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경 칼럼] 시민혁명 원년, 박정희와 결별하자
약속 깨고 헌법·국민주권 모욕
비극과 희극이 된 부녀의 부침
광장의 시민혁명은 한목소리로
박정희 패러다임과 결별을 요구
미련 없이 헤어질 순간이 아닌가

대통령 박근혜의 탄생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탄생한 공화국의 시계를 삼촌에 이어 다시 한번 제정(帝政)으로 돌려놓은 루이 보나파르트의 퇴행적 권력장악을 21세기의 한국에 재현한 정치적 사건에 비유된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무능했지만 삼촌 나폴레옹(DNA 검사 결과에서는 혈연관계가 부정됨)에 대한 대중의 향수를 무기로 1848년 2월혁명 직후 대통령에 당선된 뒤 삼촌처럼 친위 쿠데타로 황제가 됐다. 독재의 장막이 걷힌 뒤 민주화 이후의 느려터진 의사결정과 저성장에 지쳐가던 시기에 고도성장을 이끈 박정희식 쾌도난마의 리더십을 발휘할 것이라는 대중의 기대감은 박근혜가 엄정한 검증 절차 없이 권력을 거머쥘 수 있게 했다.

시민은 서로 다른 가치와 욕구를 가졌지만 절제된 하나의 목소리를 냈고, 일곱 차례의 촛불 제의(祭儀)를 통해 마침내 앙시앵 레짐의 신민(臣民)이라는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났다. 2400년 전 아테네의 군인 소크라테스가 인육으로 생존하는 지옥의 전장(戰場)에 선 채로 밤을 새운 숙고 끝에 지혜에 도달했듯, 침몰한 공동체의 광장에 서서 스스로의 힘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황홀한 순간과 만난 것이다. 이들은 지난날로 돌아가면 죽은 박정희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정치권은 시대의 흐름을 온몸으로 읽고 명예혁명의 선구자가 된 시민들이 쏟아내는 사교육·비정규직·청년실업 해결 요구를 경청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헌법 1조 1항이 요구하는 민주공화국의 문이 열린다.
촛불 혁명은 앙시앵 레짐에 의해 훼손된 정의와 시민적 가치의 지체 없는 회복을 명령하고 있다. 이젠 정치권이 응답할 때다. 제왕적 대통령의 독주와 일탈을 뒷받침하는 전근대적 권력장치는 즉시 철거돼야 한다. 시민들은 헌법 전문(全文)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 ‘청와대’가 상왕이 되어 국회·행정부 등 헌법기관을 좌지우지하는 허무한 부조리극의 종말을 원한다. 장관 위에 문고리 3인방이 있고, 문고리 위에 비선실세가 있는 초현실적 구조를 혁파해야 한다.
삼엄한 구중궁궐 같은 청와대를 시민의 고단한 일상과 희로애락의 숨결이 느껴지는 가깝고 소박한 공간으로 옮겨야 할 것이다. 사명감 하나로 일하는 관료들이 제대로 기를 펴고 일하게 하려면 청와대 참모의 인원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검찰·경찰·국세청 등 사정기관이 주구(走狗)가 돼 주인을 물지 않도록 하는 견제 장치 마련도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다.
4·19 혁명은 이승만을 몰아냈지만 5·16 쿠데타를 막지 못했고, 6월항쟁은 전두환을 심판했지만 쿠데타 세력의 집권 연장을 허용했다. 정치권의 무능과 탐욕이 빚은 결과다. 시민혁명이 만들어낸 이번 기회마저 날려버리면 촛불은 정치권 전체를 단숨에 불태워버릴 것이다. 광장의 시민들은 최후의 질문을 던진다. 당신들은 앙시앵 레짐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새로운 세상을 맞을 준비가 돼 있는가. 그렇다면 박정희를 미련 없이 놓아주어야 할 것이다.
이하경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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