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밥 먹을 시간 없이 일해도 실적 압박".. 죽음 부른 'IT 하청'

조효석 정진영 기자 2019. 2. 2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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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카드 차세대 프로젝트 참여, 30년 경력 개발자 극단적 선택

30년 경력의 베테랑 IT개발자 이모(51)씨가 서울 금천구 자택에서 목숨을 끊은 채 가족에게 발견된 건 설날인 지난 5일이다. 이씨는 BC카드가 추진해온 ‘차세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2차 하청업체 소속이다. 그는 4줄짜리 짤막한 유서에서 사장을 비롯한 직장 동료의 이름을 하나씩 짚어 부르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적었다.

이 사건은 설 연휴 직후 청와대 청원게시판에 ‘BC카드 IT개발자의 죽음’이라는 게시글이 올라오며 알려졌다. IT개발자 사이에선 즉각 과로사 주장이 나왔다.

이씨의 유족은 그가 과로와 스트레스로 힘들어했던 흔적을 여러 곳에 남겼다고 했다. 이씨의 휴대전화에선 극단적인 선택 전날 사장에게 보낸 “죽고 싶다. 너무 힘들다”는 문자가 나왔다. 방에선 수면유도제가 발견됐다. 유족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한 동료들도 단체 채팅방에서 ‘회사 출근을 못하겠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몸살을 앓는다’는 등의 말을 주고받았다”고 했다.

IT개발자들은 이씨와 비슷한 죽음이 최근 잇따르고 있다며 걱정하고 있다. 특히 금융권 신사업 개발인 ‘차세대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가 과로로 숨지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례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과로의 외주화’로 요약되는 개발비 절감을 위한 하청구조와 성과주의, 산업재해 인정이 어려운 사회 구조가 이 같은 문제의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21일 국민일보 취재 결과 IT노조 측은 최근 2년 새 최소 6명이 이와 관련해 죽음을 맞은 것으로 보고 있다. A은행의 프로젝트 개발과정에서는 심근경색으로 의심되는 사망 2건, 자살 1건이 발생했다. B은행 프로젝트에서도 1명이 과로사한 것으로 추정됐다.

금융권은 개발비 절감을 위해 복잡한 하청구조를 만들어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업계에 따르면 차세대 프로젝트는 한번 시작되면 수많은 하청업체까지 포함해 인력이 1000명 가까이 동원된다. 워낙 많은 인원과 비용이 투입되다보니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하청에 재하청을 주는 형태로 일이 진행되는 것이다. 한 현직 개발자는 “발주사에서 분석·설계에 투자를 하지 않아 제대로 계획되지 않은 상태에서 프로젝트를 시작하니 순탄히 진행될 수가 없다”며 “부담은 하청 개발자들이 다 떠안는다”고 설명했다. 청와대 청원게시판 글쓴이는 “난이도와 상관없이 일주일에 무조건 (실적) 몇 개를 채워야 하고 개인별 실적을 일일이 공개한다”면서 “주52시간을 준수해야 한다고 해 저녁도 먹지 않은 채 일에 매진해도 실적을 채울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IT노조 관계자는 “극한의 업무량 때문에 대형 프로젝트가 진행되면 평균 3~4명이 자살이나 심근경색 등으로 사망한다”는 주장까지 내놨다.

개발자의 죽음은 대부분 업무와의 연관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IT노조는 산재 인정이 안 돼 공식적 보상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IT노조 관계자는 “자칫 대기업과의 소송전까지 불사해야 해 대부분의 유족은 위로금을 받는 대가로 입을 다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유족이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지 않는 이상 관련 부처인 고용노동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경찰도 이를 제대로 조사하는 게 쉽지 않다. BC카드 관계자는 “(프로젝트) 수행방식과 관리인력 등 세부사항은 하청업체들이 맡고 있는 것이라 말하기 어렵다”고 했다.

원청 기업들은 프로젝트 중 하청 직원이 사망해도 책임을 인정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지난해 12월 국회가 각 금융사에 시스템 개발 외주개발자 사망현황 제출을 요구했지만 보고된 건 언론에 보도된 1건뿐이었다. 개발자들 역시 문제를 공론화할 경우 좁은 업계에서 일거리가 끊길까봐 전면에 나서지 못한다. BC카드 측은 이씨의 장례식장에 문상하고 현재 부당노동행위와 관련해 외부 노무법인을 통해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번 사건에 관련된 다른 업체들은 대부분 별다른 조치가 없었다.

민주노총 노동법률지원센터 박성우 노무사는 “국내에서도 과로자살이 산재로 인정받은 사례가 있지만 증명하기까지 많은 증거가 필요하다”며 “IT업계에서 중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조효석 정진영 기자 prome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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