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속으로] 총리 임명장도 제 글씨 .. 박영수 특검은 직책만 33자였죠
고교 동아리 활동하며 틈틈이 익혀
임명장에 쓰는 글씨체는 '궁서체'
정권 교체기, 연말 인사철이 대목
많으면 하루에 30~40장 만들어
한장도 소홀이 못해 밤샘 작업 일쑤
받는 사람들에겐 '가문의 영광'
프린트한 임명장 좋아하지 않아
국새와 대통령 직인 찍어 최종 완성
━ 대통령이 주는 임명장 작성자 김이중 사무관
공무원 중 임명장 작성을 전담하는 사람이 있다. 인사혁신처 심사임용과 김이중(43·5급 전문경력관) 사무관이다. 김 사무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을 필경사(筆耕士)라고도 한다. 필경이란 붓으로 밭을 간다는 의미다.
지난 22일 오후 정부서울청사 15층. 복도 맨 끝 1517호 입구 옆에 ‘나는 대한민국 공무원으로서 헌법과 법령을 준수하고 ~’로 시작하는 ‘공무원 선서’ 액자가 걸려 있었다. 가로·세로 63cm의 액자에 담긴 이 선서를 쓴 사람도 김 사무관이다.
방 안 그의 작은 책상 위에는 벼루와 먹, 그리고 붓, 종이 등 문방사우(文房四友)가 놓여있었다. 그는 이 책상에서 날마다 벼루에 먹을 갈아 ‘대통령 문재인’이 새겨진 임명장을 붓글씨로 채운다.
김 사무관은 2003년 붓글씨를 쓰는 능력 때문에 공직(6급)에 특채됐다. 당시 행정자치부 상훈과에 훈장과 대통령 표창장을 쓰는 직원이 퇴직하면서 인력이 필요했다. 그는 미술협회, 모교인 계명대 등에서 추천을 받아 지원할 수 있었다. 그는 “면접과 실시 시험을 거쳐 9대 1의 경쟁을 뚫었다”고 말했다.
김 사무관은 임명장 작성 3대(代) 필경사로 불린다. 1대는 1962년부터 공무원들의 임명장을 쓰다 1995년에 퇴직했다. 2대 필경사는 1995년부터 2007년까지 일했다.
김 사무관은 임용 당시에는 대통령과 국무총리 이름으로 주는 표창장 쓰는 일을 했다. 그러다가 2008년 5월부터 임명장 쓰는 일로 보직이 바뀌었다. 그는 “훈장이나 표창장은 연간 3만장 정도를 써야 할 정도로 분량이 많지만, 실제 한 장당 글자 수는 임명장에 비해 적다”며 “임명장 쓰는 게 글자 수가 많아 더 힘들다”고 했다.
5급 이상 공직자의 임명장은 연간 7000장 정도 작성된다. 3~5급 승진자에게 주는 임명장이 3500여 장, 2급 이상 고위직 공무원에게 수여하는 임명장이 3500여 장이다. 김씨는 함께 근무하는 김동훈(40·6급) 주무관과 함께 임명장을 나눠 쓴다. 반면 자치단체 등에서 주는 임명장은 대부분 인쇄해 나눠준다.
이들이 쓴 임명장에는 국새(國璽)와 대통령 직인을 찍는다. 국새와 대통령 직인은 정부서울청사 행정안전부 국새 보관실에 있다. 국새를 찍는 건 원칙적으로 행정안전부 의정관실에서 하지만, 임명장이 많을 때는 김 사무관이 직접 찍기도 한다. 이와 별도로 행정안전부에는 훈장과 표창장 작성 담당 공무원 2명이 있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서류와 임명장이 손으로 쓰였다. 하지만 점차 컴퓨터로 양식화된 임명장이 주어지기 시작했다. 5급 이상 공무원이 받는 임명장도 2005년부터 2009년까지 5년간 장관에 결재 권한이 위임됐었다. 여기엔 대통령 대신 장관 이름이 인쇄돼 있고, 국새도 찍혀 있지 않았다. 그러자 공직자들이 이의를 제기했다. ‘가문의 영광’에 걸맞은 임명장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특히 9급 출신 공무원은 “어렵게 사무관(5급)까지 승진했는데 프린트한 임명장을 받으니 기분 나쁘다”고 했다. 결국 정부는 3~5급 모든 국가직 공직자의 임명장도 붓으로 작성해 수여하도록 방침을 바꿨다.
임명장 글자 수는 임명 날짜까지 포함해 보통 20~30자이다. 김 사무관은 임명장 작성에 보통 15~20분 정도 걸리며, 하루에 30~40장의 임명장을 완성한다. 이렇게 작성하는 임명장은 동일한 게 단 한장도 없다. 개인이 같은 내용의 임명장을 2번 이상 받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가 임명장에 적는 글씨체는 궁체(宮體)다. 한글 서체 중에 알아보기에 좋고 대중화한 글자체이기 때문이다.
그가 가장 바쁠 때는 정권 교체기와 연말연시 인사철이다. 이때 72개 정부 기관별로 보통 60~70장의 임명장 수요가 발생한다. 김 사무관은 “임명장 수여 일에 맞춰 작성을 끝내야 하므로 밤새워 작업할 때도 잦다”고 했다. 그는 “임명장은 받은 사람에게 가문의 영광이기 때문에 단 한장도 소홀히 만들 수 없다”며 “이렇게 만든 임명장을 받은 공무원을 볼 때마다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김 사무관이 처음 작성한 임명장은 2009년 이명박 대통령 때 임명된 한승수 국무총리 것이다. 글자 수가 가장 많았던 것은 박영수 특별검사 임명장이었다. 내용은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의혹사건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에 임함’으로, 직책 관련 문구만 33자나 됐다.
인사권자가 임명장을 주는 것은 일종의 의식이다. 공무원은 인사발령이 나면 정부인사발령통지서를 본인에게 전달하면 행정절차가 사실상 끝난다. 김 사무관은 “임명장을 주는 것은 ‘보직을 맡기니 열심히 하라’고 격려하기 위함”이라며 “임명장은 조선시대 왕이 내리는 교지(敎旨)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교지란 국왕이 신하에게 관직·관작·자격·시호·토지·노비 등을 내려주는 문서를 말한다.
김 사무관은 “임명장을 손으로 쓴 것은 인사권자의 정성을 담는다는 의미가 있다”라고 설명했다. “손으로 작성하고 국새를 찍어 주는 것은 ‘당신은 국가가 관리하는 사람이니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한지에 붓으로 써서 주는 글씨는 인쇄하는 것보다 보관 기간이 훨씬 길다고 한다.
5급 이상 공직자의 임명장을 대통령 이름으로 주는 것도 의미가 있다. 5급 이상 공직자부터 간부 공무원으로 분류하기 때문이다. 김 사무관은 “간부 공무원은 책임과 권한이 따르는 막중한 자리이기 때문에 대통령이 임명장을 직접 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붓글씨를 더 연구해 임명장 체 한글 교본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 [S BOX] 붓글씨의 필수품 문방사우 … 중국 광둥성 벼루 ‘단계연’ 2000만원 호가
벼루는 단단하고 먹이 잘 갈리면서 물이 쉽게 마르지 않는 것이 좋다. 중국 광둥성 돤시(端溪)에서 제조되는 ‘단계연’을 최상품으로 쳐준다. 비싼 것은 2000만원을 호가한다. 한국에서는 충남 보령시 남포면에서 나는 돌로 만든 남포석 벼루를 최고급으로 인정한다.
벼루의 크기는 손가락만한 것부터 책상만큼 큰 것까지 다양하다. 용·학 등 각종 조각을 넣기도 한다. 인사혁신처에서는 20~30만원 대의 남포벼루를 쓴다.
붓은 털 종류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양모, 황모(족제비털), 낭호(이리털), 계호(닭털), 죽필(대나무)에서 태아의 머리칼로 만든 태모필까지 다양하다. 털 종류가 붓의 등급을 결정하는 건 아니다. 다양한 붓은 저마다 독특한 질감을 나타내 작품 특성에 따라 달리 쓰인다. 붓 크기는 호수가 클수록 작아진다. 보통 2호가 연습용 붓으로 애용된다.
먹은 나무를 태운 뒤 남은 가루를 아교에 섞어 만든다. 주로 소나무 뿌리나 관솔 등을 태워 만든 송연묵(松煙墨)을 최고 상품으로 인정한다. 유채나 동백기름을 재료로 한 유연묵(油煙墨) 등도 있다. 일본산 송연묵을 상급으로 치며 값은 40만∼50만 원이다. 좋은 먹은 향기가 나며 약간 푸른 빛을 띤다.
종이는 주로 화선지를 사용한다. 거칠지 않고 매끄러우며 앞뒤의 구분이 쉽게 되는 것이 좋다. 글씨를 쓸 때 발묵(潑墨·먹물이 번지는 정도)이 자연스러운지 보는 것도 중요하다. 임명장 한장의 종잇값은 1500원 정도다. 」
세종=김방현 기자, 염태정 기자 kim.bang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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