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을 짝사랑한 궁녀의 무덤에 핀 꽃, 능소화를 아시나요

윤경재 2019. 7. 4.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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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윤경재의 나도 시인(38)
주홍빛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능소화. [중앙포토]

능소화
그해 당치게 꿈 먹은 여름비 내려
허물어져 가는 양반가 북향 골목
잔가지 없이 굵고 다라진 고목에도
수줍은 주황색 꽃등이 내걸렸지

질긴 하룻밤 인연
씨 없는 시앗 신세 서러워
담장 너머 넝쿨 늘어뜨리곤
길손에게 임 계신 곳 반겨 묻는다더니

닥지닥지 촛대 같은 꽃망울은
보리쌀 한 되 얻으러 간 아버지가
길 잃을까 밤새도록 뜬눈 밝히는
흥부네 개구쟁이 초롱초롱 눈망울이었다
신비로운 골목이 명랑해지는 아이 여럿

풋사랑이라도 함부로 따면 눈먼다고
꽃도 숨죽여 발자국 소리 듣는다고
기다리다 보면 한철 휘파람으로라도 핀다고
떨어져서도 꿈꾸는 능소화
올해도 담장 주위에 뭉클뭉클 피어났다

■ 해설

낚싯줄 같이 늘어진 줄기에 매달린 능소화의 꽃대가 특색 있다. 굽어진 꽃대 하나하나가 모두 등잔대에 올라앉아 하늘을 바라보는 모양이다. 사진은 베어트리파크 수목원 관람로에 활짝 핀 능소화. [사진 베어트리파크]

능소화를 처음 알게 된 건 중·고등학교 때였다. 마포에서 전차나 버스를 타고 광화문에서 내려 청운동, 효자동까지 걸어 다녔는데 인왕산 밑 서촌을 지날 때 몇몇 옛집 담장에 핀 주황색 꽃에 감탄하곤 했다. 그때는 능소화에 얽힌 전설을 알지 못했고 다만 꽃이 참 화려하고 매력 있다고 느낄 뿐이었다. 낚싯줄 같이 늘어진 줄기에 매달린 꽃대가 참 특색이 있다. 갈고리처럼 굽어진 꽃대 하나하나가 모두 등잔대에 올라앉아 하늘을 바라보는 모양이다.


송이째 뚝 떨어지는 비장감
아기 주먹만 한 꽃이 참 오래 핀다. 덩굴식물인지라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다가 6월 말이면 갑자기 닥지닥지 피어 골목길이 환하게 느껴졌다. 넉넉히 달포는 꽃이 피었다. 빗줄기에도 잘 떨어지지 않는 꽃대는 벚꽃이나 매화처럼 가벼이 꽃잎을 흩날리지 않는다. 동백꽃처럼 시들기 전에 송이째 툭 하고 떨어져 비장감이 느껴진다. 더군다나 눈으로만 봐야지 손을 대면 꽃송이가 쉬이 떨어진다.

잘 모르고 보면 아주 키가 큰 나무로 오해하는데 사실은 덩굴이 지주목을 감고 올라가 커 보일 뿐이다. 능소화가 강하고 독성이 있어 덩굴이 감고 올라간 나무는 거의 고사하고 만다. 그래서 꽃이 피기 전에는 다른 나무로 오인한다.

능소화에 얽힌 설화는 기구하고 슬프다. 이름마저 어리고 예쁜 소화(少花)라는 궁녀가 왕의 눈에 들어 하룻밤을 지냈단다. 그런데 여인들의 질투와 싸움에 휘말린 왕이 두 번 다시 소화를 찾지 못했다. 게다가 왕자도 배지 못했기에 깊은 궁궐에서 외롭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성품이 착한 소화는 오랜 세월 왕이 찾아주기만을 목 빼 기다리다가 상사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죽어서라도 왕의 발소리를 들을까 해 왕이 다니는 길목의 담장 밑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마침 소화가 묻힌 자리에 꽃이 피어 능소화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이야기다.

설화에서 이름이 바뀌는 건 그 존재의 의미가 달라졌다는 상징이다. 성경에서도 이름이 바뀐 사례가 자주 나온다.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하느님의 사람으로 인격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능소화의 꽃말은 명예이다. 병충해와 비바람에는 강해도 공연히 사람 손을 타면 꽃받침째 떨어져 버리고 마는 도도한 성격이 그걸 말해준다. 사진은 김녕만 작가의 전시회에 나온 능소화. [중앙포토]

능소화(凌霄花)의 한자는 능가할 능(凌)에 하늘 소(霄), 꽃 화(花)를 써 ‘하늘을 능가하는 꽃’이란 뜻이다. 덩굴이 10여 m 이상 감고 올라가 하늘을 온통 덮은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늘 같았던 임금도 가벼이 보게 되었다는 뜻이겠다.

이제는 꽃 이름에 담긴 의미를 새롭게 바라보아야 할 때가 됐다. 보아주지도 않는 왕을 짝사랑만 하는 한 많고 가련한 여인상에서 차라리 죽음을 각오하더라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낸 한 인격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설화에서 죽음은 재탄생을 의미할 때가 많다.

능소화에 딸린 꽃말은 명예이다. 병충해와 비바람에는 강해도 공연히 사람 손을 타면 꽃받침째 떨어져 버리고 마는 도도한 성격이 그걸 말해준다. 또 어사화로도 쓰여 장원급제한 선비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래서 능소화는 양반집에서만 키울 수 있었다는 설이 있다. 상인들은 심거나 키울 수도 없었다는 말이다.

능소화에는 독성이 있어 손으로 꽃을 따고 눈을 비비면 눈이 먼다는 속설이 있다. 실제로 어혈을 풀고 열과 염증을 가라앉히는 민간약제로 사용된다. 또 염료로도 사용된다.

나는 능소화를 통해 기품 있는 양반규수로서 가난한 집으로 시집가 아들딸 여럿을 낳고 우애 있게 기른 여성을 상상해 보았다. 가난을 보다 못한 남편이 나서서 식량을 구할지언정 기죽지 않고 아이들의 올바른 인성 교육에 매진한 신사임당과 같은 존엄한 여성의 자세가 느껴졌다. 현대는 점점 자신과 타인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공감적 인품이 요청되는 시대이다.

동물뿐만 아니라 식물도 사람의 손길과 발길을 느낀다고 한다. 심지어 복사기와 같이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기계도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알아듣는다고 한다. 기계 같은 무생물도 이 사람 저 사람이 함부로 사용하다가 고장이 났을 때 주인이 찾아와 정성스레 만져주면 금세 작동하는 걸 체험한 노련한 수리공들이 전하는 말이다.


자연이 인간에게 바라는 소리없는 아우성
뇌 과학자인 게랄트 휘터는 자신의 존엄성을 깨달은 사람만이 타인을 존중하며, 혹시 기대하지 못한 대접을 받더라도 상처받거나 감정을 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인간은 자연을 비롯한 타자와의 개방된 만남을 통해 어떤 진리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유연한 뇌를 가진 유일한 동물이다. [사진 pixabay]

독일의 뇌 과학자인 게랄트 휘터가 쓴 『존엄하게 산다는 것』이란 책에서 자신의 존엄성을 깨달은 사람만이 타인을 존중하며, 혹시 기대하지 못한 대접을 받더라도 상처받지 않고 감정을 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인간의 천부적 존엄성이란 인간을 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그 자체로 목적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자연을 비롯한 타자와의 개방된 만남을 통해 어떤 진리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유연한 뇌를 가진 유일한 동물이다. 자신의 실패 경험이나 어떤 유대감을 재발견해 자기 가치를 되찾게 된다. 그래서 한 번이라도 자신의 존엄성을 강렬하게 자각한 사람은 결코 가볍고 허튼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게 게랄트 휘터의 주장이다.

요사이 고즈넉한 골목뿐만 아니라 동네 공원에서나 고속도로 방음벽 등에서 만개한 능소화를 만날 수 있다. 한 번쯤 그 멋진 자태와 이름을 떠올리며 자연이 우리 인간에게 바라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느껴보면 어떨까 한다.

윤경재 한의원 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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