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소리' 나는 물가, 무서운 고산병.. 그럼에도 '남미'
[오마이뉴스 글:박초롱, 편집:홍현진]
나는 남의 말에, 특히 명언에 딴죽을 걸길 좋아한다. 명언에 딴죽을 걸고, 그 딴죽에 다시 딴죽을 걸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정신적 가학 행위가 즐겁다. '티끌 모아 태산'보다는 '티끌 모아 티끌'이라는 말이, '성공은 1%의 재능과 99%의 빽'이라는 말이,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짜 늦은 거다'라는 말이 좋다. 그래서일까?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된 여행기에 딴죽을 걸며 굳이 '남미 여행 환상 타파' 글을 쓰는 이유가.
회사를 그만두고 세계 여행을 떠나 낯선 오지에서 진정한 자신을 찾았다고 하는 글을 보면 마음 깊숙한 곳에서 반동 에너지가 꿈틀거린다. 모험과 사랑이 가득한 여행기에는 베드버그에 물린 자국도, 소매치기도, 인종차별도 없다.
그래서 남미 여행기 1부와 2부에서는 환상이 없는 남미 여행기와 쿠바의 성추행 사건에 대해 썼다. 여행은 도피처도 장밋빛 미래도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어서.
"남미 여행 좋았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면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좋았다. 몹시 좋았다. 억 소리 나는 물가와 추위(?), 영어가 안 통하는 불편함과 고도로 인한 병에 시달렸는데도 좋다. 남미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과 치명적인 단점을 모두 갖춘 연인 같았다. 무엇이 그리 좋았느냐고?

남미 여행을 하다 만난 한국인들은 대뜸 이렇게 묻고들 했다. "시계 방향으로 오시는 길이세요? 반시계방향으로 가시는 길이신가요?" 처음에 나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남미를 모두 둘러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시작한 여행이 아니었기에 이렇다 할 계획이 없었다.
아르헨티나에 한참을 머물다 물가에 쫓겨 칠레로 건너갔고, 물 부족과 추위에 쫓겨 다시 볼리비아로 가는 식이었다. 꼭 모든 나라를 다 가봐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알고 보니 그 말은 남미 여행을 '정복'하려면 시계 방향이든 반시계 방향이든 한쪽 방향을 정해야 나라를 차근차근 둘러보고 올 수 있다는 뜻이었다.
브라질로 들어와 파라과이, 우루과이, 아르헨티나를 지나 볼리비아 페루로 나가면 시계 방향, 반대로 가면 반시계 방향이다. 고도나 물가에 따라 선호하는대로 시계 방향이나 반시계 방향을 택한다.

계획 없는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은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을을 떠날 필요도,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은 마을에 머물러야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었다. 미리 예약한 항공편이 나를 잡지도, 다음 숙소가 나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있고 싶으면 더 있었고 떠나고 싶으면 그날 오후라도 짐을 싸곤 했다.
덕분에 내가 여행의 백미로 꼽는 '예상치 않은 이벤트'를 자주 마주치곤 했다. 페루의 작은 마을 우루밤바에 갔을 때 마침 일 년에 한 번 있는 마을 축제를 만나 동네 사람들과 밤새 맥주를 마시며 춤을 추었다.
산티아고 공원에서 하릴없이 볕을 쬐다 청년들에게 저글링을 배우기도 했다. 아바나에서 만난 한국인 아줌마들과 갑자기 히론으로 떠나게 된 것도 다음 계획이 없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충동적으로 "그래, 가는 거야!"를 외칠 수 있어서 좋았다. 한 주, 한 달, 일 년, 십 년을 꽉 채워 계획해야 하는 생활에 지친 이들에게는 무계획 여행이 주는 희열이 있다.


그래서 유심 없이 다녔다. 십 년 전을 여행하는 사람들처럼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안 되는 스페인어로 물었다. 마추픽추 아래 아구아스깔리엔떼에서 20년을 산 청년이 간판도 없는 동네 식당을 알려주어 한동안 단골이 되었다. 우유니에서 만난 콜롬비아 커플이 알려준 콜롬비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마을로 여행을 떠났다.
남미 여행자 사이에서는 여행 계획을 촘촘하게 짜지 않아야 한다는 팁이 정설처럼 내려온다. 남미에서는 변수가 너무 많아 계획을 짜봤자 그대로 지키기 힘들기 때문이란다. 항공은 끊임없이 연착되고 취소된다. 기차나 버스 같은 교통편도 제시간에 출발하지 않는다.
페루만 해도 버스가 늘 같은 곳을 지나지 않고 비슷한 곳을 가는 사람을 모아 군데군데 내려주는 시스템이다. 칠레에서 외국인이 유심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허가를 한참 기다려야 한다.

한국에서 멕시코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였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이 친구들은 꼭 이렇게 외쳤다. "바일라! 바일라!(baila)" 춤추라는 뜻이었다. 말하자면 한국인들의 "한 박자 쉬고, 두 박자 쉬고, 세 박자마저 쉬고 하나, 둘, 셋, 넷!"과 같은 느낌이랄까.
남미사람들은 참 흥이 많다. 규모가 큰 축제부터 작은 마을 축제까지, 심지어는 친구들끼리의 술자리에서도 춤이 빠지지 않는다. 페루의 작은 마을 오얀따이땀보의 축제부터 칸쿤 올인클루시브 호텔에서 화려하게 연 파티까지 춤이 기본이다. 춤이 빠지면 섭섭한가보다.
핼러윈 때 리마에서는 도심 광장에서 작은 앰프 하나만을 둔 채 춤 파티를 열었다. 흔한 전시나 플리마켓도 없이, 하다못해 협찬 부스도 없이 지직거리는 앰프 하나에 의지해 모두 춤을 추었다.


남미를 여행하는 동안엔 하루가 참 길었다. 70일을 여행했지만 여행이 끝날 무렵엔 내가 고작 70일밖에 여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훨씬 길게 느껴진 여행이었다. 하루하루가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남미로 떠난 이유는 일상의 매너리즘 때문이었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았다.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느낌. 이렇게 몇백 번이고 반복되는 하루를 살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바뀔 수 없다면 나를 둘러싼 환경을 바꿔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에 여행을 떠났다.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매일 오로지 그 날 그 날만을 살았다. 어제와 오늘은 너무 달랐고 내일도 오늘과 다를 것 같았다. 이렇게 평생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남미 여행을 한 번 다녀왔다고 해서 인생이 바뀔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나도 <여름남미학교>를 열어 알랭드보통의 <인생학교> 못지않은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실은 여행 한 번 다녀온다고 삶이 변하지는 않는다. 대신 나는 아주 조금 삶을 보는 시선이 바뀌었다. 남들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조금이다. 이 조금이 내게는 어떤 의미가 될까. 내 삶을 어떻게 바꾸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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