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스캔들' 대해부..美 뒤흔든 추악한 스토리
정치 스릴러 영화보다 더 극적이고 추악한 스토리가 그 실체를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구 반대편 우크라이나에서 겹겹이 쌓였던 일들이 지금 미국 정치를 뒤흔들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한 탄핵 조사를 몰고 온 ‘우크라이나 스캔들’이다. 이 사건이 트럼프 대통령을 권좌에서 쫓아내는 역할을 할지, 의혹만 무성히 남긴 채 뚜껑을 덮을지 여부는 예측하기 힘들다. 이제 앞부분이 막 공개된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드러난 실상도 이해하기 벅차다. 다양한 목적을 가진 인간 군상들이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1막-두 개의 이야기가 한 곳에서 만난다
모든 사건에는 그 뿌리가 있다. 우크라이나 스캔들은 두 가지 갈래에서 시작된 물길이 한 곳에서 만난다. 먼저, 2016년 트럼프 대선 캠프에서 선거대책본부장을 지냈다가 쫓겨난 폴 매너포트의 이야기다.
2014년 2월 22일 친(親) 러시아 성향이었던 빅토르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당시 대통령이 3개월에 걸쳤던 반정부 시위로 축출됐다. 그로부터 2년 4개월 뒤, 트럼프 캠프에서 잘 나가던 매너포트가 유탄을 맞는다.
미 대선이 한창 불붙었던 2016년 6월 15일 뉴욕타임스(NYT)는 야누코비치의 비밀장부에 매너포트의 이름이 있다고 보도했다. 그가 정치 컨설팅 대가로 수년 동안 받은 돈은 6000만 달러(약 700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매너포트는 나흘 뒤 선대본부장에서 낙마했다.
민주당은 이 사건을 트럼프 진영을 물어뜯는 호재로 활용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국면에서 매너포트 사건이 터진 데 대해 우크라이나 당시 정부와 민주당이 내통했다는 의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다른 갈래는 민주당 유력 대선 후보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 부자에서 출발한다. 바이든의 아들 헌터는 2014년 5월 13일 우크라이나 가스회사인 부리스마의 이사가 됐다. 하지만 이 회사는 우크라이나 정부의 비리 수사 타깃이었다.
당시 부통령 신분이었던 바이든은 2015년 12월 8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를 방문해 “빅토르 쇼킨 검찰총장을 해임하지 않으면 10억 달러(약 1조 7000억원)에 대출 보증을 보류하겠다”고 우크라이나에 으름장을 놓았다.
이 부분이 가장 첨예하게 주장이 엇갈리는 대목이다. 오바마 행정부 인사들은 당시 우크라이나에서 만연했던 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국가들도 비리 인사였던 쇼킨 검찰총장의 경질을 요구했다고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아들 헌터가 이사로 있던 부리스마의 수사를 막기 위해 바이든이 부당한 외압을 가했다고 비판하는 상황이다. 쇼킨은 2016년 3월 29일 경질됐다.
2막-의심을 버리지 못한 트럼프, 커튼 뒤에서 뛴 줄리아니
대통령이 된 트럼프는 2017년 6월 25일 뜬금없는 트위터 글 하나를 올렸다.
“우크라이나는 트럼프 대선 운동을 방해했고, 힐러리를 띄우기 위해 은밀하게 움직였다. 그런데, 미 법무부 장관의 수사는 어디에 있는가.”
갑자기 우크라이나에 대한 수사를 미 법무부에 압박하고 나선 것이다.
트럼프의 의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비밀스럽게 움직인 사람이 있다. 트럼프의 개인 변호사 루돌프 줄리아니다. 그는 이번 사건의 몸통이다.
다음은 줄리아니의 행적이다. 그는 우크라이나 핵심 인사들을 부지런히 만났다. 하원 탄핵 조사가 초기 단계라 장소와 일정이 명확하지 않은 것도 있다.
2017년 6월 18일-페트로 포로셴코 당시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유리 루첸코 검찰총장을 만났다. 트럼프가 갑작스럽게 우크라이나에 대한 트위터 글을 올리기 일주일 전이다. 트럼프와 줄리아니가 오래 전부터 내년 대선에 우크라이나 문제를 활용하는 것을 모의했음을 시사하는 증거다.
2018년 말-부패 인물로 지목돼 경질됐던 쇼킨 전 검찰총장과 대화를 나눴다.
올해 1월과 2월 중순-뉴욕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루첸코 검찰총장을 더 만났다.
도중에 줄리아니의 파트너가 바뀐다. 코미디언 출신 정치신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올해 4월 대선에서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당선됐기 때문이다.
올해 8월 2일-줄리아니는 젤렌스키의 보좌관인 안드리 예르막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만났다.
줄리아니는 한 명의 당시 현직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고, 대통령들의 최측근들과 빈번한 접촉을 가졌다. 그의 목표는 우크라이나 정부가 바이든 뒷조사를 공식 발표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드러나는 법. 우크라이나 스캔들을 촉발시킨 내부고발자는 올해 5월 줄리아니의 비밀스런 움직임을 포착했다. 그리곤 “미국에 위험이 될 것”이라고 간파했다.
3막-‘스모킹 건’인 줄 알았는데…트럼프의 노회한 화법
트럼프 대통령은 올해 7월 25일 젤렌스키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가졌다. 오전 9시 3분부터 30분 동안 이어졌다. 10여명의 백악관 당국자들도 이 통화를 듣고 기록했다.
USA투데이는 “정상 간 통화에는 최소 2명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당국자들이 통화 현장에 있다”고 보도했다. 예상보다 많은 당국자들이 문제의 통화 내용을 엿들은 이유도 아이러니하다. 기밀이 많지 않은 통상적인 대화라고 판단해 당국자들이 전화 통화를 듣는데 큰 제한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통화가 우크라이나 스캔들의 도화선이 됐다. 위기를 맞은 트럼프는 정면돌파를 위해 통화 녹취록을 전격 공개했다.
녹취록을 보면, 부동산업자 출신의 트럼프는 노회한 수법을 썼다. 상대에게 자신의 의중을 분명히 전달하면서도 명령이나 지시·압박·부탁이 아니라 애매하게 둘러말한 것이다.
A4지 5장 분량의 녹취록에서 핵심은 3가지다. 첫째는 바이든 부자 뒷조사 문제. 녹취록 내용이다.
트럼프: “바이든 아들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있다…바이든은 자신이 (아들에 대한) 기소를 막았다고 떠들고 다녔다. 당신(우크라이나 대통령)이 그것을 조사할 수 있다면…”
트럼프는 말끝을 흐렸다. 바이든 부자에 대한 뒷조사를 원한다는 사실을 젤렌스키에게 분명히 전달하면서도 빙 둘러 말하면서 노골적인 압박 뉘앙스를 피했다.
둘째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3억 9100만 달러(약 4600억원) 규모의 군사지원 문제. 반(反) 러시아 노선을 펼치는 젤렌스키는 러시아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미국의 군사원조가 절실했다. 미국 의회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지원을 승인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가 차일피일 집행을 보류했다.
이 대목은 우크라이나 스캔들의 최대 쟁점이다. 트럼프가 군사 원조와 바이든 뒷조사를 연계했다는 의혹이 이 부분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녹취록을 보면, 트럼프는 매우 조심했다.
트럼프: “우리는 우크라이나를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다…독일은 당신(우크라이나)을 위해 거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미국은 우크라이나를 매우 잘 대했다. 이것이 상호간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겠다. 안 좋은 일도 일어나긴 하지만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매우 잘 대했다”
트럼프는 전화통화에서 군사원조를 언급하지 않았다. “‘퀴드 프로 쿼’(보상 또는 대가로 주는 것)가 없었다”는 것이 트럼프의 주장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우크라이나 스캔들이 세상에 알려지기 직전인 9월 11일 묶어놨던 군사지원을 집행했다.
세 번째가 2016년 미 대선에서 매너포트 사건을 둘러싸고 빚어졌던 민주당과 우크라이나 사이의 내통 의혹이다. 트럼프는 이 대목도 에둘러, 그리고 넌지시 말한다.
트럼프: “우리나라는 많은 일을 겪었고, 우크라이나는 그것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당신이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했던 이 모든 상황에 대해 조사를 해줬으면 좋겠다”
트럼프는 말조심을 했다. 아마 빙빙 둘러말했던 것을 알았기 때문에 녹취록 공개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녹취록이 ‘스모킹 건’(결정적 증거) 역할을 할 줄 알았는데, 이후 정치적 논쟁만 가열된 것도 트럼프의 노회한 발언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국 언론들은 이런 모든 행위를 암묵적인 압박으로 해석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녹취록 내용이 엄청나게 충격적인 범죄 행위”라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전화통화 내내 젤렌스키에게 줄리아니와 윌리엄 바 법무부 장관과 접촉할 것을 종용했다.
4막-트럼프에 등을 돌린 조력자들
한 편의 영화처럼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우크라이나 스캔들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만든 사람은 내부 고발자다. 그가 ‘정보기관 내부 고발자 보호법’에 따라 8월 12일 미 정보기관 감찰관실(ICIG)의 마이클 앳킨슨 감찰관에게 고발장을 익명으로 제출하면서 우크라이나 스캔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현재까지 드러난 정황을 종합하면 최고의 악역은 줄리아니다. 그는 바이든 뒷조사를 트럼프와 기획했고, 직접 행동대장 역할을 맡기도 했다.
변호사인 줄리아니가 외교 현장을 활개치고 돌아다닐 수 있도록 도와준 인물들이 있었다. 외교관 출신으로 유럽 전문가인 커트 볼커 전 국무부 우크라이나협상 특별대표와 호텔 사업가로 트럼프 후원자였던 고든 선들랜드 유럽연합(EU) 주재 미국대사다.
이 숨은 조력자들은 하원 탄핵 조사가 시작되자 트럼프에게 불리한 사실들을 시인했다. 볼커는 줄리아니가 젤렌스키의 최측근인 예르막을 만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았다. 또 볼커와 선들랜드는 줄리아니와 함께 수시로 회의를 갖거나 문자 메시지를 교환했다. 젤렌스키가 바이든 뒷조사를 공식 발표하도록 만드는 것이 이들의 비밀 업무였다. 볼커와 선들랜드는 젤렌스키가 읽을 발표문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젤렌스키는 이들의 요구에 따르지 않았다.
볼커는 이런 정황을 담은 문자 메시지를 하원에 제출했다. 선들랜드도 하원 청문회에 출석해 “트럼프가 줄리아니를 우크라이나 정책에 대한 논의에 참여시키도록 지시했다”면서 “그 지시에 실망했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줄리아니의 계획에 반발했던 인물도 있었다. 윌리엄 테일러 우크라이나 주재 미국 대사대행이다. 특히 그는 선들랜드에게 “대선 운동에 도움을 주기 위해 안보 원조를 보류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생각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테일러는 그는 하원 청문회에서 “트럼프는 바이든 부자에 대한 조사를 공개적으로 발표하기 전까지 젤렌스키가 군사 원조를 받지 못할 것이며 백악관에도 초대받지 못할 것이라고 매우 분명하게 밝혔다”고 말했다. 군사원조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지 않았다는 트럼프에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5막-육탄 방어에 나선 트럼프 진영
24명 정도의 공화당 소속 하원의원들이 지난 23일 비공개 청문회가 진행되던 하원 탄핵 조사 회의실을 난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터프하고 스마트했던 공화당 하원의원들에게 감사드린다”는 트위터 글을 올렸다. 탄핵 조사 방해에 고마움을 표현한 것이다.
백악관은 이미 탄핵 조사 보이콧을 선언한 상태다. 국무부를 포함한 트럼프 행정부도 공무원들에게 탄핵 조사에 응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하원 탄핵 조사위가 소환장을 발부하자 많은 당국자들은 지시를 어기고 자발적으로 증언대에 서고 있다.
트럼프 진영의 육탄방어가 얼마나 성공을 거둘지는 미지수다. 남아있는 화약고들이 많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슈퍼 매파’이면서 트럼프에게 경질 당했던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다. 외교 현안에 숨은 비밀을 많이 알고 있는 볼턴이 트럼프에게 치명적인 폭탄 증언을 할지도 관심사다.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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