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운의 역사정치] 김(金)씨는 왜 금씨가 아닌가..삼국시대엔 '금'유신 불렸나
유성운의 역사정치
분명 한자 ‘金’은 ‘쇠 금’이라고 읽는데 김씨 성(姓)에서만 유독 ‘김’이라고 발음하기 때문이죠.
이 때문에 당초 과거에는 ‘김’씨가 아닌 ‘금’ 씨로 발음했을 것이란 주장도 적지 않습니다. 삼국시대엔 김유신이 아닌 금유신, 김춘추가 아닌 금춘추 라고 발음했다는 겁니다. 그럼 왜 발음이 바뀐 것일까요?
오얏나무 이(李)씨가 금(金)을 ‘김’으로 만들었나
오행설에는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에서 목(木)은 토(土)를 이기고 토(土)는 수(水)를, 수(水)는 화(火)를, 화(火)는 금(金)을, 금(金)은 목(木)을 이긴다는 상극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 왕조를 건국한 이성계가 전주 이(李)씨인데 ‘오얏나무 이(李)’는 목(木)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조선 왕조가 목(木)에 강한 금(金)을 꺼렸다는 것이죠. 즉 이(李)씨를 이기는 것이 금(金)씨이기 때문에 힘을 억제하기 위해서 김씨로 바꿔 부르도록 했다는 겁니다. 건국 초기 정통성이 약해 고민했던 조선 왕실의 사정이 반영된 것 같기도 합니다.
가문을 중시하는 전통을 고려할 때 이런 혁명적 변화가 있었다면 『조선왕조실록』이나 하다못해 개인 문집에서라도 분명 기록이 남았을 텐데 과거 문헌 어디서도 이러한 내용을 찾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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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에서 ‘김’으로
그럼 ‘금’이 ‘김’으로 바뀐 것은 언제 그리고 왜일까요.
최근 연구 결과 중 하나는 ‘金’에 대한 중국 발음이 바뀐 것에 주목합니다. 이에 따르면 수(隋), 당(唐) 시대만 하더라도 ‘금’에 가깝던 발음이 5대 10국 시대를 거치며 ‘김’에 가까운 발음으로 변화했다는 것이죠. 물론 한반도에도 이미 한자 문화가 정착됐기 때문에 중국의 한자 발음 변화가 즉각적으로 영향을 줄 수는 없었습니다.
칭기즈칸의 직계 후손들이 ‘황금씨족’이라고 자처하는 등 몽골 상류층은 금(金)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름에도 '金'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몽골에서 지낸 고려 왕자 및 상류층을 중심으로 이 발음 변화가 확산된 것으로 보입니다.
지명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경남 김해(金海)가 대표적인데, 금주(金州)에서 몽골 간섭기인 충선왕 때 현재 지명으로 개칭됐습니다.
참고로 중세 일본에서 만들어진 『석일본기(釋日本紀)』에는 『일본서기』에 수록된 신라인의 이름을 읽는 법이 나옵니다. 그런데 ‘金’이라는 성은 ‘코무(コム)’라고 발음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신라에서는 ‘김’이 아닌 ‘금’으로 발음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약 당시 발음이 ‘김’이었다면 ‘키무(キム)’가 되었겠지요.
왕의 존엄성을 지켜라…피휘(避諱)의 추억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나라 국(國)이라는 한자입니다.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진나라 때까지 나라를 의미하는 한자로는 ‘방(邦)’이 널리 사용됐습니다. 국(國)은 왕이 사는 도성을 비롯한 도시를 의미했고, 여기에 주변 농촌이 합쳐져야 ‘방(邦)’이 됐습니다.
그런데 한나라에 들어와 문제가 생겼습니다. 건국 시조인 유방(劉邦)의 이름하고 겹쳤기 때문이죠. 이때부터 역사책을 비롯한 모든 기록에서 ‘방(邦)’은 국(國)이라는 한자로 대체됐습니다.
북한은 여전히 피휘가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일성’, ‘정일’, ‘정은’이라는 이름을 쓸 수 없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그 범위가 ‘설주’, ‘여정’까지 확대됐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쨌든 음양오행설 때문에 금씨가 김씨로 바뀌었다는 속설이 퍼진 건 왕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멀쩡한 한자를 바꾼 군주제의 유산이란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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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민주공화정에서 국가원수모독죄?
그런데 건국 이래 민주공화정을 유지하고 있는 대한민국도 여전히 군주제적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경우가 종종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1998년 야당 의원이었던 박근혜 대통령이 공동 발의한 국회법 개정안을 두고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이 ‘박근혜법’이라고 지칭하자, 당시 박근혜 정부 청와대에서는 “대통령 이름을 법안에 함부로 붙인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습니다.
얼마전에도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라는 낯뜨거운 이야기를 듣지 않도록 해달라’는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발언에 대해 “국가원수 모독죄”라고 비난하며 양측 간 설전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반면 서구는 영국의 ‘권리장전’ 등을 필두로 계약 위반 시 왕권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명문화했기 때문에 동아시아처럼 최고 지도자에 대한 맹목적 충성 개념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겁니다.
여야는 ‘수석대변인’과 ‘국가원수모독죄’ 표현을 놓고 국회 윤리위에 서로 제소한 상태입니다. 21세기 민주공화정에서 이런 이유로 여야의 충돌이 벌어지는 건 아직도 우리 주변에 군주제의 유산이 많이 남아있다는 의미일까요?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권인한 『성씨 김(金)의 한자음 연원을 찾아서』, 이중톈 『이중톈중국사-03 창시자』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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