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조국이여 안심허라".. 젖과 꿀 흐르는 이상촌 꿈꾸다
지난 19일 새벽 서울 도심을 빠져나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407번길 봉안교회를 찾아 나섰다. 팔당댐을 지나 양수리 방향으로 향하자 다산 정약용 생가 마재마을을 안내하는 팻말이 이어졌다. 이제 수도권 사람들에게 다산 생가는 유명 관광지가 됐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마재마을의 생태 자연환경과 다산의 반듯한 삶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봉안교회는 다산삼거리에서 2.5㎞ 더 가면 자리한다. 능내리 봉안마을이다.
일가 김용기 장로는 바로 이 봉안마을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농민운동으로 한평생 산 크리스천 선각자다. 1954년 경기도 하남시(당시 광주군)에 성서에 기반을 둔 생활 및 의식 개혁 지도자 양성소 ‘가나안농군학교’를 설립한 그는 한국사회 근대화에 앞장선 인물로 평가받는다. 가나안농군학교는 강원도 원주와 경기도 양평 등에서 이어지고 있다.
김용기는 세계 최빈국으로 꼽혔던 우리나라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게 제일 큰 목표였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농군학교를 통해 개척적이고 진취적인 인재를 길러내 민족을 세우고자 했다. 그러한 그의 방향은 1960∼70년대 ‘조국 근대화’라는 박정희정부의 정책과 맞아떨어졌다. 그 시대 ‘가나안농군학교’라는 고유명사는 ‘새마을운동’과 함께 근대화의 상징적 언어가 됐다.
가나안농군학교의 뿌리 ‘봉안이상촌’
그런데 크리스천이 일반인보다 깊이 들여다봐야 할 김용기의 사상은 하나님 나라였고 그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고향 봉안촌에서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처럼 종살이하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세주 예수를 기다리면서 믿음 생활에 힘쓰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제 강점기 ‘봉안이상촌’ 건설은 이러한 믿음으로 시작됐다.
이날 찾은 봉안교회는 참신앙을 찾아 서부를 개척한 청교도들이 제일 먼저 교회와 학교를 세운 것과 같은 회당이었다.
봉안교회는 1912년 설립됐다. 김용기의 아버지 김춘교가 남양주 용진교회 한 교인이 전해준 전도지를 보고 예수를 믿은 후 마을에 기도처를 둔 것이 출발점이었다. 마을 안동김씨 문중은 김춘교 축출을 결의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으나 그는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어린 김용기는 부모로부터 엄격한 신앙훈련을 받으며 미션스쿨 광동학교에 입학했다.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에 있던 이 학교는 몽양 여운형(1886∼1947·독립운동가)이 고향에 설립한 근대 교육기관이다. 김용기는 나룻배를 이용해 두물머리를 건너 통학했다. 김용기 사상의 밑바탕이 됐던 곳이 광동학교인 셈이다.
김용기는 이 학교에서 신앙인의 자세와 민족의식을 교육받았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려면 ‘근로 봉사 희생’이라는 예수의 정신이 이 땅에서 생활로 실천돼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고향에 남아 에덴향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의 저서 ‘나의 한길’에 나타난 이상촌에 관한 대목.
“나라를 빼앗긴 지 20여년, 일제의 수탈정책에 농토마저 빼앗겨 가던 암담하던 그 시절… 안창호 선생이 모범촌을 계획했고, 이승훈 선생이… 자면회를 조직했으며, 춘원은 소설 ‘흙’, 심훈은 ‘상록수’를 써 흙에 대한 사상, 곧 잠자는 의식을 일깨웠다. …내 젊은 피도 잠자고 있을 수 없었다. ‘흙’과 ‘상록수’에서처럼 모범 이상촌을 계획했다.”
봉안이상촌 건설을 위해선 자금이 필요했다. 그는 공사판에서 장사하며 돈을 벌었다. 당시 청량리∼양평을 잇는 중앙선(1939년 개통)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봉안촌 인근으로 그 철로가 지나갔다. 그는 인부들에게 음식과 잡화를 팔아 3500원이란 거금을 벌었다. 이상촌 건설에는 토지 7만9338㎡(2만4000평)가 필요했고 총 5000원의 자금이 있어야 했다. 김용기는 부족한 금액을 쉽게 벌기 위해 폐광이나 다름없는 광산을 인수했으나 돈만 날리고 만다. 그는 땀 흘리지 않고 얻어지는 것이 없다는 평생의 교훈을 얻었다. 김용기 부부는 각고의 노력 끝에 9917㎡(3000평)의 토지를 매입, 개간하는 것으로 이상촌의 첫발을 디뎠다.
식민지 기독청년의 고뇌와 비전
1938년 2월에 찍은 한 장의 사진은 식민지 기독청년의 고뇌와 비전을 잘 보여주고 있다. 김용기보다 열 살 적은 평생 동지 여운혁(2014년 작고)과 찍은 사진이다. 여운혁은 중앙선 공사장을 찾은 손님으로 여운형과 육촌지간이다. 서울서 공부하던 그는 요양차 고향 신원리에 내려왔다가 김용기의 뜻에 반해 이상촌 운동에 나선 인물이다. 사진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
‘祖國이여 安心허라’.
1930년대 들어 일제의 무단통치와 신사참배 강요가 노골화된 시점에 겁 없는 젊은이들이 조국 운운하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친 것이다.
이상촌 건설은 본격화됐다. ‘중앙에는 예배당이요, 언덕 아래는 한강 물이 유유히 흐른다.… 12년 전 두 청년이 이 황무한 구릉에 찾아와 성심과 땀으로 싸워온 것이 오늘날 피어난 이 이상적인 마을이다.’(이일선 당시 서울 신일교회 목사 저서 ‘봉안이상촌’ 중)
이상촌에선 산양 키우기, 비료와 연료 개선, 고수익 과실농사, 고구마 재배, 양봉 등을 통해 농업발전을 꾀했다. 혼식장려, 의생활 개선, 조혼 개선, 청결 강조, 금주금연운동, 건전오락 보급, 야학운영, 서울유학 권유 등 생활 전반에도 혁신을 꾀했다. 이일선 목사 등 수많은 기독교 엘리트가 이상촌을 도왔다. 당시 40∼60명에 이르는 신앙공동체이자 생활공동체였다.
그 봉안촌의 오늘 풍경은 그저 한적한 시골마을이다. 다만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마을 좌우 산을 뚫어 터널을 만들고 터널과 터널을 잇는 공중 다리(봉안대교)가 마을의 풍경을 바꿔 놓았을 뿐이다. 고속화도로가 된 6번 국도다.
이날 봉안교회 위 반듯한 농가주택에서 이 교회 김영구(64) 장로를 만났다. 평생 고향 봉안을 떠난 적 없는 토박이다.
“김용기 장로님이 제 작은할아버님입니다. 그런 선대를 둔 것은 하나님의 은혜죠. 부끄럽지 않은 후손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김영구 장로는 옛 교회자리, 일제 탄압으로부터 독립운동가들을 숨겼던 곳, 여운형 선생 회갑잔치 집터 등을 소개했다. “6·25전쟁 때 폭격으로 마을 집들 대개가 폐허가 돼 이상촌 건설 당시의 한옥 원형 건물이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신사참배와 창씨개명 거부, 공출 거부 등이 이어지자 이상촌은 요시찰 지역이 됐어요. 더구나 항일독립운동 마을로 알려지면서 봉안교회에 부임하는 교역자조차도 없었지요. 집사였던 작은할아버지를 장로장립해 교회를 이끌어야 했지요.”
그 장로장립예배에서 김용기는 ‘황군장병무운’을 비는 묵도를 거부했다. 그 결과 양주경찰서에 끌려가 일주일간 모진 고문을 당했다. 생전 김용기는 “경찰서 차석은 홍상혁이란 자였는데 물 먹이기와 공중 매달기, 손톱 밑 찌르기, 손가락 사이 막대 끼워 비틀기 등을 해댔다”고 증언했다.
1940년대 들어 이상촌에는 여운형을 비롯, 애국지사와 학병징집 거부자 등이 은신을 위해 찾아왔다. 김용기는 그들을 고구마 창고와 기도굴 등에 숨겼다. 항일투사 전사옥에게는 미치광이 흉내를 내도록 가르쳐 보호했다.
김영구 장로는 산자락을 가리키며 기도굴의 위치를 설명했다. 해방의 분위기가 무르익자 독립운동가, 징용 징병 거부자들은 산에 숨어 필리핀에서 방송하는 맥아더의 단파방송을 들으며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 시각 김용기는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킨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도 그 영광을 주리라는 믿음으로 봉안교회 마루에 엎드려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아들 김평일 교장이 기억하는 ‘이상촌’
“군인이 군인 노릇 잘해야 한다… 부친, 박정희 대통령에게 권면”
“1961년 5·16 직후인 6월 2일 당시 국가재건회의 박정희 의장이 하남 가나안농군학교를 방문했어요. 일행이 30여명이었죠. 그들은 종일 머물며 잘살기 위한 방법을 아버님께 물었어요. 여론을 들어보니 김용기 장로를 만나 보랬다는 거죠. 제가 제대 후 아버님 밑에서 일했기 때문에 현장에 있었어요. 아버님은 ‘군인이 군인 노릇 잘해야 한다’고 권면했어요.”
지난 19일 경기도 양평 가나안농군학교에서 만난 김평일(75) 교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이 가나안농군학교를 이끌던 김용기 장로로부터 영감을 받아 실현됐다고 강조했다. 박정희는 그날 찐 고구마와 감자, 호박잼을 바른 식빵으로 식사했다. 박정희는 “내가 생각했던 대로 선생은 많이 이루었다”며 “그런(가나안농군학교 교육내용) 방식으로 하면 나라가 잘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라는 박정희 물음에 김용기는 “안 도와주는 것이 돕는 것”이라고 답했다는 일화도 전했다.
남양주·양평=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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