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짜놓은 판에서 아등바등, 일등은 해도 일류는 못 돼"

최민우.권혁재 2017. 1. 4.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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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는 전혀 다른 새판을 짜는 것
철학적 사고가 있어야 할 수 있어
도전·모험 없이 경쟁만으론 안 돼
최순실 게이트로 우리 수준 드러나
사회 곳곳에 불합리·갑질 여전
이참에 일상 속 '최순실' 도려내야


신년 인터뷰 ② 동양철학자 최진석
새해가 밝았지만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는 현재 진행형이다. 섣불리 종착역을 예단하기 쉽지 않다. 매서운 특검의 칼날만큼 반동의 몸부림 역시 만만치 않다. 그래도 누군가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또한 일정부분 사회 시스템에도 메스를 가할 것이다. 정치권에서 개헌론이 제기되고 “검찰 개혁” “정경유착 차단” 등의 주장에 힘이 실리는 이유다. 그야말로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하자는 염원이 봇물처럼 터져나오고 있다.

근데 곰곰이 따져보자. 과연 이것 뿐일까. 부역자를 처단하고 권력을 이양하고 제도를 뜯어고치면 대한민국이 달라질까. 여전히 자기만의 우물에 빠져 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린 지금 우리 자신에게 무엇을 질문해야 할까. 그래서 서강대 철학과 최진석(58) 교수를 만났다. 그는 저서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인간이 그리는 무늬』 등 노자·장자에 정통한 동양철학자다. 세속에서 다소 비켜선 도가사상을 통하면 오히려 본질을 더 꿰뚫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됐다. 최 교수는 “우리 안의 ‘최순실’을 도려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시선은 바깥이 아닌 안을 향해 있었다.
최진석 교수는 스포츠형 머리에 청바지만 입고 다닌다. 그는 “외국 것 그만 따라하고 ‘우리 것’ 만들 때다. 사회 구석구석이 전부 낡아있다. 세대교체가 필수”라고 주장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Q : 최순실 게이트로 정국이 어지럽다.
A :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첫째는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는 거다. 바로 우리 ‘수준’ 말이다. 그간 스포츠 강국이다, 경제규모 몇위다, OECD 국가다 하니깐 우린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꽤 탄탄하다’고 착각해 왔다. 스스로 과대평가해 왔다. 그게 아니라는 걸, 아직 갈길이 멀다는 걸 극단적 예로 보여줬다.”

Q : 우리 ‘수준’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A : “‘최순실 게이트’란 돌출적 사건이 아니다. 다들 올바르게 살고 있는데 하늘에서 최순실이 뚝 떨어진 게 아니란 얘기다. 여태 외면해왔고 숨기고 있었지만 한국 사회 곳곳엔 ‘최순실’이 웅크리고 있었다. 이화여대만 봐도 그렇다. 이번에 최순실·정유라와 엮인 게 이화여대라 그렇지, 다른 대학이라고 과연 부정입학·특혜시비·성적조작 등이 없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부산 모 방송사 사장은 전날 저녁까지 멀쩡히 일하다 다음날 아침 갑자기 잘렸다고 하더라. 오너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그 사장이 지금껏 벌려놓았던 사업도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됐다. 이러니 절차·비전·계획 등은 공허하게 들리고, 방송사 사장은 시청자는 안중에 없이 오너 눈치만 보게 되는 거다. 이게 박근혜-최순실 사태와 뭐가 다른가. 위정자만 나쁜 짓을 하는 게 아니다. 작은 단위 공간에선 그 규모에 맞는 불합리가 만연하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도, 청소용역 업체간에도 갑질은 비일비재하다.”

Q :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하니, 박 대통령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같다.
A : “중국 명나라 말부터 청나라 초까지 활동한 사상가 고염무는 ‘천하흥망 필부유책’(天下興亡 匹夫有責)이라는 말을 남겼다. 뜻인즉 정권이 망하는 건 정권 엘리트의 책임이나, 나라 전체가 휘청이는 건 보통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거다. 현재 위기를 촉발한 건 박근혜-최순실 일당이나 이 일로 국가를 지탱하고 있던 공통의 가치관이나 법 질서마저 흔들린다면, 이를 암묵적으로 용인했던 구성원들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거 아닌가. 무릇 정치는 그 사회의 얼굴이다. 듣기 싫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불편한 진실이다. 공적 시스템의 사유화는 정치권만의 문제가 아니다. 결코 박 대통령의 잘못을 묵인하자는 게 아니다. 하지만 비난하는 데서 멈추면 악순환은 자칫 반복될지 모른다. 일상 속 ‘박근혜-최순실’과 결별해야 한다.”

Q : 첫 번째가 현실 인정이라면 두 번째는?
A :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다. 우린 여태 싸울줄만 알았다. 정치로 치자면 상대방을 물리치는 것, 정권을 잡는데만 능했다. 그 다음이 없었다. 운영하지 못했고, 지속성을 발휘해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러니 역사의 진보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중앙일보가 신년 화두로 ‘리셋(reset) 코리아’를 설정한 건 시의적절하다. 다만 여기서 주창하는 리셋은 제도와 시스템의 교체에 머물러선 안 된다. 철학적, 인문학적 수준의 리셋이어야 한다.”

Q : 철학적 수준의 리셋이란 무엇인가.
A : “해방 이후 70여년간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급성장했다. 사회구성원의 요구와 시대적 어젠다가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어찌해야 하나. 나라를 세워야 한다. 그래서 건국한 거다. 나라를 세우고 나니 먹고 사는 문제에 관심이 생겼다. 그게 산업화다. 먹고 살만해지니 그간 소외된 인권과 권리에 시선이 옮겨갔고, 그래서 민주화까지 이룩할 수 있었다. 문제는 민주화 이후다. 87년 체제 이후 대한민국은 30년간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다. 왜?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외국 선진국도 우리 같은 진화과정을 밟지 못했다. 스스로 선례를 만들어내야 하는, 추상적 단계에 이른 것이다. 그건 철학적 기반이 없으면 안 된다. 우린 여태 일등만 해봤지, 일류를 경험한 적이 없다.”

Q : 일등과 일류는 어떻게 다른가.
A : “일등이 고만고만한 데서 이기는 거라면, 일류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우뚝 서는 거다. 일등이 전술적으로 행동한다면, 일류는 전략적으로 사고하는 이다. 삼성이 일등이라면 애플은 일류다. 결국 일류란 판을 새롭게 짤 줄 아는 것이며, 그건 철학적 사고가 있어야 가능하다. 반면 대한민국 인재는 남이 짜놓은 판에서 경쟁할 줄만 안다. 도전과 모험을 하지 않고 그저 낙오되지 않으려고만 아등바등댄다. 지식을 수입하고 이식만 할 뿐 생산하지 못한다. 최근 이화여대 사태 등은 우연이 아니다. 지식 생산이란 의사가 병을 치료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사회의 문제를 파악해 이를 수정해가는 과정이다. 윤리적 판단이 개입될 수 밖에 없다. 자연히 지식 생산엔 윤리적·공적 경험이 수반된다. 지식인의 타락은 결국 지식 생산의 경험이 없었다는 반증이다.”

Q : 그나마 발버둥 쳤기에 이만큼 온 거 아닌가.
A : “우리의 과거를 몽땅 부정하자는 게 아니다. 하지만 기존 사유방식으론 이제 진보할 수 없다. 지금 지구촌은 사실상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고착된 사회경제 구조와 세계지배질서의 연장선이다. 그때 형성된 선진국과 후진국의 격차는 좁혀지지 않고 있다. 단지 자원이나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그 밑바탕에 있는 사고체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전략적 시선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행히 찬스가 왔다. 디지털 혁명·제4차 산업혁명 등 패러다임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최순실 게이트란 반동적 사건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벼랑까지 몰렸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 아닐까. 지금 놓치면, 겉만 손질하면 계속 늪에서 허우적 댈 것이다. 철학적 사유는 단지 삶의 여유가 아닌, 이제 우리의 생존과 직결돼있다.”
글=최민우 기자 minwoo@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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