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화의 생활건축] 서울 지하에 아무개가 산다

한은화 2018. 10. 9.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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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화 중앙SUNDAY 기자
땅 밑 아무개의 삶은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그 삶이 지표면 위로 떠오른 것은 2004년이었다. 서울 종로구 청진동에서 지하 7층, 지상 20층 규모의 르미에르 빌딩을 지을 때였다. 오래된 저층 건물을 밀고 지하를 파니 수백 년간 묻혀 있던 조선시대 보물 창고가 열렸다. 조선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600여년간의 건물터와 유물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궁궐 밖 잊혔던 서민 아무개의 삶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불탔던 집, 조선시대 관영 상설점포인 시전(市廛)의 흔적도 땅 밑에 고스란히 있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매장 문화재에 대한 제대로 된 가이드라인이 없었다. 시전의 유적 일부라도 현장에 남기려 했지만 결국 파내졌다. 터 잃고 조각난 유적은 오랫동안 떠돌다 2009년 서울역사박물관 밖에 자리 잡았다.

공평도시유적전시관
르미에르 빌딩 사태 이후 매장 문화재 보존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다. 2007년 탑골공원 옆 육의전 빌딩 공사 현장에서는 ‘육의전(비단·명주·종이·어물·모시·무명을 파는 점포)’ 터가 나왔다. 문화재위원회는 건물을 짓되, 지하 1층에 육의전 박물관을 마련해 운영하겠다는 건축주의 안을 받아들였다. 건물은 2010년 준공됐다. 그러나 박물관 개관은 수년간 미뤄졌다. 좌충우돌 끝에 문 열었지만 임시 휴관을 반복하고 있다. 현재도 ‘매일 휴무’ 상태다. 건물 관리인은 “운영이 어렵다”고 했다.

최근 1조 1200억 원에 팔려 국내 오피스 빌딩 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공평동 신축 빌딩 ‘센트로폴리스’의 지하 1층(사진)에는 서울 최대 규모의 유적전시관이 있다. ‘공평도시유적전시관’(연면적 3817㎡)이다. 재개발 과정에서 발굴된 유적을 전면 보존했다. 건축주는 이를 서울시에 기부채납하는 대신 용적률 인센티브를 받았다.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을 빼고 대중에게 늘 열려 있다.

전시관에서는 아무개의 삶이 끝없이 펼쳐진다. 그중 명문(銘文)자기가 인상적이었다. 조선시대에는 큰 잔치가 열리면 그릇 품앗이를 했는데 서로 헷갈리지 않게 그릇 뒷면에 먹으로 이름을 썼다. 발굴된 조각에서 ‘정그니’라는 이름이 나왔다. 강자의 이름만 기억되던 우리 역사 속에서 잊힌 이름이다. 하지만 정그니의 삶을 토대로 오늘날의 아무개가 살아간다. 서울의 지하는 아무개들의 삶을 잇는 소중한 기억 창고다.

한은화 중앙SUNDAY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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