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신세] 약자 편이던 유네스코, 돈 앞에 무릎꿇다
옥분은 왜 머리가 하얗게 센 나이에 기를 쓰고 영어를 배우려 한 걸까요. 민재는, 할머니가 평생 감춰온 지독한 상처인 위안부의 기억을 끄집어내 미국 의회에서 증언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평화의 상징이었던 이 국제기구는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요? [알고보면 쓸모있는 신기한 세계뉴스]에서 파헤쳐봤습니다.
━ 약자의 편에서, 상식의 힘으로 유네스코(UNESCO)는 1945년 창설된 유엔(UNㆍ국제연합) 전문기구입니다.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곳곳이 만신창이가 됐을 때였죠.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정치와 경제 얘기만 해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지적ㆍ문화적 교류를 한다면 오히려 평화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탄생한 유네스코 헌장의 서문은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1970~80년대 초 ‘신국제정보질서’로 촉발된 논란입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유네스코가 가난한 나라들 편을 들었다 미국에 호되게 당한 사건.’
당시 개발도상국들은 정말 잘살아 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강대국이 번번이 가로막는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자기들끼리 ‘77그룹’을 결성하고, 국제기구에서 미국의 주도권을 조금이나마 제한하려 했습니다. 특히 선진국의 미디어ㆍ정보 장악이 문제라고 보고, 보다 균형된 정보를 유통하자는 ‘신국제정보질서 수립 결의안’을 유네스코 총회에서 채택합니다.
「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
네, 미국이 1984년에 탈퇴해버렸습니다. 영국과 싱가포르도 탈퇴했죠. 마침 소비에트연방도 미국과 협력을 원할 때라 유네스코를 멀리했고, 개도국들은 유가 인상으로 혼란에 빠져 77그룹이고 뭐고 신경 쓸 여력이 없어집니다. 그 결과, 유럽과 일본의 입김만 세졌죠.
유네스코에 오래 몸담은 저자가 쓴 『23가지 키워드로 읽는 유네스코 70년사』는 이 사건을 설명하며 “이후 유네스코 활동에서 이념적ㆍ비판적인 사업들은 논쟁의 소지가 없는 무난한 사업들로 대체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사실 이전에도 유네스코의 ‘상식’에 불만을 표한 나라는 있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를 비판한단 이유로 탈퇴(1956년)했거든요. 솔직히, 유네스코에 타격이 될 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일은 달랐습니다. 유네스코는 ‘약자’의 편에 섰고, 그 대가는 혹독했죠.
그리고 … 네, 20% 넘는 분담금을 중단해버립니다.
━ 평화의 가교, 돈 앞에 무너지다 그렇지 않아도 쪼들리던 유네스코는 혹독한 재정 위기를 겪게 됩니다. 직원을 감축하고 사업을 대폭 축소했지만 어려움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죠.
설상가상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아예 탈퇴를 선언합니다. 유네스코가 팔레스타인 편을 든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유네스코의 최대 ‘돈줄’은 분담금의 약 10%를 내는 일본(중국은 약 8%로 3위, 한국은 약 2%로 13위)이 됐죠. 이뿐만 아닙니다. 일본은 그간 전세계 역사학자ㆍ미술사학자 등으로 구성된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ㆍ이코모스)에도 상당한 연구지원금을 내왔습니다. 이코모스가 세계유산 등재에 깊이 관여하니 일본의 입김은 점점 세질 수밖에 없었죠.
프랑스의 유명 영화감독 코스타 가브라스도 가디언에 기고문을 실어 “유네스코는 문화, 예술뿐 아니라 과학 분야까지 다루는 유일한 세계기구이고 여전히 중요하다”며 “초반보다 신뢰와 명성을 잃었지만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고요.
마침 오드레 아줄레 전 프랑스 문화장관이 새 수장으로 선출됐고, 내부에서도 개혁의 목소리가 높으니 아직 희망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 캔 스피크’ 얘기로 돌아와서. 영화에는 옥분의 의회 연설을 악랄하게 방해하는 일본 측 인사들이 등장합니다. 그때 할머니가 꺼내 보이는 건, 일본군이 그의 몸에 새긴 칼자국과 낙서입니다.
무슨 말이,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할까요.
영화를 보며 참 많이 울었습니다. 옥분과 자매처럼 지내던 이웃 진주댁이 할머니의 과거를 몰랐던 것이 정말 미안하다며 펑펑 울음을 쏟아낼 때는, 저 또한 눈물 콧물을 주체하지 못했죠.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미안해하는 것, 함께 아파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기억함으로써 다시는 이런 일이 어떤 곳에서도 일어나지 않게 하는 일뿐인지 모릅니다.
그것이 그렇게 힘든 일일까요?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 용어사전 > 유네스코
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 즉 유네스코(UNESCOㆍ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의 이름은 익숙한데,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신다구요?
이름을 보시면 됩니다. 이름 그대로, 교육과 과학과 문화를 통해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고 있거든요.
유네스코는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대표적인 국제기구이며, 인류 공동의 유산을 지키는 데도 큰 공헌을 했습니다. 1960년대 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놓인 이집트의 누비아 유적지를 보호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인력과 자금을 그러모아 도왔던 ‘누비아 캠페인’이 가장 유명하죠.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유산은 세계유산ㆍ인류무형문화유산ㆍ세계기록유산으로 나뉘며 이중 세계유산은 문화유산과 자연유산, 두 가지 특징을 모두 가진 복합유산으로 분류됩니다.
한국의 세계유산으로는 ‘남한산성’ ‘조선 왕릉’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석굴암과 불국사’ 등이 있고 ‘제주해녀문화’ ‘판소리’ ‘강강술래’ ‘김장, 김치를 담그고 나누는 문화’ 등은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돼 있습니다. 기록유산으로는 ‘난중일기’ ‘동의보감’ 등이 있습니다. 2017년 10월 31일에는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등이 새로 등재됐죠.
유네스코가 현재(2017년 11월) 최우선 과제로 두고 있는 것은 양성평등과 아프리카 문제라고 합니다. 」
■ 2년 지나도, 일본은 유네스코 권고 무시···군함도 아픔은 현재진행형
「 2015년 제39회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총회가 열린 독일 본.
사람들의 이목은 한국과 일본에 쏠렸습니다. 일본은 하시마 섬, 일명 ‘군함도’가 ‘메이지 시대 산업혁명의 유산’이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 했는데 한국 정부가 강하게 항의했거든요.
일본이 그곳에서 조선인을 강제노역에 동원했던 과거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일본 측 대표는 “강제로 노역(forced to work)했던 일이 있었다”며 “희생자를 기리는 인포메이션 센터 설치 등의 조치를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일본 대표가 공식석상에서 이런 발언을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죠. 유네스코는 강제동원 시설 등을 포함해 ‘전체 역사를 제대로 반영하라’는 권고를 내리며 군함도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습니다.
그러나 등재가 결정된 이후 당시 관방장관이던 스가 요시히데는 “강제노역을 인정한 것은 아니”라며 영어 표현의 해석에 문제가 있었다고 하는 등, 일본은 강제노동이 아니었다는 기존 입장을 반복했습니다. ‘라인강의 기적’과 관련한 산업유산을 등재하면서 나치의 잔혹한 역사를 모두 포함한 독일과는 대비되는 모습이죠.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본에서 유네스코의 권고를 실행하려는 움직임은 없습니다. 군함도의 아픔이 현재진행형인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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