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현장서 안 쓰는 '손 도면' 배우러 학원행..시대착오 건축사시험

천인성 2019. 11. 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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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차 베테랑도 시험 준비 위해
주말에 학원서 8시간 마라톤 수업
"'건축 실무 총괄' 취지와 동떨어져"
전문가 "전자·수작업 평가 나눠야"
건축물 설계도면을 손으로 그리는 모습. [사진 freepik]
지난 9월 건축사 시험을 치른 박모(43)씨는 대학 졸업 후 17년째 건축사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다. 하지만 시험을 위해 주말마다 학원에 다녔다. 손으로 도면을 그려 제출해야 하는 시험 방식 때문이다. 박씨는 “요즘 건축 설계할 때 누구나 컴퓨터 캐드(CAD)나 3D 도면 프로그램을 쓰는 데 유독 건축사 시험만 손 도면을 그리도록 하니, 결국 수백만원을 들여 학원에 가 배워야 했다”고 말했다.

‘건축 설계의 꽃’으로 불리는 건축사 시험에 대한 원성이 커지고 있다. 대학은 물론 실무 현장에서도 컴퓨터를 이용한 설계가 보편적인데, 손으로 설계도면을 그리는 방식을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험생들은 “시대착오적인 시험 방식으로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건축사는 건축물의 설계·공사감리 업무를 수행하는 국가 공인 전문자격이다. 1963년 건축사법이 제정되며 시작된 시험으로, 손으로 설계도면을 그리는 방식도 이때 시작됐다.
대학 건축학과 학생들이 컴퓨터 캐드(CAD) 프로그램을 이용해 설계 실습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시험에 응시하려면 최소 3년 이상의 실무 경력이 필수다. 그래서 대개 대학 졸업 후 5~10년 이상 현업에 종사한 30·40대가 응시자의 80% 이상에 이른다.

시험은 ‘대지계획’ ’건축설계1(평면설계)’ ‘건축설계2(단면설계 등)’ 세 과목을 총 9시간 걸쳐 치른다. 세 과목 모두 A3용지 크기의 답안지에 삼각자·막대자 등을 이용해 손으로 직접 그려야 한다. 지난해까지 최근 5년간 평균 합격률이 11.3%에 그칠 정도로 어려운 시험이다.

수험생 대부분 주중엔 건축사사무소에서 근무하고 주말엔 학원에서 하루 8시간 마라톤 강의를 듣는다. 대형 학원의 한 강좌 수강인원은 100~120명가량으로 190만원(9개월 과정) 정도가 든다.
최근 5년간 건축사시험 합격 현황.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수험생들은 “학교에서 배웠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실무에서 익힌 기술과도 한참 달라 학원에 다니지 않고선 시험 준비가 불가능에 가깝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 1월엔 청와대 국민청원에도 “건축사 시험을 개선해달라”는 주장이 올랐다.
2017년부터 세 차례 연속으로 시험에 응시한 차모(41)씨는 “학원에 가면 첫 시간에 강사가 우스갯소리로 ‘경력 20년 된 사람이나 1년 된 사람이나 손 그림을 못 그리는 건 똑같다’는 말을 한다”며 “수험생들 사이에선 ‘건축사 시험은 운이 100%’라는 말도 나오는데, 건축 실무를 총괄할 능력을 검증한다는 시험 취지와 동떨어진 것 아니냐”고 말했다.
수험생카페 운영자 민춘기 건축사는 “나도 15년간 실무를 했지만, 손으로 도면을 그리는 작업은 익숙하지 않다. 정부기관인 조달청도 모든 설계를 전자방식으로 납품하게 하는데 건축사 시험만 유독 수작업으로 도면을 그리게 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수작업에 익숙하지 않을뿐더러 채점 기준도 공개하지 않아 수험생들은 어쩔 수 없이 학원에 의존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건축사가 감리과정 중 설계도면을 펼쳐 확인하고 있다. [중앙포토]
건축학계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건축설계학회장을 맡은 이명식 동국대 건축공학과 교수는 “대학과 실무현장에선 거의 컴퓨터 설계를 하는데 시험 전자화가 한참 늦어진 측면이 있다”며 “다만 평가 항목 중 수작업 결과를 평가해야 하는 부분도 있는 만큼, 평가 기준별 과목을 세분화해 전자화하는 게 적절하다”고 말했다.
김현준 강원대 건축학과 교수는 “영국 건축사 시험에선 도면 그리기를 하지 않는다. 대학에서 건축학과를 졸업하면 설계에 대한 기본을 충분히 습득했다고 보는 것”이라며 “좋은 설계를 위해선 충분한 시간과 고민이 필요한데 학원에서 기계적으로 기술만을 익혀서 자격시험을 준비하는 현행 제도는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 9 월 서울 방배동 대한건축학회에서 국토교통부가 개최한 건축사자격시험 개선안 간담회. [국토교통부]
9월 국토교통부가 주관한 ‘건축사자격시험 개선 간담회’에서도 “(손으로 그려야 하는) 시험방식 때문에 우리나라 시험이 (다른 나라의 건축사 시험보다) 어렵다. 컴퓨터로 합리적인 문제를 내는 CBT 방식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시험 개선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건축사 시험을 위탁 운영하는 대한건축사협회 관계자는 “시험방식 변경 여부에 대해 답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수험생들에게 ‘컴퓨터로 시험 보게 해달라’는 요청이 많다. 내부적으로 컴퓨터를 활용한 시험 방법을 검토하기 위해 연구용역 발주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고석현·천인성 기자
ko.suk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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