소재사업을 추진하면서 사명을 ‘우리바이오’로 바꿨다. 코스닥 상장사들이 사명을 바꾸는 것은 신사업 추진을 위해서라지만 단기 주가 부양을 겨냥한 조치라는 해석도 나온다. 오히려 사명을 바꿀 때 발생하는 과도한 홍보·마케팅 비용 탓에 실적 개선이 더뎌지고 주가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의견도 만만찮다.
오랜 기간 쌓아온 브랜드 가치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점도 문제다. 일례로 지난해 일본제철로 사명을 변경한 신일철주금(新日鐵住金)의 하시모토 에이지 사장은 “ ‘일본’이라는 이름을 다시 사용한 것은 세계 속에서 성장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일본제철’이 제국주의 시대에 사용하던 사명인 만큼 제국주의 시대로 회귀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기업이 사명을 변경하면 기존 사명에 익숙했던 소비자들이 혼란을 느끼고 브랜드를 불신하게 된다. 이미지 쇄신 명목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동안 축적해온 회사 신뢰를 포기하는 일일 수 있다”고 꼬집었다.
[김경민·박지영·반진욱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 2046호 (2020.02.19~2020.2.25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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