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은 일본이 아니다
[오마이뉴스 전종현 기자]
▲ 일제강점기 경성을 배경으로 한 영화 '모던보이'의 한 장면. |
ⓒ KnJ엔터테인먼트 |
하지만 경성은 심리적으로 일제강점기를 상기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경술국치가 일어난 이후 1910년 9월 30일 조선총독부 칙령에 의해 한성이라 부르던 조선의 도읍을 경성으로 개칭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태생적인 단점에도 불구하고 경성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주로 일본을 거쳐 변형된 형태로 들어오던 서양 문물은 도시를 바꾸고, 사람들의 생활 양식에 영향을 주었다.
그런 과정에서 고전 할리우드 흑백 영화에 나올 듯한 옷차림으로 꼼꼼히 단도리하고 신문물에 호의적이던 모던 보이, 모던 걸이 '멋쟁이'로 인식되면서, 경성은 당대의 유행을 선도하는 물리적 장소이자 멋쟁이의 심리적 안식처로 부상했다.
경성, '멋쟁이의 공간'으로 떠오르다
실제 근래의 드라마나 영화 속 경성을 보면 그 시기의 낭만이 만든 한국 근대 도시 문화의 매력적인 일면을 발견하는 일이 어렵지 않다. 즉 일제강점기라는 상황 아래 경성을 보는 관점은 점점 다양해지고 있으며, 긍정 혹은 부정이란 이분법적 시선으로 가르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경성이란 단어의 범람 속에서 이미 고루해진 용어인 일본색, 즉 왜색이라는 낡고 민족 편향적인 단어를 다시금 끄집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마주하는 경험은 꽤나 우려스럽다.
얼마 전 요즘 핫플레이스인 익선동에서 파운드케이크를 파는 '경성OOO'이란 이름의 가게를 들렸을 때의 일이다. 앤티크한 느낌으로 차분히 꾸민 가게는 많은 사람들이 매력을 느낄 만한, 소위 인스타그램 성지의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 경성OOO의 케이크 세트 패키지 |
ⓒ Harry Jun |
그런데 필자는 패키지를 모두 디지털 이미지로 저장한 후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1시간 정도를 투자했을 뿐인데 패키지 원본의 대부분을 스톡(stock) 이미지 사이트에서 찾았다. 스톡 이미지에 달린 키워드에서 빠지지 않는 공통 단어는 바로 'Japanese'였다.
혹자는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도 있겠다. 지금 세상에 일식집이 얼마나 많으며, 이자카야는 또 얼마나 한국의 밤을 지배하고 있던가. 일본어를 금지한 세상도, 일본풍을 검열하는 시대도 아닌데 무슨 케케묵은 '왜색' 타령이냐고 말이다. 일리 있는 말이다.
1998년 일본 대중 문화 개방 정책으로 이제 일본 문화는 우리나라에서 정식으로 사랑받고 있다. 심리적으로 호오를 탓할 순 있겠지만 일본의 수많은 상품은 한국에 유통된다. 당장 아무 편의점이나 가보자. 일본에서 수입한 과자, 음료수, 맥주 하나 없는 곳이 없다.
문제는 상황과 맥락이다. 경성OOO에서 쓰인 '경성'은 1910년 9월 30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약 35년간 서울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던 특정한 시기를 지칭하는 게 명약관화하다. 그 시절이 내포하는 독특한 분위기를 상점의 주된 정체성으로 삼고 있다는 데 이의를 가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제 치하였지만... 경성은 조선이다
그런데 파운드케이크를 포장한 어여쁜 종이가 왜 일본 문화에 뿌리를 둔 시각 요소로 점철된 것인가. 우리가 생각하는 경성의 이미지는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이 활보하던 신문물의 멋진 신세계가 아니던가? 언제부터 현대가 바라보는 경성의 쿨한 이미지가 일본 미의식의 산물인 왜색과 동일시되기 시작했나.
경성이란 이름으로 불리던 시기에 서울이 일제 치하였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경성이 곧 일본은 아니었다. 일본인들이 색다른 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단체 관광을 오던 조선의 최대 도시, 경성은 조선의 유산과 신문물의 융합으로 서서히 근대화되던 일본의 물리적 식민지였지, 문화적 식민지는 아니었다. 경성은 온전히 조선 문화가 살아있는 땅이었다.
내년은 2019년이다. 미래의 전형이라 생각하던 2020년이 1년 남은 때이자, 동시에 일제 치하에서 수많은 사람이 의연히 일어나 비폭력으로 항거하던 3.1 운동이 100주년을 맞는 해이다. 이런 역사적인 순간에 경성과 일본을 동일시하는 관점이 자연스럽게 스며든다면,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일본을 극복하기 위해 힘써왔던 지난 수십 년의 세월이 너무도 허망하지 않을까.
누군가는 추측이 과하다고 치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작은 불씨가 조금씩 번져 숲을 모두 태워버릴 수 있는 법이다. 사전에 이를 막을 수 있도록 이번 경험을 우리 스스로 고민과 성찰, 대화와 토론의 계기로 삼는 게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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