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할아버지가 졌어?" 아들의 물음에 '이기는 법'을 답하다
[오마이뉴스 글:박정훈, 사진:권우성]
병민씨가 기억하는 통일의 집은 따뜻하고 즐거운 공간이었다. 매번 찾아가면 문 목사나 박 장로가 따뜻하게 안아주고 손잡아줬고, 수많은 이모와 삼촌들 속에서 또래 친구들과 함께 놀았던 기억으로 가득한 곳이다. 아버지의 '부재'가 내심 마음 아팠던 어린 시절, 김씨는 통일의 집에서 "위로를 많이 받았다"고 고백했다.
"김병곤 아저씨, 전태일 아저씨 등이 그렇고 너희들이 잘 아는 문익환 할아버지 또한 우리 모두의 등대지기라고 생각되는구나."
김 전 의원이 병민씨와 병준씨에게 보낸 91년 3월 27일자 편지에도 문 목사를 일컬어 '너희들이 잘 아는'이라고 특별히 쓴 걸 보면 확실히 문익환 목사와 통일의 집의 존재감은 두 남매에게는 각별했던 것 같다.
병민씨는 그렇게 자신의 추억이 새겨진 곳을 새롭게 꾸며보고자 한다. 얼마전 사단법인 '통일의 집'의 이사진이 돼, 큐레이터로서 '통일의 집'을 박물관으로 만들기 위한 기획 작업에 참여할 계획이다. 미술사를 전공한 그는 '김근태 추모전'의 전시를 기획하는데 참여하기도 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한국 현대사의 위대한 인물 두 명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작업에 나선 병민씨를 그의 집에서 만났다.
할아버지처럼 생각했던 문익환 목사
- 문익환 목사와 박용길 장로와 함께 했던 시절이 기억나시나요?
"촉각적인 기억이 참 많아요. 따뜻했어요. 아빠도 그랬지만 목사님도 안아주고 반가워해주고, 스킨십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제가 느끼기에 목사님이나 아빠나 너무나 남다를 정도로 사람을 사랑했어요.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렇게 살고, 행동할 수 없었겠죠.
장로님은 '예쁜 것'을 정말 좋아하셨어요. 초등학교 시절에 아주 예쁜 꽃무늬 포장에 거울하고 빗이 있던 선물을 받은 기억이 납니다."
- 대화를 많이 나누진 않으셨나요?
"아무래도 어렸으니까요. 주로 집에 있던 또래들과 놀곤 했죠. 그런데 같은 공간에 있으니까 참 익숙한 게 있었어요. 목사님이나 장로님이나 어렵지 않았어요. 그냥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느껴졌어요. 이번에 영화 <1987> 보고도 저는 좀 개인적인 그리움 때문에 많이 울었어요. 목사님이 통일 운동을 하시고 감옥을 가고, 장로님이 또 (방북으로 인해) 감옥에 가시는 걸 보면서 자연스럽게 그분들의 삶을 인식하게 됐죠."
- 아버지가 감옥살이를 하는 상황에서, 어린 마음에도 묘한 '동질감'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감옥이 얼마나 춥고 힘들고 그런 곳인지 어릴 적에는 잘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제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가 있었으니까요. 그냥 자유롭지 못하게 돌아다니게 하는 정도라고 생각했어요. 나중에야 신체적으로 고통스럽고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우연히도 김 전 의원이 서울 구치소에서 교도소로 이감되고, 그 자리에 문익환 목사가 들어가게 된다. 문 목사는 그곳에서 '근태가 살던 방이란다'는 말로 시작하는 시를 짓는다. 병민씨는 이 시에 대해서 "읽으면서 목사님이 아빠의 마음을 너무 잘 아는 것 같다고 느꼈다. 아빠도 잘 알고 엄마도 잘 아시는 분이니까 이런 시를 쓸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근태가 살던 방이란다.
밤새 죽어 쓰러져 있다가도 아침만 되면
꿈틀꿈틀 일어나 앉아 눈을 빛내던 방이란다
인재근의 고운 얼굴 아른거리지 않았더라면
해파리처럼 풀어지고 말았을 몸
죽음을 깔아뭉개며 아침마다 되살아나던
근태의 방이란다
동댕이쳐진 신념 손톱 끝에만은 남아 있어
곤두박히는 나락을 쥐어뜯으며 기어오르던
서울구치소 병사 9호실
근태의 방이란다
1986년 5월 31일 토요일 근태를 이감시키고
그의 흔적을 지우려고 새로 말끔히 페인트칠을 했다지만
어쩌리오 창문틈에 남아 있는 근태의 손톱자죽을
철창에서 풍겨오는 그의 입김을
철창 너머 푸른하늘에서 웃음으로 다가오는 그의 두 눈을
눈만 감으면 나는
바람으로 풀어져 울며 울며 펄럭인다
근태가 휘두르던 깃발로
민중의 깃발로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처음 본 거였어요. 충격이 컸죠. 지금도 그때 한일병원의 장례식장 풍경이 기억나요. 눈물은 안 나오고 약간 어리둥절했죠. 진짜 돌아가신 건지 아닌지 믿어지지도 않고 생소했어요. 아빠 엄마가 둘 다 장례위원이라서 오빠랑 둘이 대학로 목사님 노제에 지하철 타고 갔다 오면서 '진짜 가셨다보다', '살아 돌아오셨으면 좋겠다' 이런 말 했던 기억이 나요. 나중엔 저 혼자 '하늘나라에서는 잘 계시나요'라며 편지도 썼어요. 아무에게도 안 보여주고 책상 서랍에 넣어놨죠. 죽음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된 계기였어요."
편지 주고받았던 '평등한' 부부들
- 이번에 <젠장 좀 서러워합시다>에서 인재근 의원님 편지를 보면서, 박용길 장로님의 편지도 함께 떠올랐다. 두 분의 공통점은 아내와 수평적인 관계를 맺은 게 아닐까 싶은데.
"2009년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요청을 받아 엄마가 박용길 장로님 구술을 풀어낼 때 같이 가서 도와준 적이 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장로님을 '대단한 할머니' 정도로 생각했는데,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사랑도 많이 받고 교육도 많이 받아서 자존감이 굉장하셨더라고요. 목사님의 건강이 안 좋아 친정에서 결혼을 반대했지만 "짧게 살아도 하겠다"고 했을 정도로, 그 시대의 다른 여성들과는 달랐어요. 두 분의 관계는 동지적이었죠. 엄마도 비슷해요. 어린 시절에 사랑 많이 받고 자랐고, 넉넉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 어린 시절부터 밝고 공부도 잘하고."
- 두 분이 살아계셨다면 미투 운동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지지하지 않았을까?
"아빠가 딸이 사회로 나가서 부당한 일을 겪을까 봐 걱정이 된다는 편지를 쓴 적이 있어요. 그 편지를 고등학교 때, 대학교 때, 또 지금 이렇게 읽어보면 느낌이 달라요. 집안에서는 오빠보다 제가 더 대우를 받았으니까요. 지금은 결혼하고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입장에서 왜 아빠가 그렇게 미리 걱정을 했는지 이해가 가는 거죠.
"(빨래 이야기를 꺼내며) 머릿속으로는 엄마와 똑같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슴으로는 슬며시 미루는, 여자인 엄마에게 미루는 이 사회의 오랜 습관적 회피에서 아빠 또한 크게 벗어나 있지 못하기 때문임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불공평함의 원인인 여성 차별 대우를 반대하는 여성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엄마를 아빠가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별은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자연의 섭리로 결정되는 것인데 그로 인하여 차별을 받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병민이가 딸이기 때문에, 여자아이이기 때문에 무시되고 소홀히 여겨지는 경우는 우리 집에선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만일 그런 일이 발생할 경우 병민이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고, 엄마 또한 나설 것이다. 집안 내에 대반란이 발생할 것이다. 그리고 이 아빠도 거기에 가담할 것이고, 병준이 또한 그렇게 할 것이다"
- 주변 사람들이 김근태 의원님에 대해 쓴 글들 읽다 보면 '유독 사랑했던 딸'이라는 표현도 나올 정도로 딸을 아끼는 티를 많이 내신 것 같았어요. 왜 그렇게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성격이 엄마 닮았어요. 직설적이고 단점이고 장점이든 다 이야기하고. 아빠가 마음에 들어하던 엄마의 성격이 고스란히 저에게 온 거예요. 아빠는 본인에게 없는 장점을 엄마에게서 본 거거든요. 밝고, 해맑고, 이야기 잘하고... 수배당했을 때 엄마랑 결혼하게 된 이유도 '이 시대의 어둠을 날려버릴 것 같은 웃음' 때문이라고 했거든요(웃음). 그런 점을 닮았고, 막내이기도 해서 사랑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그러니 제가 김근태를 기억하는 일을 안 할 수가 없고요."
문익환과 김근태를 기억하는 법
- 이번에 통일의 집 이사로 들어가셨다고 전해 들었다. 박물관 개관 기획에 참여하시는 건가요?
"문영미 선생님(문익환 목사 조카, 이한열 기념사업회 학예연구실장)이 오셔서 통일의 집 개관하는데 같이 해보면 어떠냐고 말씀 하시더라고요. 사실 우리나라에서 인물을 기리는 기념 시설들이 좀 더 발전되어야 하는데, 아직은 빈약하거든요. 통일의 집을 가꾸는데 기여하고 싶었어요. 제가 미술사를 전공했는데, 자라온 환경이 독특하다보니까 의도한 게 아닌데 저절로 삶이 이런 일을 하도록 흘러왔죠."
- 어떻게 꾸밀 생각이세요?
"여러 사람들과 어떤 식으로 전시를 할 것인지 좀 더 회의를 하고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지만, 일단 문 목사님이 살았던 당시 그대로를 보존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겠죠. 생가를 흐트러트리면 복구하기가 힘드니까 원형은 그대로 두고 리모델링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요즘에는 유품을 가져다 놓고 설명만 하는 게 아니라, 그걸 어떻게 전달할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실생활과 동떨어져 있는 유품 하나만 가지고는 깊이 있게 이 사람의 삶을 이해하기가 힘들거든요. 물론 보여주는 것은 중요하지만 영화, 웹툰, 책 등 적극적으로 대중 콘텐츠로 연계가 되어야 해요."
- 민주화 운동가의 삶을 전달할 때 어떤 점에 초점을 맞춰야 할까요?
"인물을 기억하되, 그분들이 남긴 많은 가치들이 현재까지도 어떻게 유효한 것인지 알려주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민주화운동 관련 사업을 하면서 '그들만의 잔치'를 벌이면 안 되겠죠.
긍정적으로 보면 이제 한 세대가 지나갔잖아요. 민주화 운동가들을 기억하는 작업이 동지나 후배들이 아닌, 아예 아랫세대로 넘어갔잖아요. 너무 가까이서 봤던 사람들은 너무나 그들을 사랑하고 모든 걸 다 전달하고 싶어서 오히려 전달력이 약했다면, 지금은 이제 객관화된 정보를 쉬운 방법으로 알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계속 연구해봐야겠죠."
- 아이들은 김근태 할아버지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첫째 아들이 여섯 살인데 아빠가 돌아가신 다음에 낳은 아들이거든요. 제가 너무 그리워해서 그런지 처음 말을 시작할 때 '할아버지'를 먼저 말했을 정도였어요. 아빠 사진을 보면 딱 알아보고요. 여러 가지 행사에 참여하면서 이것저것 물어보죠. 언제는 '김근태 할아버지가 졌냐고, 그래서 감옥에 갔냐'면서 울더라고요. 그래서 설명해줬어요. "진 게 아니라 그들이 김근태 할아버지가 무서워서 감옥에 가둔건데, 태인이가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으면 우리가 이긴거야"라고요. 역사는 끝나지 않았고, 누가 얼마나 정확하게 기억하는 싸움이라고 생각해요."
- 실제로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역사 교육'이 중요하다고 느껴집니다.
"촛불집회도 같이 계속 나가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왜 퇴진해야 하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그래요. 제 어린 시절이 생각이 나요. 자연스럽게 여러 곳에 쫓아다니면서 아빠가 감옥에 가고 민주화운동 한 게 옳은 일이라는 걸 알게 됐거든요. 우리 아들 딸들한테도 김근태 할아버지, 문익환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그들의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자연스럽게 이야기 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 끝으로 앞으로 '통일의 집'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면?
"저는 문익환 목사님이 비교적 빨리 잊혔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 사이 보수 정권이 들어선 이유도 있겠고, 안타까웠어요. 다행히 영화 <1987>을 통해 문익환 목사님이 많이 알려졌고, 이번 기회에 대중적인 여러 매체를 통해서 목사님이 알려졌으면 합니다. 그 과정에서 통일의 집은 자료를 공유할 수 있는 허브 역할을 하면서, 문화적으로 (문익환 목사의 이야기가) 뻗어나가는 데 도움을 줬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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