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왕 앞에 몸 던진 여성 참정권 운동, 100년 지나 '미투'로
1918년 2월 6일 영국 의회가 일정 자격을 갖춘 30세 이상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한 국민투표법을 통과시킨 지 100주년을 맞아서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지난 6일(현지시간) 맨체스터에서 열린 여성참정권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맨체스터는 서프러제트를 이끈 시민운동가 에멀린 팽크허스트(1858~1928년)가 태어난 곳이다. 메이 총리는 “나도 할머니에게 팽크허스트에 대해 듣고 자랐다”며 거센 반대 속에 논쟁에서 승리한 이들을 기렸다.
앰버 러드 내무장관은 BBC 라디오 인터뷰에서 “방화나 폭력 같은 일에 사면을 해주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간단하지 않다”면서도 서프러제트에 대한 사면 검토 입장을 밝혔다.
서프러제트는 참정권을 뜻하는 서프러지(suffrage)에 여성을 뜻하는 접미사 ‘-ette’를 붙인 말로, 20세기 초 영국에서 일어난 여성 참정권 운동과 운동가들을 가리키는 용어다. 당초 팽크허스트가 참정권 운동을 위해 1903년 결성한 여성사회정치연합(WSPU)을 일간 데일리 메일이 경멸조로 표현한 말이었다.
뉴질랜드가 1881년 최초로 여성 참정권을 인정했고, 호주 남부가 투표권에 이어 1895년 여성의 의회 진출 권리를 승인했다. 이와 달리 영국은 민주주의가 발달했지만 여성의 권리를 받아들이는 변화는 더뎠다. 팽크허스트는 초기 합법적인 운동을 택했지만 좀 더 급진적인 방법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보수적인 영국 사회는 경멸조의 서프러제트라는 표현을 만들어낼 정도로 비판적이었다.
창문에 돌 던지고 우체국에 폭탄
1913년 교사 출신 서프러제트 에밀리 데이비슨은 영국 국왕 조지 5세가 참관하는 경마대회에서 가로대 밑으로 빠져나가 달려오는 국왕의 말에 몸을 던져 순교를 행하기도 했다. 경찰은 신문지로 이 여성의 머리에서 흐르는 피를 막았지만, 데이비슨은 깨어나지 못했다. 그의 외투 안에선 WSPU라고 쓰인 깃발 두 개가 발견됐다.
팽크허스트를 비롯해 수백명의 서프러제트가 폭력적인 행위로 수감됐고, 수감 중에도 이들은 단식 투쟁을 벌였다. 서프러제트는 “말이 아닌 행동”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활동이 중단됐지만 이들의 활동은 1918년 30세 이상 여성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인정되도록 하는 데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당시에도 모든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것은 아니고, 집을 소유한 이들만 투표장에 갈 수 있었다. 대부분의 근로자 계층은 제외됐다.
셀프리지 백화점 창립자인 헨리 고든 셀프리지는 이 같은 운동을 지지해 그의 점포 위에 WSPU 깃발을 내걸기도 했다.
서프러제트 운동의 대부분은 여성이 주도했지만, 여성의 참정권 확보를 위해 함께 공조한 남성들도 있었다. 케어 하디 의원은 하원에서 해당 이슈를 제기하고 WSPU집회에 참여했다. 조지 랜스버리 의원은 심지어 이 운동을 위해 의원직을 사임하고 집회에서 지지 연설에 나섰다가 수감되기도 했다.
주짓수 배워 지도자 팽크허스트 보호
폭력적인 행동도 주저하지 않았던 서프러제트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메치기, 누르기, 급소 지르기 등 기술에 기반을 둔 무술인 주짓수를 연마하기도 했다. 경찰로부터 팽크허스트 등 주요 인물을 보호하기 위해 이런 훈련을 받은 여성 보디가드들이 집회 현장에 배치되곤 했다고 텔레그래프가 소개했다.
이들의 여성 참정권 확보 운동은 남성의 권리 신장에도 기여했다. 1918년 이전에는 부동산을 소유하지 못한 근로자 계층 남성은 투표권이 없었다. 하지만 참정권이 일부 여성으로 확대되면서 21세 이상 모든 남성에게 투표권을 주는 쪽으로 법이 만들어졌다.
1928년엔 21세 이상 여성 참정권 쟁취
영국에서 21세 이상 여성 모두에 대해 참정권이 부여된 것은 1928년이다. 운동을 주도한 팽크허스트는 그해 6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서프러제트들의 꿈이 이뤄지기 18일 전이었다.
지난해 총선에서 영국 하원에는 여성 의원 208명이 선출돼 32%를 차지하고 있다. 상원에도 210명의 여성이 있어 26%에 해당한다. 1990년대 이후 비약적인 증가를 보였다.
하지만 현대판 서프러제트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최근 전 세계를 달구고 있는 ‘미투(me too)’ 캠페인에서 보듯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이제 막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길거리에서 추파를 날리는 남성들의 행동을 막기 위한 활동을 하는 젊은 여성과 성희롱 방지 캠페인에 나선 여대생, 현대판 노예제를 근절하려는 사회운동가 등의 활동을 영국 언론들은 집중 조명하고 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sunt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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