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의 한국유사] 연개소문과 『김해병서』의 수수께끼
『김해병서(金海兵書)』는 고려시대에 사용된 대표적 병서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김해병서』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1040년 8월, 서북로(西北路) 병마사(兵馬使)가 정종(靖宗)에게 "『김해병서』는 군사 책략의 요결(要訣)이오니 청하건대 연변(沿邊)의 주진(州鎭)에 각각 한 권씩 하사하길 바랍니다"라고 아뢰었고, 정종이 그대로 따랐다고 되어 있다.
북방의 군사를 담당하고 있던 병마사가 『김해병서』의 보급을 국왕에게 건의한 것으로 보아 병서로서 가치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여러 방어지역에 보급된 점에서 당시 상당한 규모로 이미 필사되어 있었거나 필사될 정도로 널리 알려진 병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김해병서』는 『고려사』 기록 이후 더 이상 등장하지 않고 지금까지 전해지지도 않고 있다.
일부 백과사전이나 뉴스기사에서는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관련성을 언급하기도 한다. 『김해병서』는 연개소문이 쓴 병법서로서 고려시대까지 전해졌다는 것이다. 이를 처음 주장한 이는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를 쓴 단재 신채호였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 제10편 고려의 대당(對唐) 전쟁, 제3장 안시성 전투 부분에서 연개소문의 사적(事蹟)에 관한 기록들을 검토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나는 20년 전에 서울 명동에서 노상운(盧象雲) 선생이란 노인을 만났는데, 그는 '연개소문은 자(字)가 김해(金海)이며 병법 분야에서는 예나 지금을 통틀어 최고다. 그가 지은 『김해병서』는 송도(松都) 시대에 왕이 각 지역에 병마절도사를 임명할 때마다 한 벌씩 하사하던 책이었다. 이 병서는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연개소문이 그 병법으로 당나라의 이정(李靖)을 가르쳤고, 이정은 당나라 최고의 명장(名將)이 되었으며, 그 이정이 쓴 『이위공병법(李衛公兵法)』은 무경칠서(武經七書)의 하나로 꼽힌다. 『이위공병법』의 원본에는 연개소문에게 병법을 배운 이야기가 자세히 쓰여 있을 뿐만 아니라 연개소문을 숭앙(崇仰)하는 구절의 말들이 많다. 당ㆍ송 사람들이 연개소문같은 외국인을 스승으로 섬기고 병법을 배워 명장이 되는 것은 실로 중국의 큰 수치라고 여겨 드디어 그 병법을 없애버렸다'라고 하였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김해병서』를 쓸 만큼 병법에 통달했고, 이를 당의 장수 이정에게 가르쳐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정은 고구려 공격에 나섰던 당 태종의 심복이다. 이정은 당 태종에게 병법을 알려줄 만큼 병법에 능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정과 당 태종이 병법에 관해 나눈 대화가 정리된 것이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라는 병서다.
645년 당 태종은 고구려를 직접 공격한 적이 있다. 이 전쟁에서 당 태종은 고구려를 이기지 못하고 원정을 포기했다. 마지막 전투가 바로 안시성 전투였다. 당시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당의 이정이 각 나라를 대표하는 병법가라 할 수 있다. 이정은 나이가 들어 직접 고구려 전선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당 태종의 전략 수립에는 관여했음이 분명하다. 노상운이 언급한 내용은 당시 연개소문이 이정에게 한 수 가르쳐주었다는 것으로 풀이해 볼 수 있다. 결국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가 이정이 이끄는 당보다 우월하다는 의미다.
중국 산동성(山東省)과 강소성(江蘇省)에는 연개소문 설화들이 남아 있다. 특히 강소성의 경우 고구려ㆍ당 전쟁과는 무관할 정도로 거리가 떨어져 있다. 강소성에는 당 태종이 연개소문에게 죽음 직전까지 몰렸다가 설인귀의 도움으로 살아났다는 전설, 설인귀가 당군의 연패를 끊고 연개소문 군대에 대승을 거두었다는 전설, 당 태종이 연개소문에게 쫓기다가 우물에 숨었는데 거미줄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다는 전설 등이 남아 있다.
물론 연개소문이 산동성과 강소성을 직접 공격한 적은 없다. 하지만 이 지역은 당의 고구려 원정 준비에 동원된 지역이다. 수ㆍ당시기 중국은 한반도 공격을 위해 산동성에서 병력과 물자를 집결시켜 운반하였고, 강소성에서는 병력과 물자를 운반하기 위한 선박을 징발하였다. 산동성과 강소성에 연개소문 전설이 남게 된 것은 고구려 전쟁에 동원되었던 병사들이 패하여 귀환하면서 생겨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신채호는 노상운 선생의 언급을 통해 연개소문이 『김해병서』를 쓴 것으로 시사했다. 당의 대군을 막아낸 고구려의 집권자 연개소문은 병법에 능했고, 충분히 병서를 쓸 수 있다고 보았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이후 『김해병서』는 연개소문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김해병서』와 관련된 구체적 연구나 언급이 진행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신채호는 『김해병서』를 연개소문이 지은 것이라 직접 단정하지는 않았다. "노 선생이 이런 이야기를 어디에서 들어 알게 되었는지 내가 당시 사학(史學)에 어두워서 자세히 물어보지는 못하였다"라고 언급했다. 또 만주 지역에 고적과 전설이 많이 남아있으므로 후일 혹시 연개소문의 기념비를 발견하여 그에 대한 기록을 변증(辨證)하고 누락된 기록을 보충하고 싶다는 소회를 적어놓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신채호는 정체불명의 『김해병서』가 연개소문이 쓴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던 것 같다.
신채호는 1931년 『조선일보』에 한국 고대사에 관한 내용을 연재하였고, 이는 1948년 종로서원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신채호의 연재가 상고사(上古史)에서 중단되었기 때문에 『조선상고사』라고 불리고 있다.
신채호가 연재하던 시점이 1931년이므로, 20년 전 명동에서 만난 '노상운 선생'은 1910년 무렵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상고사』를 통해서는 노상운이 어떤 인물인지 전혀 알 수 없다. 그가 언급한 연개소문과 『김해병서』의 관계가 어디에서 근거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또 신채호가 글을 연재한 시점은 노상운을 만난지 2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나아가 연개소문의 자(字)가 '김해(金海)'인지 알 수도 없고, 설령 김해라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김해병서』를 연개소문이 지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김해병서』는 병서가 분명하므로 '김해(金海)'라는 용어에 주목해 보자. 『수서(隋書)』 권78, 소길(蕭吉) 열전에 '김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소길(? ~ 501)은 수나라 양제(煬帝) 시기 대학자로 지금의 강소성에서 출생했다. 자(字)는 문휴(文休)이며 『오행대의(五行大義)』를 비롯하여, 『김해(金海)』 30권, 『상경요록(相經要錄)』 1권, 『택경(宅經)』 8권, 『장경(葬經)』 6권 등을 저술했다.
『구당서(舊唐書)』 권47, 병서류(兵書類)에 보면 『김해(金海)』는 47권으로 소길이 편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신당서(新唐書)』 권59, 병서류에도 소길이 『김해』 47권을 편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일본측 사료인 『일본국현재서목록(日本國見在書目錄)』 '병가(兵家)' 항목에는 『김해』 37권으로 되어 있으며 수나라 소길이 편찬했다고 되어 있다.
『수서』는 7세기, 『일본국현재서목록』은 9세기, 『구당서』는 10세기, 『신당서』는 11세기에 각각 편찬되었다. 사서별로 『김해』의 분량이 30권, 47권, 37권으로 차이가 있지만, 수나라 소길이 40권 내외의 분량으로 편찬한 사실 자체는 부정하기 어렵다. 중국측 사료와 일본측 사료를 통해 볼 때, 『김해』는 소길이 편찬한 병서라고 해도 무방하다.
연개소문의 사망 시점은 약간의 논란이 있지만 대략 666년으로 수렴된다. 『김해』를 편찬한 소길의 사망 시점은 501년이다. 연개소문이 출생하기 160년 전에 이미 『김해』라는 병서가 존재하였고, 중국뿐만 아니라 9세기 일본에도 전해져 있었다. 당시 이 병서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한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졌음에 분명하다. 『김해병서』라는 이름으로.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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