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경의 옐로하우스 悲歌]⑧"한 명 데려오면 200만원"..성매매 시작은 인신매매

최은경 2019. 2. 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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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경의 옐로하우스 悲歌] ⑧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1962년 생겨난 인천 미추홀구 숭의동의 집창촌 속칭 ‘옐로하우스’가 재개발된다. ‘1월 말까지 모두 비우라’는 최후통첩을 받았지만 10여 개 업소의 성매매 여성 40여 명은 갈 곳이 없다며 버티고 있다. 설연휴가 끝나면 강제 철거가 시작될 것이라는 얘기가 돌면서 불상사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벼랑에 몰린 여성들이 마음속 깊이 담아뒀던 그들만의 얘기를 꺼냈다. 집창촌에서 긴 시간을 보낸 B씨(53)의 증언을 ‘옐로하우스 비가(悲歌)’ 시리즈에서 소개한다.
인천 미추홀구 숭의동 집창촌 '옐로하우스' 업소의 내부. 두 평 남짓한 방에 침대, TV, 에어컨 등이 있다. 김경록 기자
‘옐로하우스 비가’에 관한 다양한 의견 가운데 한 독자의 댓글이 눈에 띄었다. ‘(자활비) 지원이고 뭐고 다 떠나서 저 여성들은 어떤 사연이 있기에 젊은 나이에 저기에 있는지 궁금하다’는 내용이었다.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기 위해선 집창촌의 역사부터 짚어봐야 한다. 그래야 이 문제를 심도 있게 고민해볼 수 있다.

성매매를 전업으로 하는 집창촌에는 30대 이상의 생계형 여성이 많다. B씨 역시 돈을 벌기 위해 30여 년 동안 전국의 집창촌을 떠돌았다. 처음 발을 들인 것이 1980년대 중반이다. 격동의 시기라 불리는 80년대의 집창촌은 말 그대로 무법천지였다. 이곳에서 온갖 범죄가 일어났지만 바깥세상은 모르는 척했다.

4남매의 맏이인 B씨는 막냇동생과 나이가 10살 이상 차이 난다. 사업을 하던 아버지 때문에 집에 빚이 조금씩 쌓이더니 어느새 5000만원까지 불어났다. 원래 몸이 약했던 어머니는 늘 아파 일을 할 수 없었다. 하루하루 버티다 B씨가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가 쓰러졌다. 누워 있는 아버지와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 상황에서 B씨는 학교를 온전히 다니기 어려웠다.

결국 중퇴를 하고 가발공장과 작은 상점에서 일했다. 18세 소녀가 하기엔 힘든 일이었다. 받는 돈도 적었다. 다른 직장을 알아봤지만 취직이 어려웠다. 그때 친구가 술집에서 돈을 번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저처럼 가정 형편이 어려웠는데 술만 따르면 된다는 거예요.” 큰돈은 아니지만 선불금을 준다는 말에 B씨는 유흥업소에 발을 들였다.

“다른 친구가 그런 데 가지 말라면서 울기까지 했는데…, 너무 어려서 뭐가 뭔지 모르고 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카페 서빙 구인광고에…

계속 이 일을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빚쟁이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집은 매일 쑥대밭이 됐다. 어머니는 울기만 했다. 본격적으로 돈을 벌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 그때쯤이다. 잡지에서 ‘카페 서빙 여종업원 구함, 월 300만원, 침식 제공’이라는 구인광고를 봤다. 고향인 경기도를 떠나 대구로 향했다.
대구 도심의 성매매 집결지였던 중구 도원동 ‘자갈마당’. [연합뉴스]
막상 가보니 카페가 아니었다. 시뻘건 불이 켜진 홍등가 앞에서 B씨는 고민에 빠졌다. “꼭 돈을 벌어 돌아가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식구들을 떠올리면서도 한편으론 겁이 나 망설이고 있으니 업주가 ‘조금 일해보고 마음에 안 들면 나가라’고 하는 거예요. 하지만 마음대로 나갈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B씨가 한스러운 듯 울음을 터뜨렸다.

B씨가 간 곳은 대구 도원동 집창촌 ‘자갈마당’이었다. 이곳에는 인신매매로 끌려 온 여성들이 많았다.

“알선책들이 건달을 시켜 나이트에서 여성을 납치하거나 술에 몰래 마약을 타 끌고 왔어요. 한 명을 데려오면 200만~300만원을 받아요.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여성들을 데려오는 알선책들을 요즘은 소개소 매니저라고 하더군요. 처음 이런 곳에 오면 너무 무서워 방 안에서도 막 도망 다녀요. 그러다 결국은 시키는 대로 하게 돼요. 업주가 언니들에게 향정신성 약을 한 주먹씩 먹였습니다. 이걸 먹으면 비틀비틀하고 정신을 못 차리거든요. 넋이 나가죠. 그렇게 몇 년 지내면 나갈 계획은커녕 자포자기하고 짐승처럼 사는 거예요.”

80년대에 여성이 납치, 취업 사기 등으로 집창촌에 팔려 가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90년대 후반까지도 신문 사회면에서 관련 기사를 볼 수 있었다.

87년 서울지검 김수철 검사가 롤러스케이트장 주변의 여중·고생이나 신문의 ‘관광 안내원 모집’ 등의 허위 구인광고를 보고 찾아온 미성년자 500여 명을 서울·부산·대구 등지의 윤락가에 팔아넘긴 인신매매 조직 15개 파 46여 명을 적발했다. 롤러스케이트장에 놀러 갔다 유인책에게 속아 가정집에 감금, 4개월여 동안 강제로 히로뽕 주사를 맞은 상태에서 윤락 행위를 한 김모(16)양은 조직에서 풀려난 뒤 후유증으로 전신 마비 증세를 보이는 등 피해가 심각했다는 기사도 있다.


80년대 납치, 취업 사기 인신매매 성행

이듬해 8월에는 서울 신정경찰서가 길을 가던 가정집 처녀, 미성년자 등을 납치해 광주 등 집창촌에 팔아넘긴 인신매매단과 윤락 업주를 붙잡았다. 이들은 경기도 한 디스코텍 앞에서 김모(19)양과 양모(19)양을 붙잡고 “드라이브나 하자”고 속여 여관에 데려가 폭행한 뒤 1인당 40만원을 받고 집창촌에 파는 등 17명을 납치했다.

88년 6월 서울시경에 따르면 가출 소녀를 납치해 윤락가에 팔아넘기는 인신매매 조직이 서울에만 3000명 이상이었다. 범인들은 3∼4명이 조를 이뤄 서울역·용산역 주변의 상경한 여성, 오락실·롤러스케이트장 등에서 방황하는 10대 소녀를 납치해 집단 폭행한 뒤 팔아넘겼다. “좋은 일자리를 주겠다”는 말로 꾀는 것이 보통이었다.
중앙일보 1988년 8월 28일자에 실린 인신매매범 구속 기사. [사진 중앙일보 캡처]
이런 엄청난 인권 유린의 이면에 군사독재 정부가 도사리고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박정미 충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1985~91년 인신매매 형사 사건을 분석한 결과 여성 피해자의 84%가 성 산업에 매매(성매매 업소로 팔려갔다는 의미)됐다”며 “80년대 전두환 정부의 유흥·향락 산업에 대한 규제 완화로 업계 규모가 커지면서 여성을 공급하기 위한 인신매매가 증가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당시 정부의 규제 완화가 내수 확대 정책의 일환이었지만 사실은 시민의 정치적 자유와 민주화 열망이 유흥으로 옮겨가게 하기 위한 전략이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B씨가 있던 자갈마당에 인신매매로 끌려온 여성을 찾으러 오는 이는 없었다. 경찰도 찾지 않았다. 항상 호객하는 ‘현관 이모’가 여성들을 감시했다. 이곳에서는 누가 죽어도 죽은 줄 몰랐다는 게 B씨의 말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집창촌은 ‘성매매가 사실상 허용된 곳’으로 시민들 삶의 공간에 뿌리를 깊게 뻗을 수 있었고 돈이 필요한 여성들을 불러모으며 오늘까지 이어져 온 셈이다.

최은경 기자 choi.eunkyung@joins.com

<9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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