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 벌인 아버지,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아들
[오마이뉴스 정만진 기자]

강제로 빚을 우리나라에 떠안긴 일본
1907년 2월 21일 대구 광문사의 사장 김광제(金光濟, 1866.7.1.∼19 20.7.24.)와 부사장 서상돈(徐相敦, 1850.10.17~1913.6.30) 등이 앞장서서 국채보상운동을 본격화했다. 이 무렵 우리나라가 일본에 진 빚은 1300만 원이었다.

금연을 해서 모은 돈으로 나라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호응이 뜨거웠다. 일제는 언론 중 가장 적극적으로 이 운동을 이끌어간 대한매일신보의 양기탁을 모금한 돈을 횡령했다고 누명을 씌워 1908년 7월 21일 구속했다. 양기탁은 9월 29일 무죄로 석방되지만 그 사이 국채보상운동은 활기를 잃고 시들어버렸다. 일제의 간교한 술책이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서상돈의 묘소는 수성구 범안로 120, 즉 범물동 산227-1의 천주교 모역 안에 있다. 본래 달성군에 있었는데 1974년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서상돈 가문이 대구에서 손가락에 꼽힌 부호 집안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곳의 서상돈 유택은 간소하다 못해 초라하게 느껴진다. 그의 묘를 바라보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뭉클해진다. 홍의장군 곽재우가 '나라가 이 모양인데 무슨 낯으로 묘를 크게 쓴단 말이냐? 봉분도 하지 말라'는 뜻의 유언을 남겨 그의 묘소가 지금도 납작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는 이야기가 문득 떠오른다.

친일파가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직
일제 시대에 조선인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관직은 중추원 부의장(현재의 국회 부의장 정도)이었다. 중추원은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으로, 일제에 충성스러운 종으로 활동한 친일파들에게는 그곳의 참의(대략 현대의 국회의원 정도)로 임명되는 것이 최고의 명예였다. 중앙정부의 불허 방침에도 아랑곳없이 1906∼1907년 대구읍성을 일본인 상인들의 이익을 위해 마구 부숴버린 박중양은 중추원 부의장 자리를 차지했다.

아버지의 명성에 먹칠을 한 아들
서병조는 아버지가 죽은 후 물려받은 재산으로 경상농공은행, 대동무역주식회사, 조양무진주식회사, 대구제사주식회사, 경북무진주식회사 등을 설립하거나 중역을 역임했던 대표적인 자본가'로서 일본인과 조선인 자본가로 구성된 대구상업회의소와 대구상공회의소의 특별회원이었으며, 일제의 지방행정기관의 자문기구였던 대구부 협의회 회원과 경북도회 의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또한 일제의 관변단체인 명치신궁봉찬회 조선지부 경북위원, 제국 재향군인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왜 이렇게 다를까? 서상돈 묘소와 고택을 찾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물론 사람은 모두가 개체이니 부자간이든 형제자매간이든 서로 정체성이 다르다. 하지만 달라도 너무나 다를 때에는 고개가 갸우뚱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것도 신의 섭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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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대구경북역사연구회 편 <역사 속의 대구, 대구사람들>과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 편 <대구 경북 친일 행적>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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