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부상 트라우마 손광민, 손아섭으로 개명 뒤 이름값
이름은 한 사람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과거에는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반면 요즘은 스스로 원하는 이름을 선택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2005년 11월 대법원이 이름에 대한 개인의 행복추구권을 인정한 이후부터다.
남자 민준·현우, 여자 서연·지원 선호
남궁 기 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개명 바람’에 대해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며 “자신의 인생관과 원하는 이미지에 맞는 이름을 가지려는 경향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개명 여성이 남성보다 배 가까이 많은 데 대해 성명학자인 김만태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사회 활동의 차이로 설명했다.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사회활동 참여가 적었던 여성들은 개명에 대한 거부감이 덜한 편”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름만 바꾼다고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손아섭 선수는 ‘이름을 바꿔 성공한 대표 사례’로 불리는 데 대해 “개명은 단지 계기였을 뿐”이라고 말했다.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아섭’을 연호하는 팬들에게 보답하고자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이름이 아니라 그 이름값을 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한 덕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름을 바꾸는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새 이름을 짓는 기준은 엇비슷하다. 손아섭 선수는 ‘뜻’을 중시한 경우다. 부르기 쉽고 어감이 좋은 ‘발음’을 중시하는 경우도 많다.
연세대 남궁 교수는 “외국인도 발음하기 쉽고 영문 표기가 쉬운 이름을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과거에 선호도가 높았던 이름과 비교해 보면 뜻보다 발음, 이름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를 중시하는 경향이 뚜렷하다”고 덧붙였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한글은 소리와 발음기관이 일치하는 소리바탕 글자”라며 “니은(ㄴ), 리을(ㄹ), 미음(ㅁ), 이응(o)은 단독으로, 시옷(ㅅ)과 지읒(ㅈ)은 앞 네 글자와 어울릴 때 귀에 아름답게 들리기 마련”이라고 설명했다.
‘KILL·DUCK’ 여권 영문 개명 신청도
‘이름 바꾸기’ 바람은 한글에만 머물지 않는다. 중앙일보가 외교부에 정보공개를 청구해 확인한 결과, 최근 10년 새(2007~2017년 10월 기준) 여권 영문 이름을 바꿔 달라고 신청한 사람도 3만 5195명이나 됐다. 2007년 3269명에서 2017년(10월 현재) 6095명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일부 신청을 거부한 이유에 대해 외교부는 “영어 이름을 쉽게 바꿔주면 신인도가 낮아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외국 정부가 출입국 심사를 하기 힘들고 ‘신분 세탁’ 등 범죄에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이유다
하지만 외교부의 이런 결정에 반발해 “반드시 영어 이름을 바꾸겠다”며 소송까지 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최새미(33)씨가 그런 경우다. 최 씨는 중학생 때 가족과 미국여행을 가며 처음 여권을 만들었다. 당시 여행사 직원이 임의로 ‘새미’를 ‘SAIMI’로 표기한 탓에 오래 속앓이를 했다. 대학원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최 씨는 영어 논문을 쓰거나 해외 학회에 참석할 때마다 자신이 쓰는 이름(SAEMI)과 여권 이름이 달라 고생했다. 가수 싸이(PSY)가 명성을 얻자 외국 친구들에게 ‘싸이미’라고 놀림을 당하기도 했다. 최 씨는 외교부가 영어 이름 변경을 거부하자 지난해 소송을 내, 1심에서 승소했다.
외교부는 최 씨처럼 영어 이름 변경을 요구하는 사람이 늘자 관련 제도를 바꾸기로 했다. 올 3월부터 만18세 이상자의 경우 1회에 한해 영문 이름을 바꿀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귀화자들, 평범한 성씨 김·이·박 선택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이름을 바꾸는 사람들과 달리, ‘평범해 지려’ 이름을 바꾸는 사람들도 있다. 외국인 귀화자, 특히 결혼이주여성들이 대표적이다.
캄보디아 출신인 연페이니 씨는 결혼하며 한국 국적을 얻었다. 한동안 캄보디아 이름을 계속 썼지만, 아이를 낳은 뒤 이름을 ‘연유진’으로 바꿨다. 이름 때문에 엄마가 외국인이라는 게 알려지면, 아이들이 놀림을 받을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대법원(2008~2017년 10월)에 따르면 한국 국적을 취득해 성과 본을 바꾼 외국인 6만3167명 가운데 상당수가 김(22.9%)·이(17.7%)·박(6.3%)과 같이 ‘한국에서 흔한 성’을 선택했다. 동질성을 강조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질적 존재가 되고 싶지 않은 심리가 반영된 결과다. 김현미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결혼 이주여성들에게 이름은 자신의 문화적 기원이다. 그런 이름을 한국식으로 바꾸는 것은 다문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우리의 낮은 문화 수용성 탓”이라고 지적했다.
특별취재팀=김현예·정선언·정원엽 기자, 사진=김경록·우상조 기자, 데이터 분석=배여운, 영상=조수진, 디자인=김은교·김현서·임해든, 개발=전기환
디지털스페셜 리포트(http://news.joins.com/Digitalspecial/247)를 통해 ‘대한민국 개명 검색기’와 4편의 상세한 ‘이름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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