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nd] 서울 한복판 을지로의 변신 | 복고풍 맛집들의 성지 낙후 골목서 '힙플레이스'로

나건웅 2018. 7. 30. 14:09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무너질 듯 위태로운 빛바랜 건물. 인쇄용지를 한가득 싣고 아슬아슬 질주하는 삼륜차. 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컴컴한 거리. 홍콩 누아르 영화 촬영지를 연상시키는 을지로 뒷골목의 현재 풍경이다.

겉은 수십 년 전 모습 그대로지만 속사정은 다르다. 낙후된 인쇄골목에서 ‘힙플레이스’로 완벽 변신한 모습이다. 점심·저녁 시간이면 유행에 민감한 젊은이들로 득실거린다. 서울 지하철역 충무로-을지로3가-을지로4가 근방에 새로 생긴 이색 음식점·커피전문점·와인바만 수십 개에 달한다. ‘신도시’ ‘호텔수선화’ ‘광장’ ‘물결’ 등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을지로 1세대’가 이곳에 터를 잡은 지 불과 2년 만이다.

낡고 좁은 인쇄골목에 최근 사람이 몰리는 이유는 뭘까.

지난 4월 을지로 인쇄골목에 문을 연 LP바 ‘평균율’ 간판은 두꺼운 철문에 붙어 있는 포스터 한 장이 전부다. 낮에는 커피를, 저녁 이후에는 싱글몰트 위스키를 판매하는 카페 겸 바로 운영한다. <사진 : 최영재 기자>
포인트 1 느낌 충만 ‘빈티지 감성’

▷허물어진 벽면·낡은 소품 고스란히

을지로 골목에 자리 잡은 가게를 둘러보면 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진다. 요새는 찾아보기 힘든 옛날 소품과 낡은 가구·인테리어를 활용해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한다. ‘레트로’ 콘셉트는 정비되지 않은 낡은 거리와 어우러져 시너지를 낸다.

‘커피한약방’은 빈티지한 느낌을 제대로 살린 인테리어로 화제를 모으는 커피전문점이다. 자개 수납장으로 만든 매대, 한약재를 담는 서랍, 개화기를 연상시키는 찻잔과 소품 등은 1940년대 지어진 건물 느낌과 딱 맞아떨어진다. 커피한약방에서 일하는 박용범 바리스타 팀장은 “할아버지부터 주변 직장인, 앳된 학생들까지 손님층이 다양하다. 점심시간에 손님이 너무 몰리기 때문에 커피는 두 종류로 간소화했다”고 설명했다.

와인바 ‘십분의일’ 대문도 복고 감성으로 충만하다. 수십 년 전 목욕탕 입구에 달려 있었을 법한 불투명 유리문 위에는 ‘와인’ ‘각종 안주’ ‘소주 없음’ 등의 글자가 성의 없이 붙어 있다. 이 밖에 페인트가 다 벗겨진 낡은 벽면을 인테리어로 고스란히 살린 ‘호텔수선화’, 20년 넘은 대형 인쇄기를 매장 한가운데 소품으로 전시해 분위기를 돋우는 ‘4F’도 사진이 예쁘게 나오는 인스타그램 성지로 떠올랐다.

포인트 2 숨은 보물 찾기

▷‘나 찾아봐라~’ 無간판 매장 수두룩

내비게이션 애플리케이션도 무용지물이다. 가게를 눈앞에 두고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을지로 인쇄골목 가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간판이 작거나 아예 없는 경우가 많다. 간신히 건물 입구를 찾아 계단을 오른 후에도 한 번 더 갈등에 빠진다. 두꺼운 철문 앞에서 ‘이곳이 과연 카페가 맞는지’ 잠시 망설여지는 것이다.

카페 겸 바 ‘작은물’이 대표적이다. 건물로 들어서는 입구와 천장 사이 여유 공간에 붙어 있는 매장 이름을 찾지 못하면 위치를 알 길이 없다. 빨간 비닐 테이프를 뜯어 ‘작은물 3F’라는 글씨를 붙여놨다. ‘잔’과 ‘4F’는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매장 이름인지 잘 알 수도 없는 작은 입간판 하나를 건물 앞 거리에 내놨다. 간판 없이 포스터만 덩그러니 붙어 있는 곳도 많다. ‘물결’ ‘십분의일’ ‘커피사마리아’ 등이다.

이현우 십분의일 공동대표는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간판 설치할 비용이 빠듯해 만들지 않았다. 최근에는 간판 없이 가게를 차리는 게 대세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작업실을 겸용하거나 아티스트 공연 전시가 열리는 문화복합공간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사진은 카페 겸 바 ‘작은물’(좌)과 칵테일 전문점 ‘감각의제국’(우). <사진 : 나건웅 기자>
포인트 3 아티스트 감성 ‘뿜뿜’

▷낮은 임대료 찾아 정착…작업실 겸용

그야말로 예술가 거리다. 꽁꽁 숨어 있는 매장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맞이하는 주인 중 절반은 아티스트라고 봐도 무방하다. 목재, 철판, 아크릴 등 작업에 필요한 재료를 구입하기 위해 을지로 골목을 드나들던 이들이 아예 작업실 겸 매장을 열어 눌러앉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커피사마리아는 사장인 이민선 씨와 공간을 나눠 쓰며 그림을 그리는 이마리아 씨의 이름에서 따왔다. 카페 ‘MWM’ 역시 인테리어 디자이너 최수지 씨가 작업실을 겸해 운영하고 있는 공간이다. 의류 모델이 운영하는 ‘CETU’, 주얼리 디자이너가 운영하는 ‘호텔수선화’ 등 아티스트가 차린 가게는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다.

작은물은 아티스트들의 공연·전시가 열리는 문화복합공간으로도 유명하다. 작은물을 찾은 지난 7월 18일에도 벽면 가득 작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을지로 골목을 거점으로 한 그림 소모임 ‘작당모의’를 운영하고 있다는 장지현 씨는 “이번 전시 주제는 ‘가비지 아일랜드(garbage island)’다. 을지로 인쇄골목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작은물을 운영하는 윤상훈 씨 역시 기타를 치고 곡을 쓰는 아티스트다. 그는 “을지로에는 작업과 생계를 함께 영위하는, 그야말로 먹고살기 위해 정착한 아티스트가 많다. 아티스트 자생을 위해 형성된 공간이다 보니 다른 상권과 달리 억지스럽지가 않다”고 설명했다.

포인트 4 통통 튀는 콘셉트

▷풍자·반전·이색 소품 매력에 ‘흠뻑’

을지로 밤의 뒷골목. 건물 한쪽 창문으로부터 초록 불빛이 쏟아져 나온다. 칵테일 전문점 ‘감각의제국’이다. 벽면은 한국 정치·사회와 ‘꼰대’를 노골적으로 풍자하는 포스터로 가득하다. 한편에는 해수욕장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파라솔과 플라스틱 의자가 마련돼 있다. 감각의제국을 공동 운영하는 흥건 씨는 “지난 10년 동안 일반 기업에서 브랜드 마케팅 일을 해왔다. 을지로는 참신하고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그 어느 지역보다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동네”라며 미소 지었다.

을지로에는 이처럼 독특한 콘셉트로 무장한 가게가 넘쳐난다. 카페 ‘잔’의 필살기는 그야말로 커피 잔이다. 수십 개에 달하는 다양한 커피 잔이 매대 옆에 빼곡히 진열돼 있다. 커피를 고른 후 담아 마시고 싶은 잔을 한 번 더 고르면 된다.

이 밖에 대형 스피커 두 대를 놓고 을지로에서는 보기 드물게 싱글몰트 위스키를 파는 LP바 ‘평균율’, 낡은 건물 외부와는 달리 흰색 계통의 깔끔하고 모던한 인테리어가 인상적인 디저트 카페 ‘분카샤’, 어둑한 복도 끝 입구를 핀포인트 조명으로 강조한 ‘바302호’ 등은 이색 가게가 많기로 유명한 을지로에서도 독특한 개성을 지닌 곳으로 입소문을 타는 중이다.

▶을지로 골목, 전망은

▷젠트리피케이션 위험 낮아

젊은 창업가와 아티스트가 을지로에 몰려든 주원인은 역시 저렴한 임대료다. 건물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20평 기준 월세가 100만~150만원 정도 된다. 서울 평균 상권 임대료(1㎡당 3만2700원, 20평 기준 215만8000원)와 비교해도 절반 수준이다. 을지로 골목이 입소문을 타고 사람이 몰려들수록 임차인은 애가 탄다. 임대료 상승으로 기존 임차인이 쫓겨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의 피해자가 되지 않을까라는 우려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 젠트리피케이션 가능성은 낮다는 의견이 주를 이룬다. 을지로에는 여타 골목상권과 달리 매장이 한데 모여 있는 이른바 ‘카페거리’가 없다. 상권이 분산돼 있을수록 대형 프랜차이즈 진입이 어렵다. 매물도 많지 않다. 을지로 인근 한 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는 “인쇄골목에는 수십 년 동안 가게를 지켜온 이들이 많다. 임대료가 오른다고 일제히 빠져나갈 일은 없다”고 분석했다. 지난 4월 LP바 평균율 문을 연 성민기 씨는 “물도 제대로 나오지 않을 만큼 낡은 건물이 많아 개보수 비용이 많이 든다”고 설명했다.

상권 대형화와는 별개로 을지로 골목의 인기는 꾸준히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권강수 한국창업부동산정보원 이사는 “서울 망원동 망리단길, 잠실 송리단길 등 골목상권 인기는 한동안 계속될 메가 트렌드다. 특히 을지로는 낙후된 동네 이미지가 신선하게 작용해 오히려 손님 발길을 끌고 있다”고 분석했다.

[나건웅 기자 wasabi@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69호 (2018.08.01~08.07일자)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매경이코노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