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들 '핫플'인데 복지관 아니다..뭔가 다른 보건소 앞마당

한은화 2020. 1. 1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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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화의 공간탐구생활]
초고령 사회 노인을 위한 공간
시흥시 보건소 공터의 대변신
지난해 10월 오픈한 경기도 시흥시 '늠내 건강학교'의 모습. 보건소 자투리 공간을 활용해 만들었다.[사진 사이픽스]

2026년이면 한국은 인구의 20%가 65세 이상인 초고령 사회가 된다. 2000년께 인구의 7%가 65세인 고령화 사회가 된 지 26년 만의 일이다.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속도다. 초고령 사회를 향해 밟은 가속페달이 사회 구조를 바꾸고 있다. 그런데 공간은 어떨까. ‘나이 듦’을 감싸 안을 공간은 어떤 공간이며, 그런 공간은 충분히 마련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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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시흥시 대야동ㆍ신천동은 시흥시 전체 노인의 22%가 사는 대표적인 노인 밀집 지역이다. 지난해 10월 이 동네 노인들에게 ‘핫 플레이스’가 생겼다. 공식 명칭은 ‘늠내 건강학교’다. 시흥시 보건소 앞마당, 자투리 공간이 변신했다.

늠내 건강학교는 보이기 위한 디자인에 힘을 준 공간은 아니다. 노인에게 필요한 공간이 무엇인지 오랫동안 고민한 공간이다. 시흥시 보건소가 ‘공공디자인으로 행복한 공간 만들기 공모 사업’으로 따낸 예산 8억원으로 앞마당을 바꾸려고 한 것이 2018년이다. 보건소 측은 이 예산으로 흔히 보던 운동기구를 놓고 정자 쉼터를 두려다가 멈췄다. 그리고 국내 서비스 디자인의 선구자로 손꼽히는 이경미 사이픽스 대표를 찾았다. 그리고 물었다. 자투리 공간을 바꾸는데 1년 반이 걸리게 된 첫 질문이었다.

“예산도 적고, 공간도 작지만…. 어르신들을 위한 공간으로 어떻게 바꿔야 할까요.”(박명희 보건소장)

'늠내 건강학교'가 들어서기 전 공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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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표는 보건소로 달려가 리서치를 시작했다. 디자인의 첫걸음이다. 시흥시보건소ㆍ대야종합사회복지관 주변에 사는 노인들의 패턴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독거노인이 많아 복지관에서 제공하는 점심을 먹으러 오는 노인들이 하루 300명에 달했다. 이 대표는 “현장에서 종일 따라다니는 그림자 조사법을 해보니 어르신들이 주로 집과 복지관만 오갈 뿐 여러 군데를 다니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또 “좁고 어두운 방에 홀로 있거나,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에는 복지관의 좁은 로비에 옹기종기 모여 있어 어르신들에게 제3의 공간이 절실하게 필요했다”고 전했다.

그래서 앞마당에 냉ㆍ난방이 되는 가변공간을 만들었다. 동그란 트랙 위에 얹힌 세모 지붕 집이다. 폴딩도어를 열면 외부 공간처럼 바뀐다. 안쪽에 대형 오븐이 있는 주방이 있어 요리 교실을 열 수 있다. 화ㆍ목ㆍ금요일 오전 10시면 체조 교실을 연다. 체조 교실을 모두 참석해 연말에 출석 왕으로 뽑힌 성윤자(76) 씨는 “집에 혼자 있으면 외로워지는데 체조 교실에 꼬박 참석하면서 다리에 힘도 생겼다”며 웃었다.

냉난방이 되는 가변공간에서 열리는 체조교실.
봄동을 심은 온실의 모습.
흑경으로 만들어 얼굴을 비춰볼 수 있는 운동기구. 높낮이를 달리해 무릎을 굽혔다 펴는 식의 운동을 할 수 있게 디자인했다.

채소를 재배할 수 있는 온실도 있다. 공간마다 이유가 있다. 이 대표는 “어르신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운동ㆍ정서ㆍ영양ㆍ위생’이라며 “계절과 관계없이 운동할 수 있고, 서로 교류할 수 있고, 요리하며 영양도 챙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밖에 놓인 운동기구도 새롭게 디자인했다. 기억력과 유연성을 높이기 위해 번호가 매겨진 손바닥 그림이 잔뜩 있는 코너 ‘벽을 짚어보아요’, 하체 근력을 키우기 위해 계단으로 만든 ‘오르락내리락’ 등이다. 이 대표는 “일본 야마구치 현에 있는 노인주간 보호시설(데이케어센터) ‘꿈의 호수촌’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며 “시설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생활 공간처럼 친숙하게 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이 대표와 보건소 건강문화팀은 이 자투리 공간을 바꾸기 위해 지난해 2월 ‘꿈의 호수촌’을 다녀왔다. 꿈의 호수촌은 일본에서 우수 노인돌봄시설로 손꼽힌다. 야마구치 현에서 시작해 일본 전역에 10여개 지점을 운영하고 있다. 대만으로 관련 돌봄 프로그램을 수출하기도 했다. 이 대표는 “살아있는 것처럼 살게 하는 곳”이라며 “고령 친화 도시일수록 노인을 어딘가 따로 격리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사회에서 함께 늙어갈 수 있게 커뮤니티를 만들고 생활 훈련을 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일본 데이케어 센터 '꿈의 호수촌'의 내부 모습. 휠체어가 다닐 수 있는 경사로도 있지만 계단이 많다.
입구에 들어서면 볼 수 있는 스케줄표. 어르신들 스스로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정한다. [사진 사이픽스]

꿈의 호수촌은 멋있게 디자인된 곳이 아니다. 폐공장을 개조해 만들었는데 장애 없는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장애물이 많다. 바닥도 단차가 있고, 손잡이도 불편하고 계단도 많다. 집에서도 잘 생활할 수 있게 돕는 장치들이다. 그뿐만 아니라 하루에 시간별로 수백개의 프로그램이 돌아간다. 노인들은 아침에 꿈의 호수촌에 도착하면 자신의 하루 스케줄을 스스로 짠다. 스트레칭을 열심히 하거나 촌에서 기획한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면 가상화폐를 준다. 그 화폐로 요리 교실에서 요리를 배우거나 마사지를 받는 등 원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시흥시보건소 조민우 주무관은 “집처럼 일상생활을 하면서 사회와 어우러지게 하는 각종 훈련이 담긴 아이디어 공간이었다”고 말했다.

네덜란드 '드레이거스(De Reigershoeve) 케어팜'
네덜란드 드레이거스 (De Reigershoeve) 케어팜. [사진 사이픽스]

네덜란드는 정부 차원에서 농장형 데이케어센터를 활발히 지원한다. 이른바 ‘케어팜’으로 1997년 75개였던 것이 인구 1700만명의 나라에서 현재 1100여개나 된다. 등원하듯 오가는 곳도 있고, 아예 거주하는 곳도 있다. 노인들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만큼의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돌본다. 이 대표는 “노인성 질환을 겪고 있는 환자라기보다, 일꾼으로 인식하며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시스템을 갖췄다”며 “수확한 것들을 한쪽에서 팔기도 하고 팜끼리 물물교환도 하며 직접 요리해 먹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노인을 위한 요양 시설이나 기관이 침상 개수만 따지거나, 가격으로만 이야기되는 국내 현실과 사뭇 다른 풍경이다. 다시 늠내 건강학교로 돌아가면 학교는 이달부터 프로그램을 관리하는 전담 요원을 새로 뽑았다. 보건소의 윤현주 건강문화팀장은 “어르신들을 위한 공간에는 살뜰히 배려한 공간만큼이나 프로그램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어르신들이 고립되는 사회가 아니라 활발히 활동할 수 있게 돕는 공간으로써 모범 사례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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